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일의 썸머’라는 꽤 알려진 영화가 있다. 사랑스러운 연인이 마주 바라보고 있는 로맨틱한 포스트가 떠오르는 이 영화를 나는 두 번 보았는데, 끝까지 보지를 못했다. 처음에는 보다가 잠이 들었고, 나중에는 맘 잡고 끝까지 보려고 했으나 중도 포기했다.
구글의 도움을 조금 받아서 이 영화 줄거리를 살펴보자. 운명적인 사랑을 믿는 톰이, 그런 사랑은 없다는 썸머를 만나 500일간의 사랑을 하고, 헤어진다. 사랑이 끝난 후, 톰이 썸머와의 지나간 시간들을 되돌아본다. 톰과 썸머 사이에 있었던 작은 사건들, 사소해 보이기만 하는 순간들을 날짜를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며 보여 준다. 그래서, 참을성이 부족한 나는 "이게 뭐야 ~ 그래서 어쨌다는 거야" 하다가 TV를 끄고 말았다.
며칠 전, 우연히 어떤 일간지의 칼럼에서 이 영화에 대한 영화평을 읽었다. 톰은 썸머를 운명적인 사랑이라고 생각하며, 썸머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처럼 보이는 반면, 썸머는 캐주얼한 관계를 지향한다. 그래서, 이 관계가 실패한 것은 썸머의 문제로 보인다. 그런데, 톰이 회고하는 썸머와의 지나간 순간들, 그 사소하고 평범한 순간들은, 사실은 왜 그 관계가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보여주는 상황들이라는 것이다. 톰이 썸머를 운명처럼 사랑했다고 믿은 그 지나간 흔적들은, 사실은 썸머가 무엇을 원하며, 어떤 사람인지 큰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를 들자면, 썸머에게 책을 선물하지만, 그 책은 썸머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책이었다. 톰은 썸머가 어떤 책을 읽고 싶은지 상관없이 자기가 관심 있는 책을 선물한다. 돌아본 매 순간이 사실은 그러하다는 것이다. 그에 비해, 그 관계에 진지하지 않은 듯했던 썸머는 톰이 어떤 사람이며, 어떻게 살고 싶은지 물어보고, 관심을 갖고 지지해 준다. 그래서, 그들의 사랑의 실패는 썸머가 아니라 톰의 실패였다. 아이러니하게도 톰이 썸머에게 선물한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라는 책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고 한다.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깊은 관심을 가진다는 것이며,
그 관심으로 그 사람이 무엇을 하고 무슨 말을 하는지
스스로 더 풍부하게 느끼게 해 준다는 것이다.」
영화는 시나 그림처럼 보는 사람이 어떤 화두를 갖고 보느냐에 따라 달리 받아들여질 수 있다. 남자와 여자, 상처, 사랑, 성장 등등 어떤 키워드를 갖고 이 영화를 보느냐에 따라 상당히 다른 이야기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칼럼을 읽으면서 “아하... 이 영화가 그런 이야기였구나! 그래서, 별 뜻도 없어 보이는 순간들을 그렇게 졸리게 늘어놓았구나!” 고개가 끄덕여졌다. 바로 그 순간들이 톰이 사랑에 실패한 순간들인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방이 어떤 존재인지 관심을 갖는 것일 것이다. 책을 선물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책을 읽고 싶은지, 왜 그 책을 읽고 싶은지 물어보는 그 사소한 순간에 사랑은 이루어진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가 온전한 그 자신이 되도록 지지하고 돕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요즘, 누구를 사랑하는가?
나는 우리 콩이를 사랑한다. 아침저녁으로 콩이 이름을 다정히 불러주고, 배가 고픈지, 무얼 하고 싶은지 콩이를 유심히 살펴본다. 먹고 싶은 것을 먹게 해 주고, 놀고 싶을 때 놀아 주고, 자고 싶을 때 자게 해 준다. 자주 안아주고 싶지만, 만지는 것을 싫어하는 듯하여, 자제하며 안아준다. 콩이가 싫어하는 일을 하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른 새벽, 거실에서 엎어져 자고 있는 콩이를 보면 문득 마음이 짠하다. 이 쬐그만 것이 누구를 믿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가.. 이 아이도 나이가 들고, 늙고, 아플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만 측은해져서, 가만가만 등을 쓰다듬어 주고는 한다. 아직은 애기 고양이인 우리 콩이는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런데... 꽁아, 너는 어떻게 생각해?”
<엄마..
나는요. 엄마가 편하고 좋아요.
그런데요.... 엄마, 사랑이 뭐예요?
먹는 거예요?
그리고요. 엄마...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요.
엄마가 퇴근해서 오면...
막 나 만지잖아요.
그래서, 내가요....
오홍 깨물고...
어떨 때는 꼬리가 빠져라 도망가고,
또 어떨 때는요.
엄마를 요렇게 요렇게 눈에 힘 빡 주고
쳐다보잖아요.
그건요.. 엄마,
내가 고양이라서 그래요.
엄마도 알다시피, 나는 아직 쬐끄만
애기 고양이인걸요.
내 말은요... 나도 엄마가 좋다고요.
그런데요, 엄마...
엄마는 고양이가 아니잖아요.
아빠를 제일로 사... 뭐라는 것...해야......>
허걱... 우리 콩이가 벌써 이렇게 컸다.
“그런데 말이다. 꽁아~
부부가 오래오래 같이 살면 말이야.
...마라.... 해라...
말싸.... 말없....
그래도.....
..... 꽃..... 밥.....
아무튼... 우짜고 저짜고...
너도 이제 크면 알게 될 거야...."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가 온전한 그 자신이 되도록 지지하고 돕는 것이다.’
문득 깨달았다. 요즘 나는 다름 아닌 나를 사랑하는 중이다. 너는 누구니? 무얼 좋아하니? 천천히 들여다보고, 그래, 해보고 싶은 대로 살아봐라 하는 중이다. 내 삶의 여름이 지나고, 가을도 깊어서야, 철 늦은 사랑을 시작했다. 이 사랑이 깊어지면, 나는 나를 지나, 이 세상 많은 것들을 제대로 사랑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사랑 #관계 #500일의 썸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