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花酒堂 여름 이야기

by 나무Y

지난 초여름이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부서 책임자 역할을 내려놓고 평연구원으로 복귀했다.

보직을 맡았던 이십여 년 간 바쁘고 정신없는 날들을 살았다.

몸도 마음도 지치는 날에는 막연한 기대를 하곤 했다.

언젠가 때가 되면 무거운 책임감을 내려놓고 한가롭게 삶을 즐길 날이 오리라고.

그러나 막상 한갓진 일상이 주어지니, 넘치는 시간을 주체하지 못한 마음이 이래저래 복잡해지는 것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여유를 즐기는 날도 있었으나 대체로는 무언가 허전하고 막막해져서 조금씩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렇게 기분이 널뛰기를 하며 혼란스러워하던 칠월 막바지에, 막내 동생이 여름휴가를 핑계 삼아 강원도 집으로 우리 부부를 불렀다.


서울 사는 막내 동생은 강원도 홍천의 내린천 계곡 가에 소박한 오두막을 마련하여 가꾸고 다듬어 온지가 어언 십여 년이 넘었다.

동생 부부는 꽃과 나무를 사랑하여 작은 집에는 계절 따라 소박한 꽃들이 피고 지고, 이런저런 핑계를 만들어 술을 즐기곤 한다.

계곡이 휘이 돌아가는 미산리 외딴 고갯길 너머의 이 작은 집을 나는 사랑하여 花酒堂이라는 거창한 당호까지 지어 주었다.

햇살 좋거나 비 오는 날, 엄나무 순이 올라온 날, 花酒堂은 사람을 기다린다.

우리 부부는 와인이나 막걸리를 사들고 花酒堂에 들러 제부와 술친구를 하며 이삼일 지내다 오곤 한다. 花酒堂에 들어앉아 있으면 세상은 저만큼 물러나 앉고, 맑은 새소리, 바람소리에 나는 그만 순한 산골 사람이 되곤 하는 것이다.


지난여름에는 대구 사는 언니 네를 포함하여 세 자매 부부가 花酒堂에서 팔월 초순의 며칠을 함께 보냈다. 하루는 구불구불 재를 넘어 속초 바닷가까지 내려가 싱싱한 회를 즐겼다.

또 다른 날은 오락가락하는 우중에, 집 앞 계곡에서 아이들처럼 물놀이를 하며 놀았다.

날이 어두워지면 언니와 남자들은 화투 놀이를 하였다. 나와 동생은 등나무 정자에 누워 살아온 날들과 살아갈 날들에 대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왁자한 웃음소리와 여름밤 풀벌레 소리에 시름을 잊고 여름의 몇 날을 그렇게 살았다.


돌아보니 수십 년 세월이 훌쩍 흘렀다. 고왔던 언니와 동생은 사네 마네 아웅다웅하면서도 밥상 앞으로 가족들을 불러 모으는 따뜻한 가정을 마침내 일구었다.

사회적 성취를 쫓아 공부와 직장생활로 바쁘게 쫓기며 살아온 나는 이제야 한숨 돌리며 지난날들을 돌아본다. 세 자매 모두 각자의 젊은 시간을 고군분투하며 살아내다 보니 어느새 세월이 하루 밤 꿈처럼 흘렀다. 막내가 쉰을 넘고 우리 자매는 다시 서로를 돌볼 여유가 생겼다. 누군가 사는 것을 헛헛해하거나, 길을 잃은 느낌으로 헤맬 때면 이렇게 불러 모아 함께 놀게 된 것이다.


花酒堂에서 여름 몇 날을 그렇게 지내고 다시 직장으로 복귀했다.

여전히 마음속에는 크고 작은 파도가 때때로 인다.

눈을 감으면, 초가을 따스한 햇살 속에 마당 잔디가 노랗게 말라가고 구절초가 바람에 흔들리는 花酒堂이 스친다. 마음속 파도가 잠잠해진다.


떠나온 곳은 너무 멀고, 가야 할 곳은 어디인지 아득하여 쓸쓸한 날, 花酒堂에서 자매들은 서로를 기다려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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