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침 저녁으로 드나드는 메인 통로 쪽에 부서장들이 자주 모이는 회의실이 있다. 어느 날 회의실 앞을 지나가는데, 익히 아는 모 실장이 복도에 서서 통화 중이었다. 아마도 회의 중에 전화가 와서, 복도로 나와 전화를 받는 중 아니었을까 싶다.
통화 중이던 그 부서장은 한 때 나와 호흡을 맞추며 함께 일을 했었던 연구소 후배였다. 나는 통화 중인 그이와 눈이 마주쳤고, 나는 반갑게 눈 인사를 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그는 나를 힐끗 쳐다보고는 그냥 고개를 돌려 전화 통화에 열중하는 것이 아닌가! 순간 상당히 당황스러웠다.
얼른 내 자리로 돌아 왔는데, 문제는 하루 종일 내 마음이 불편했다. 집에 와서 잠자리에 누워서도 그 장면이 떠오르며, 이런 저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 괴로웠다.
"아니.. 아무리 통화 중이라고 해도, 고개를 꾸벅하거나... 눈 인사라도 할 수 있는 것 아니야?"
"내가 현직 부서장에서 물러 났다고... 사람을 (개)무시하는 거야?"
"어디보자.... 내가 부서장으로 있을 때, 그이에게 뭘 섭섭하게 한 게 있는건가?"
"내가 상위 부서장으로서 일을 얼마나 못했으면...
부서장을 그만뒀다고... 저렇게 나를 대놓고 무시하는 것일까?"
솔직히 몇일 동안 잊을 만하면 불쾌했던 그 순간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영부영 시간이 지나니, 찜찜한 감정의 회오리도 지나가고, 마침내 마음이 좀 조용히 가라 앉았다. 그러고나니, 제대로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그이는 사실 사람이 상당히 반듯하고 성실한 이잖아!"
"내가 그이에게 뭐 그렇게 서운하게 한 일도 없는 것 같은데..."
"뭐... 내가 부서장으로서 아주 제대로 일을 잘 했다고 하기는 어렵기는 하지.
그래도 쉽지 않은 상황에서 나름 한다고는 했잖아!"
아마도 십중팔구 A는 중요한 전화를 받고 있는 중이였을 것이다. 전화에 집중하는 그 때에 내가 우연히 지나갔고, A는 무심코 나를 바라보았지만, 제대로 나를 쳐다본 것은 아니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나 혼자 무시당했다며 속을 끙끙 끓인 것일 게다.
사람이 사람을 신뢰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일까?
사람을 믿는다는 것은 아마도 상대방이 무심코 한 언행이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상황이 발생할 때, 그 나름의 사정이 있을 것이라는 것, 나쁜 의도로 하는 언행이 아니라는 것을 믿는 것 아닐까 싶다. 그래서, 상대의 지나가는 언행 하나 하나에 복잡하게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쪽으로 이해하고 기다려주는 그런 마음을 내는 것일게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사람을 신뢰하기 위해서는 결국 스스로를 신뢰하는 힘이 있어야 한다.
내가 겪은 저 해프닝에서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었던 불편한 생각들이 사실 내 스스로에 대한 신뢰가 부족하다는 방증아닌가! 일테면 내가 부서장을 그만두었으니, A가 나를 무시할 수도 있을 것 이라는 것도 그렇다. 내가 부서장으로서 제대로 일을 못한 것 아닌가, 혹은 사람들에게 서운하게 했던것 아니었나 하는 자책의 감정이라는 것이 결국은 내가 나를 못 믿는다는 의미이다.
사람들이 무심코하는 별 것 아닌 행동으로 혼자 서운해지는 경험을 몇 차례 겪은 후, 다행히 나름의 대응법을 탑재했다. 혹시나 서운한 마음이 들거나 불편한 생각이 들면 3단계 생각 정리법을 가동한다.
1단계: "마음이 불편하구나!"
2단계: "좋게 받아들일 수도 있고, 불편하게 해석할 수도 있는 상황이야?"
"그럼 그냥 기왕이면 좋은 쪽으로 단순하게 생각해!"
3단계: "그래도 계속 불편해? 그럼 혼자 이야기 짓지 말고, 상대방에게 직접 물어봐"
지금까지의 경험으로는 대부분 2단계에서 끝나는 상황이었다. 어쩌다 간혹 3단계로서 물어봐야 하는 경우가 있었다. 별 것 아닌 일에 무슨 뜻으로 하는 이야기인지 정색을 하고 물어보거나, 내 불편한 느낌을 직접 전달한다는 것이 어색하거나, 속 좁은 사람으로 비치는 것 아닌가 싶을 때도 있었지만, 혼자 속 끓이는 것 보다 나았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내 언행으로 상대방이 불편한가 싶은 경우도 있다. 그럴 때에도 가능한 단순하게 생각하며, 굳이 나를 설명하려고는 하지 않는다. 필요하면 나에게 물어볼 것이라고, 가능한 단순해 지려고 한다.
근래에는 혼자 속 끓이는 일이 거의 없는 것 같다. 단순하게, 속 편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스스로를 신뢰하는 힘이 커지고 있고, 스스로를 신뢰하는 만큼 사람들을 신뢰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싶다. 사람으로 인해 조금 서운한 상황이 생겨도, 그 나름의 사정이 있을 것 이라는 것, 내가 나쁜 마음으로 상대방을 일부러 불편하게 하는 사람이 아니듯이 상대도 그러할 것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런데, 어저께 남편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나는 배려심이 좀 있는 편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더니 남편이 딱 잘라 말했다.
"글쎄... 내가 보기에 당신은 그렇게 사람에 대한 배려심이 있는 편은 아니야.
오히려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면, 윗 사람이든 아랫 사람이든 할말은 직접 하는 편이지.
거기다 판단이 상당히 빠르고, 인내심이 부족해서... 진득히 못 기다려주잖아"
허걱, 새겨 들어야 할 말이다. 신뢰 이전에 배려를 먼저 몸에 새겨야 하고, 그 배려를 통해 신뢰를 쌓게 되는 것일 게다. 비록, 내가 나쁜 의도로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사람은 아니라고 스스로를 믿지만, “긴건 기고, 아닌 것은 아니다”는 나름의 개똥철학과 일에 대한 열정이라는 명분으로 포장된 나의 직설법과 속전속결 대화법에 속끓인 사람들이 많지 않을까 싶다.
늦게 철이 들고 있다. 갈 길이 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