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어 주 전쯤, A가 타 부서로 옮기게 되었다며 인사차 들렀기에 차 한잔 나누었다. 그녀는 이곳에서 함께 하는 동안 사람들과 더불어 일하는 것에 대해서 많은 것을 느끼고 배웠다며 이야기를 건넸다. 사실 지난 오 년여의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나는 그이로 인해 이래저래 속깨나 끓였다.
함께 과제를 할 때 그이는 초기부터 본인의 역할과 업무 범위에 대해 확실하게 선을 긋는 문제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었다. 업무 경계가 분명하지 않거나, 중간에 조정하는 상황이 생기면 논의 과정에서 여러 사람을 힘들게 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스스로가 가장 힘들어했는데, 결국에는 외딴섬처럼 조금씩 고립되는 상황을 자초하게 되어 안타까웠다.
사실 우리 대부분은 여러 사람이 함께 일을 하게 되는 경우,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가능한 자신의 역할을 명확히 하고자 애를 쓴다. 맡은 바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는 업무 범위를 명확히 하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기도 하다. 그런데, 일종의 신기술(新 技術) 연구개발이라는 우리 업의 특성상 구체성이 부족한 채로 흐릿하게 밑그림만 그린 상태에서 과제가 시작되는 경우가 곧잘 생긴다. 당연히, 과제가 진행되면서 세부 사항들에 대한 논의를 거쳐 각자의 업무가 구체화되고, 그 과정에서 서로 간의 업무 경계가 조정되는 경우가 어쩔 수 없이 생기게 된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연구원(硏究員)에게는 기술적 전문성 외에도, 마음을 열고 과제의 방향성과 업무 조정을 함께 의논해 나갈 수 있는 유연한 태도가 필요하다. 또한, 이러한 과정 자체가 개인의 업무 영역과 역량을 넓히는 성장의 과정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연구원에게는 모호함을 견디는 힘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과제 수행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이런 모호함에 과도하게 예민한 것을 보게 된다. 이들은 스스로 자신의 역할에 대해 선을 긋고 그 선을 고수하려고 집착한다. 마치 자신의 주변에 눈에 보이지 않는 원을 그어 놓고, 그 원 안에서 뱅뱅 돌며, 웬만하면 그 테두리 밖으로는 나설 생각을 안 하는 것 같다고 할까? 누가 그 테두리를 조금 넓히거나 변경하려고 하면, 방어적 태도로 가드를 얼굴까지 높이 올리고, 목소리 톤이 올라가는 것이다. 이러한 선을 고수하는 태도는 일종의 경향이어서 단순히 직업적 삶 뿐만 아니라 그 개인의 삶 전체를 관통하며 영향을 받게 되는 것 같다. 물론, 자신이 제한한 테두리 안에서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나름 최선의 노력을 하며, 그럼으로써 책임감이 강한 사람으로 인정받는 경우가 많은 듯하다.
아마도 이러한 방어적 태도는 개인의 성향의 차이일 것이다. 살아오면서 겪은 경험이 영향을 끼쳤을 수도 있을 것이고, 불안감이 보통보다 조금 높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그 배경에는 저마다 고유한 삶의 스토리가 녹아 있을 수 있기에 특정 시각으로 프레이밍 하여 보편화하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왜곡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지난 삼십여 년의 연구소 생활을 돌아보면, 의외로 성실하고 우수한 여성 연구원들에게서 이런 모습 – 스스로 그은 선 안에 머물며 경계를 허무는 것에 과민한 - 을 좀 더 많이 보았다. 물론, 나에게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그어 놓은 여러 가지 선을 고수하려는 마음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종종 생각해 보고는 한다. 왜 우리는 스스로 혹은 남들이 명확히 선을 그어 주기를 요구하고, 그 선을 사수하고, 그 선 안에 머물면서 책임을 다하는 것에 남다른 집착을 하는 것일까? 선을 고수하려는 이 태도 이면에는 어쩌면 내가 미루어 짐작했던 개인적인 성향이나 경험의 차이를 넘어서서, 보다 오래되고 복잡한 사회적 배경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최근에 하게 되었다.
최근에 여차 저차 한 사정으로 직장에서의 책임감을 상당 부분 덜어내고, 근무시간도 주 삼일 정도로 줄이면서 모처럼 한가로운 시간을 갖게 되었다. 이 자유로운 시간을 통해 ‘무언가를 책임지고 해내야 한다는 사회적 의무감’를 덜어내는 와중에 문득 든 생각이, 「사회적 약자인 여성으로서 성장과 자리매김의 개인의 역사」가 결과적으로 우리를 선 안에 머무는 것에 집착하게 만드는 것 아닌가 하는 자각이었다. 역 성차별이 외려 화두가 되는 요즘 시대에 ‘사회적 약자로서의 여성’을 논하는 것이 조금 뜬금없고 설득력이 부족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육십년대에 태어나고 성장한 딸들 - 그러니까 지금쯤 오십 대를 넘어선 많은 여성들 – 은 성장기에 알게 모르게 성차별적 환경에서 성장한 것이 사실이다.
