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이책과 e-book 사이
심각 단계의 초미세 먼지로 인해 주말 동안 집안에 갇혀 지냈는데, 월요일인 오늘 촉촉하게 봄비가 내리고 있어 기분이 상쾌합니다. 아침에 출근해서 연구소 도서관에 잠깐 들렀습니다. 도서관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계수나무길과 서쪽 산의 숲이 봄비에 젖어 그 녹색 세상이 참 싱그럽습니다.
도서관에서 내다보이는 저 길이 제가 이곳 八景 중의 하나로 치는 그 계수나무길입니다. 사진으로는 도서관 내부가 창문에 비쳐서 바깥 풍경이 썩 잘 보이지는 않습니다만, 길 한쪽으로는 벚나무들이 줄을 서 있고, 건물 쪽으로 키 큰 계수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습니다. 어릴 적 많이 불렀던 반달이라는 동요에 등장하는 그 계수나무입니다.
‘푸~른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
계수나무 한그루~ 토끼 한 마리~’
토끼와 계수나무는 무슨 인연이 있어서 노래 속에 서로 짝이 되어 있는지 궁금하군요. 아무튼, 초봄이 되면 계수나무에 동그란 잎들이 돋아납니다. 잎을 자세히 보면 살짝 하트에 가깝다고 할까 귀여운 모양새인데, 나무 아래서 올려다보면 마치 동전들을 잔뜩 매달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요. 초봄에는 1원짜리 동전만 하다가, 10원짜리, 100원짜리 동전을 거쳐, 4월 중순 쯤이 되면 대략 500원짜리 동전만 해집니다. 언젠가 점심 산책을 하다가, 계수나무 한 그루당 동전이 몇 개나 달려 있을까, 그래서 저 나무는 총 얼마나 될까 하며 동료들과 재미있는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식물에는 문외한인 우리는 주먹구구 추측도 쉽지 않았지만, 세상의 누군가는 계수나무의 나뭇잎 수를 추정하는 연구를 했을 수도 있을 겁니다. 알고 보면, 세상에는 별별 희한한 문제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나중에 시간이 남아돌면, ‘세상에는 이런 연구를 하는 사람도 있다’는 주제로 글을 써봐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당연히, 이 문장을 읽을 때는 ‘이런’에 잔뜩 힘을 주고 읽어야 합니다.)
이야기가 잠깐 옆으로 샜습니다만, 오늘은 마침 도서관에도 들렀겠다 책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저는 어렸을 적부터 책을 정말 좋아했습니다. 얼마 전에 누가 어릴적 꿈이 무엇이었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내 꿈이 무엇이었지?’ 대답을 못하고 우물쭈물했었는데요. 그 이후 몇일 동안 ‘도대체 내 꿈이 무엇이었지?’ 생각하며 좀 당황스럽기도 하고 ‘꿈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다니...’ 자괴감도 느꼈습니다.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만, 저는 어렸을 적에 ‘서점 주인’이 되고 싶어 했습니다. 꿈이라기에는 상당히 소박한 그 작은 희망 속에는 마음껏 책을 읽고 싶어 했던 어린 제 마음이 담겨 있더군요.
아무튼 책읽기를 좋아라 했던 소시적을 생각하다 보니, 후다닷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책에 대한 단편적인 기억들이 떠오릅니다. 아직 어렸을 적, ‘대망’이라는 일본 대하소설을 아버지가 어디서 빌려 오셨는데, 그 책들을 아버지와 함께 읽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책의 삽화들이 살짝 얄궂기도 하고, 내용도 당시 초등학교 오륙학년쯤 이었을 어린 제가 읽기에는 좀 그석했습니다만,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내용 중에 일본 무사들이 구운 된장을 들고 전쟁에 나가는 이야기가 있어서, ‘된장을 어떻게 굽느냐’ 같은 유치한 질문들을 아버지에게 하곤 했던 기억도 납니다.
이후, 제가 중학생이 되었을 무렵, 둘째 언니가 취업을 해서 번 돈으로 어느 날 문학전집을 들여 놓은 것은 제 독서인생의 큰 전환점이 된 사건입니다. 어쩌다 주말에 남아 있는 용돈이라도 있어서 집 앞 가게에서 ‘크림 산도 과자’를 살 수 있었던 날,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어둑어둑한 작은 방에 처박혀(^*) 그 달콤한 과자를 몰래 먹으며, ‘제인에어’나 ‘삶의 한가운데’, ‘대지’ 같은 책들을 읽고 있으면, 제 인생에 더 바랄 것 없이 충만했던 시절이었습니다. 비닐커버를 씌운 문고판 세계 명작, 백여권쯤 되었던 그 책들은 지금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다 커서는 서울 홍릉의 대학원 시절, 저보다 똑똑한 사람들이 세상에 차고 넘친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방황하며, 수시로 밤샘을 해도 수업을 따라가는 것이 힘들던 시절, 현실도피를 위해 종종 찾던 곳도 학교 앞 만화가게였습니다. 뒤늦게 무협지에 빠졌었는데, 그 스토리는 지금은 하나도 기억이 안나는군요. 그저 누런 질 나쁜 갱지의 부스스했던 종이책들만 기억납니다. 당시, 밤샘을 해도 좀체 원하던 결과가 안 나오던 전자공학 실험에 지치면, 늦은 밤에 잠깐씩 만화가게로 도망가곤 했었습니다. 무협지를 보며 라면을 나누어 먹던 머스마 친구들이 청치마를 입고 있던 저를 '청의 나~앙자' 라고, 짓굳게 때로는 정감있게 불러 주던 기억도 새롭습니다. 그 시절 박봉성작가의 기업만화도 자주 봤었지요. 일테면, 무슨 무슨 비룡건설이 어떻고 저떻고 하는...
