경제학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뭘까? 취업을 위해 경제학 원론을 공부했던 나에게 경제학이란 수학이다. 미분, 적분은 커녕 함수 그래프도 제대로 모르는 나는, 경제학을 배우며 문송한 과거를 원망하기도 했다. 그만큼 우리가 배우고 가르치는 경제학은 세상을 수학으로 기술하려 한다.
수학적 기술이 가능 다는 건 어떻게 보면 문제의 정답이 있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경제학에 정답이 있나? 만약 있다면 경제위기나 침체는 존재하지 말아야 한다. 명확한 정답은 문제해결의 만능열쇠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저자는 경제학을 '세속 철학'이라 명명하며, <숫자 없는 경제학>을 집필한다. 수학과는 거리가 먼 문송한 나로서는 세속 철학이라는 표현이 사뭇 반갑다. 저마다의 신념과 사상을 가지고 행동하는 다양한 인간들의 삶을 객관적인 수치화 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기에 세상을 설명하려는 경제학은 각종 변수들을 추가되며 수식은 더욱 복잡해지고 어려워졌다. 그 결과 우리의 일상과 가장 밀접한 학문 중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경제학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하지만 인간과 사회의 경제적인 다변화를 철학적 사유의 방법으로 풀어나간다면, 수학에 막혀 사라진 관심이 조금은 돌아오지 않을까? 그렇게 이 책은 경제사와 경제 원칙, 다양한 이론들을 스토리 관점에서 서술한다.
화폐의 기능을 보장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책은 한국은행에 오랜 기간 근무했던 저자의 경력답게 은행과 통화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그중에서도 화폐의 탄생과 기능에 대한 심도 깊은 고민의 흔적이 눈길을 끈다.
화폐란 무엇일까? 교환의 매개체라고 간단명료하게 정의할 수 있다. 하지만 경제 주체들은 내가 내민 화폐의 무엇을 믿고 재화를 내어 준단 말인가? 화폐의 가치를 보장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에 대해 두 가지 관점이 있다. 바로 화폐 자체가 금, 은 등 소재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금속주의와 국가가 법으로 화폐에 가치를 부여하였다는 화폐 국정론이다. 전자의 관점에서 교환의 용이성과 함께 발달한 것이 금본위 화폐제이고, 후자의 관점은 현대의 신용화폐로 까지 발전된 우리 사회에 통용되고 있는 법화(법정화폐)의 모습이다.
양이 한정된 금의 특성은 그 가치 보장에는 용이하나 금이 주요 거래 수단으로 부적합하게 한다
내가 무엇보다 관심이 갔던 부분은 금본위제도의 종말이다. 금은 고대 이집트 시대에도 값비싼 귀금속이었다. 쉽게 변질되지 않고 연성이 용이하며 다른 금속과의 분리가 쉽고 희소하다는 특징들 때문에 금은 수천 년 동안 대표적인 가치를 내재한 금속의 역할을 해왔다. 반면에 법화에 대한 신뢰는 어떠한가. 개국과 망국의 끝없는 순환의 역사 때문에 사피엔스의 DNA는 국가가 보증하는 종이쪼가리보다 노랗고 반짝이는 것을 더 신뢰하도록 진화되었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왜 현대에 금본위제가 폐지되었을까? 저자의 설명을 간략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한정된 금의 양이 산업혁명 이후 교통, 통신의 발달과 생산력의 급격한 증대로 막대하게 늘어난 거래량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에 1971년 닉슨 대통령은 금태환 포기를 선언하며 금본위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통화 발행은 위기의 손쉬운 해결책이지만, 남용되었을 때 부작용은 상상 이상이다
권력은 공백을 허용하지 않는다. 금이 가치 평가의 준거 역할에서 퇴장하자 석유거래와 세계 경찰 역할을 앞세운 미국의 달러가 그 자리를 꿰찼다. 그렇게 미국의 슈퍼파워를 등에 업고 달러는 세계의 늘어나는 엄청난 거래의 매개로서 본격적으로 활용된다.
하지만 통화량이 금 보유량에 제한을 받던 금본위제와 달리 금태환을 포기한 달러의 발행량은 오롯이 미국 정부의 손아귀에 달려있었다. 때문에 미국 위정자의 오판이 과도한 통화량의 급등락과 그로 인한 경기 순환 사이클을 초래하게 되었다.
대표적인 사건이 금태환 포기와 함께 달러 통화량의 급증과 중동의 지정학적 리스가 합쳐 탄생한 1970년대 스태그 플레이션이다. 당시 연준 의장인 볼커의 살을 내어주고 뼈를 취하는 결단으로 위기의 상황을 벗어나는 데 성공하지만, 정치권의 근시안적 특성 때문에 이후에도 통화량의 변동이 초래하는 경기의 부침이 빈번하게 되었다.
