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좋은 날에는, 점심을 먹고 난 후에 연구소 운동장 주변을 돌며 동료들과 이런저런 한담을 나누고는 한다. 어제도 K, B와 함께 점심을 먹고 벚꽃 언덕길을 내려오면서 보니, 길 아래쪽의 금붕어 연못가에 노란 꽃창포 꽃이 무리 지어 피어나 봄 햇살에 빛나고 있는 게 아닌가. 전형적인 오십 대 공학자인 B와 K는 꽃 같은 것에는 크게 관심이 없을 터이나, 은근슬쩍 꼬드겨서 그쪽 정원으로 같이 내려가 보았다.
창포 노란 꽃 봄 햇살에 졸고 있는 오월의 금붕어 연못 정원
고운 색에 취해 정원을 둘러보는데, 주변이 한없이 조용하다. 햇살 속에 꽃들은 졸고 있고, 우리도 잠깐 말없이 서 있었다. 어쩌다 작은 바람이 슬쩍 불면 꽃들도 가만히 흔들린다. 연못 물속에는 아직 어린 연꽃이 작은 잎들을 피워내며 여름을 준비하고 있고, 금붕어들은 몸집을 불리고 있을 게다.
‘아아.... 좋은 날이다.’
꽃창포 노란 꽃
고운 녹색 잎
새색시 한복인 양 어울려
봄 햇살에 수줍게 졸다
작은 바람에 깨어나
노랗게 흔들리는
오월 금붕어 연못 정원
동료들과 연구실로 돌아오는 산책 길에, 내 마음속에 이 곳 정원의 八景이 있다고 들려주었다.
봄날의 정원
- 4월, 벚꽃 화사하게 핀 동력동 옆 언덕길, 봄바람 살랑 불어오면 내 머리 위로 꽃비가 내리는.
- 4월, 하얀 꽃 활짝 핀 6동 앞 산딸나무, 수만 마리 흰나비가 곱게 내려앉은 듯
- 5월, 12동 금붕어 연못가에 노랗게 피어난 창포꽃들, 아! 곱다
여름날의 정원
- 6월, 운동장 가 철망에 빨갛게 피어오르는 줄장미, 그 생명력이라니
- 7월, 여름 비 내리는 고즈넉한 계수나무길, 도서관에서 내다보다 상념에 젖게 되는
가을날의 정원
- 해지는 퇴근길, 11동 주차장에 줄지어 선 단풍나무, 그 깊은 녹색과 진홍색의 어우러짐
겨울날의 정원
- 11월, 어쩌다 조금 퇴근이 늦어진 날, 6동을 나서다 만나는, 어둠이 내리는 11월 서산 위에 높게 걸린 초승달, 때마침 부는 찬바람 한줄기에 쓸쓸함이 몰려오는.
- 12동 옆 소나무 군락에 하얀 눈이 쌓인 풍경. 고즈넉한 나무 데크길을 따라 홀로 걸어보는.
나중에 때가 되어 이곳을 떠나게 되더라도, 아마도 나는 이곳 정원에서의 사계의 시간을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내가 꼽는 연구소 정원의 八景을 막힘없이 들려주었지만, 그러나 정작, 내 마음속 오래 기억될 풍경은 결국 사람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오래전 젊은 내가 프로그램을 짜다 늦은 밤 야식 내기로 테트리스 게임을 하던 3동 5층 실험실 풍경,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꿈을 쫓아 동료들과 날밤을 새던 7동의 1층과 3층 연구실에서의 어떤 순간들, 무엇보다 어쩌다 보니 돌보지 못한 관계들과 그 얼굴들을 생각해 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