돌아보면, 닥치는 대로 눈에 띄는 대로 책을 읽어대던, 약간의 문자 중독 같은 시절들을 지나 왔습니다. 흔히 이야기하는 명작들도 꽤 읽은 것 같기는 합니다만, 대체로 이런저런 책들을 체계도 없이 닥치는 대로, 재미로 읽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해서, 좀 아쉽기도 합니다. 그래서였는지, 아이들을 키울 때, 이 아이들은 좀 더 체계적인 독서 인생을 살게 해 주어야겠다 생각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만, 아이들은 책에 대한 열정이 그리 크지 않아서 유야무야 되었습니다. 그저, 저의 다음 생에는 좀 더 체계적인 독서 인생을 살게 될까 생각해 봅니다.
세월은 못 이겨서 노안이 온 탓에 예전만은 못 하지만, 저는 여전히 책 읽는 것을 즐깁니다. 최근에는 아무래도 온라인 서비스가 잘 되어 있는 공공도서관을 많이 찾게 되고, 또 e-book을 자주 이용하게 되더군요. 평일에 퇴근해서 여유가 있으면, 공공도서관에 접속하여 책 구경을 하다가 적당한 책이 눈에 띄면, 다운로드받아 틈틈이 읽는 것이 일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이런 e-book 위주의 책 읽기가, 닥치는 대로 책읽기의 연장이 아닌가 싶어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습니다.
얼마전, 인간의 기억에 대한 책을 우연히 읽었습니다. ‘사람은 어쩧게 생각하고 배우며 기억하는가’ 라는 책이었는데요. 이 책에 따르면, 사람은 문자나 이미지, 청각 등 미디어 종류에 따라 그 정보들을 이해하고 기억하는 메커니즘이 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인간은 문자 정보의 이해가 가장 깊으며, 공간과 관련된 기억이 가장 뛰어나게 진화해 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무언가를 잘 이해하고 기억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문자 정보로 접하고, 공간적 정보를 기반으로 기억하는 것이 좋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책의 어떤 내용을 기억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 내용만을 똑 잘라내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이 있었던 페이지에서의 문단의 위치라든가 삽화, 책을 넘길 때의 소리 등 공간을 포함하는 종합적 정보들이 연계되어 기억을 더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e-book의 경우는 어떨까요? 미디어 특성 상 문자가 아니라 그 자체로 이미지처럼 우리 뇌에서 (생각하는 과정없이) 처리된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단말이나 뷰어의 셋팅에 따라 페이지 구성이 계속 바뀌게 되므로, 우리 기억을 도와 줄 유니크한 공간 정보도 사라져 버립니다. 즉, e-book은 생각하며 책을 읽는 행위가 아니라, 마치 이미지를 보듯이 그저 보는 행위일 수도 있다는 의미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고 보니 어쩐지, 요즘들어, 책을 읽어도 읽을 때 뿐, 조금만 지나면 그 내용이 잘 기억이 나지 않더라니요. 그동안 ‘아~아~ 무심한 세월이여 ! 그 빛나던 나의 총기는 어디로 갔나~’ 하며, 나이탓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말입니다. e-book으로 보다 보니(e-book을 읽은 것이 아니라 !), 마치 휘리릭 흑백영화 한 편 본 것처럼 책들이 지나가 버렸을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거기에 더하여, 공공도서관의 e-book 위주로 가성비 좋은 독서인생을 지향하는 것이, 마치 하릴없이 백화점 돌아다니다가 어쩌다 눈에 띄는 할인 옷을 사는 거 비슷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슬슬 들기 시작했습니다. 무슨 소리인고 하니, 제가 읽고 싶은 책, 필요한 책을 딱 골라서 읽는 게 아니라, 새로 나온 e-book들을 슬슬 구경하다가 어쩌다 눈에 띄는 책을 읽게 되더라는 거지요. 물론, 도서관의 신간 e-book을 구경하다보면 어쩌다 참 좋은 책을 만나기도 하지만, 대체로는 닥치는 대로 이런 저런 책을 읽는, 결과적으로 시간을 허투루 보내는 것 아닌가 싶다는 것이지요.
비오는 봄날 아침에 도서관에 들렀던 이야기가 참 길어졌군요. 그래서, 오늘 이야기는... 이제 다시, 예전처럼, 읽고 싶은 책을 찾아서 종이책으로 읽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 중이라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래서 최근에 읽은 종이책이 어떤 것이 있냐고요?
흠... ‘인간 본성의 법칙’(로버트 그린 저)을 추천하고 싶군요. 인간과 사회에 대한 깊은 통찰, 내 뜻대로 안되는 당신이라는 인간이 갖는 욕망과 부조리, 모순, 결국은 나라는 인간의 본성을 한번 더 생각하게 하더군요. 참! 무라카미 하루키의 ‘기사단장 죽이기’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물론, 종이책으로 읽었습니다. 그런데도, 기억이 아삼삼하기는 합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