위기에 대응하는 원론적인 해결책은 경제의 내실을 다지는 것이지만, 유동성을 증가시키는 것만큼 확실하고 손쉬운 방법도 없다. 하지만 이러한 손쉬운 방법의 남발은 부작용을 낳기 마련이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이러한 통화 발행권의 전횡이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였는지 똑똑히 보았다. 17세기 프랑스의 재무부 장관을 맡았던 존 로의 은행권 남발로 인한 경제 공황 초래. 1920년대 1차 세계 대전의 배상금을 갚기 위해 마르크화의 발권을 남발한 독일의 하이퍼인플레이션. 21세기 미국의 제재와 정치권의 헛발질로 국민들을 극심한 경제적 고통으로 몰아넣고 하이퍼인플레이션을 초래한 베네수엘라 등등이 바로 그러한 예이다.
시뇨리지 효과에 취한 정치권의 방종에 달러패권의 위기설을 대두되다
그러나 2007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자 미국 연준이 택한 방법 역시 마찬가지였다. 세계화라는 방책이 통화량의 살포가 초래할 인플레이션을 막아주었고, MMT라는 역사적 교훈을 무시하는 이론까지 등장하며 미국은 엄청난 양의 양적완화를 추진하게 된다.
이후 브렉시트와 트럼피즘을 위시한 민족주의가 재차 발로하고, 미중 무역분쟁과 코로나, 신냉전, 탈세계화 등등 세계 각국 공조의 균열이 40년 만의 인플레이션을 초래하였다. 이와 더불어 미국 정부의 막대한 채권 발행과 엄청난 양의 빚으로 최근에는 달러 패권의 위기설이 대두되고 있다.
수많은 전문가들이 저마다의 미래 통화 체계에 대한 예측과 대안, 해법들을 제시하고 있는 형국이다. 그중 저자는 완전히 독립된 중앙은행이 해법이라 말한다. 이는 표를 의식한 정치권의 근시안적 태도에 휘둘려 제멋대로의 통화정책을 추진하는 중앙은행이 아닌, 테일러 준칙과 같이 경제 규모의 증가율 등 특정 경제지표를 기준으로 하여 통화량을 원칙에 맞게 조절하는 중앙은행의 존재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일견 타당성이 있으나 이상론에 가깝지 않나 생각한다. 중앙은행 위원의 선임이 정치권의 선택에 달려있음을 고려할 때, 완전히 독립적인 통화정책 결정이 가능하다고 쉽게 믿음이 가지 않는다.
또 다른 전문가들에 의해 제시된 해법들을 살펴보자. <피아트 스탠다드>의 저자인 사이페딘 아모스는 그의 저서에서 비트코인의 부상을 역설한다. 통화량이 제멋대로인 법화와 달리 2천만 개로 총량이 정해진 비트코인이 불완전한 달러의 완벽한 대안이 될 것이라 주장한다. 하지만 이 역시 몇 가지 맹점이 존재한다. 우선 비트코인은 그 총량이 한정되어 있는 만큼, 추후 엄청난 기술혁신을 맞이하여 경제 규모와 생산량의 폭발적인 증가가 일어날 때 금본위제가 지닌 한계를 또다시 직면할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화폐란 그 가치가 안정적이어야 함에도, 하루에서 엄청난 급등락을 반복하는 비트코인을 위시한 암호화폐가, 자산으로서의 가치는 차치하고, 교환의 매개체로서 역할을 해줄 것이라 기대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또 다른 전문가들은 달러를 대체할 새로운 기축통화의 대두를 주장한다. 가장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는 것이 위안화이지만, 이 역시 부정적인 시각이 훨씬 많다. 우선 내수보다 수출위주의 경제 체제인 중국의 경제 특성상 위안화가 트리핀의 딜레마를 이겨낼 수 있는가의 문제와 최근 중국의 경제 위기 상황 등 중국이 중진국 함정에 빠져 성장 동력을 잃었다는 평가도 상당하기 때문이다.
철학적 고민의 답이 하나가 아니듯, 경제현상의 해결책도 하나가 아니다
이처럼 수많은 대안이 제시되고 있지만 그 대안들이 내포한 문제도 적지 않다. 이는 제시된 해법이 오답이라기보다 어느 한 가지 완벽한 정답이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경제현상을 수리적으로만 접근해 온 그간의 시각은 지금의 무절제한 통화팽창에 대한 해법을 일원화하려는 우를 범할지 모른다. 하지만 행복을 논하는 철학적 담론에 하나의 답이 존재할 수 없듯이 경제 상황에도 한 가지 답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경제학을 '세속 철학'이라 명명한 저자의 주장처럼 경제 문제를 해결하는 절대원칙은 없다는 인식을 갖고 타인의 주장을 수용할 수 있는 포용적인 태도의 견지가 경제위기를 해결하는 가장 현명한 해법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