그 시대에 태어난 딸들은 아들들에게는 자연스럽게 주어졌던 관심과 기대를 못 받으며 성장했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성차별을 받았을 것이라는 것이, 오래 전 ‘아들과 딸’ 이라는 드라마에서 다루어진 것처럼 크고 작은 모든 일상에서 노골적인 차별이 있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내가 이야기하려는 것은 어린 아이의 미래의 삶과 성장 가능성에 대한 암묵적인 기대와 지지에 대한 것이다. 한 인간의 성장에 있어서 주변의 기대와 관심, 일관적인 지지가 주어진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불행하게도 인간의 미래에 대한 이러한 기대에 있어서, 여아와 남아 간의 성차별은 당시에 매우 흔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처럼 사회적 인간으로서의 미래의 가능성에 있어, 무의식적인 차별이 일상화된 환경에서 성장한 여자아이가 자신의 능력을 보여줄 기회(幾回)와 그 기회를 통해 인정(認定) 받을 수 있는 환경은 쉽게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인정받을 기회를 받기 위해서는 매일의 소소한 미션에 성공함으로써 다음 기회를 계속 부여받는 것이 중요했을 것이다. 반면, 웬만한 남자아이들에게는 일상의 미션의 성공 여부와 상관없이 어느 정도 지속적으로 기회가 주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당연히, 이처럼 그날그날의 미션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미션을 명확히 하는 것과 한눈팔지 말고 그 미션에 집중하여 완벽하게 성공했다고 인정받는 것이 중요하다. 즉, 완벽하게 성공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기에 미션을 명확히 하고 그 범위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에 집착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나날의 작은 성공을 통해 지속적으로 기회를 받고, 그럼으로써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의 성공적인 자리매김을 할 수 있었던 성실한 여성 안에는 「코 앞의 현실에서 완벽한 성공을 통해 타인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강박이 있다. 이러한 완벽한 성공에 대한 강박이 스스로 혹은 외부에서 주어진 선을 넘나드는 모호함의 시간을 견딜 수 없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각자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선을 긋고, 미션을 명확히 하고, 그 미션을 완벽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상황을 통제하기 위해 노심초사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태도 -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 책임을 완벽하게 완수하고자 하는 - 는 사회 구성원으로서 대체로 매우 바람직한 태도이기도 하다. 또한, 이 완벽함과 타인의 인정에 대한 강박은 개인의 성취를 가능하게 했던 큰 동인이자 경쟁력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편, 우리 몸에 새겨진 마이너리티 의식의 표식일 수도 있다는 자각은 꽤나 씁쓸하다. 말하자면, 우리는 이미 충분히 성장하여, 당당한 어른 여성이 되었다. 이제 더 이상, 예전의 어린 여자 아이, 즉, 타인의 인정이 매우 중요했던 사회적 약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무의식적으로 타인의 기준과 평가에 내 삶을 맞추며 인정을 받고자 애를 쓰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게다가 무엇보다 이제는 사회가 급변하고 있다. 직업인으로서 정해진 길을 한눈팔지 않고 성실하게 걸어가는 것으로는 더이상 살아남기 어려운 시대가 된 것이다. 이제 우리는 사람들과 함께 이리저리 선을 그리고 지우며, 경계를 넘나들며 가보지 않은 길을 자유롭게 찾고 탐색하며, 새로운 길을 만들어가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가보지 않은 길을 찾아가는 이러한 과정에서, 눈앞의 미션 수행에서 작은 실패를 하거나, 혹은 주위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일이 당연히 생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 앞의 목표 달성에 대한 집착을 벗어나, 실패할 수도 있다는 불안과 모호함을 견디고, 선을 넘어 도전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스스로의 한계를 넓히고 자신과 집단의 성장을 이루려는 태도가 이제는 정말 우리에게 요구되는 시대이다. 그러니, 이 시대를 건너기 위해 우리는 한번 더 성장해야 한다.
타인의 기대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저 어릴적 심어진 타율의 한계를 넘어서자. 완벽한 성공에 노심초사하며 선을 긋느라 조바심 내지 않고, 남의 일 보듯 약간은 무책임하게 지켜볼 수 있는 느긋함, 모호함의 불안을 견디는 힘을 키워 보자. 그 모호함 속에서도 지치지 않고 함께 길을 찾아 앞으로 나아가다 보면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이루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때때로 길을 잃을 수도 있고, 완벽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저 고군분투했던 어린 시절과 사회적 인정에 대한 갈구를 겪어내며, 마침내 책임감과 능력을 탑재한 괜찮은 어른이 되었다는 것을 스스로 기꺼이 인정하자. 주어진 선은 다만 삶의 참고사항에 불과하며, 필요하면 우리가 스스로 선을 그을 것이고, 또 그 선을 언제든 지우고 다시 그리며, 우리 스스로 미래로 걸어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