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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힘

- 허걱, 내가 저 말을 했다고? 저 말을 했단 말이지! -

by 나무Y

내가 몸담고 있는 통신분야 산업이 지난 수년 동안 유래없는 큰 변화를 겪고 있다. 전통적으로 하드웨어 기술 종속적이며, 통신용에 특화된 고가 장비 위주의 산업에서 범용 서버와 소프트웨어 위주의 플랫폼 산업으로 변화 중이다. 컴퓨팅 분야의 기술과 비즈니스 혁신이 통신분야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중인 셈이다.

6~7년전, 나는 꽤나 무거운 자리를 맡아 그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남겠다고 노심초사 중이었다. 당시 우리 조직은 삼중고에 허덕이고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정부의 연구개발 기금이 전반적으로 줄어들어 예산 확보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데 있었다. 게다가 주요 인력들은 기술 환경변화에 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비유하자면, 축구경기 선수들이 모여 있는데, 갑자기 배구경기를 해야 하는 상황 같았다고나 할까? 그에 더해서, 조직력과 체계적인 시스템웤이 중요했던 전통적 통신산업과 달리, 소프트웨어 중심의 기술 경쟁에서는 아주 뛰어난 한두명의 스타 플레이어(업계에서 흔히 ‘구루’ 라고 불리우는)가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서서히 깨달아 가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 와중에 나의 의욕은 넘쳐서, 오픈소스 커뮤니티에서 우리 조직의 존재감을 부각시켜 보겠노라 호기를 부렸다. 그러나, 오픈소스 생태계에서 정부출연 연구조직이 경쟁력을 갖기는 쉽지 않았다. 열심히 하고 안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조직 문화와 일하는 방법, 성과의 가치체계 자체를 완전히 바꾸어야 하는 구조적 문제에 직면한 것이다. 스스로 모든 것을 다 하는 방식이 아니라 함께 쌓아 올리고, 빠르게 공유하고, 함께 문제를 풀어가는... 경쟁에서 공유와 협업으로의 일하는 문화의 전환이 필요했다. 논문이나 특허 위주의 성과 가치 체계도 소프트웨어 중심 연구개발에는 맞지 않았다. 그리고 이 모든 것, 예산과 전문인력, 조직문화, 가치와 비전의 전환은 단시간에 해결될 수 없는 문제였기에 단기간에 무언가를 해 낸다는 것이 한마디로 쉽지 않았다.

그렇게 노심초사하며 길을 찾고 있던 무렵, 산타클라라에서 개최된 어떤 오픈소스 포럼에 출장을 갔다. 어느 저녁에, 그곳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일하던 후배와 저녁 식사 자리를 갖게 되었는데, 뜻밖의 연구소 선배를 만나 합석을 하게 되었다. 마침 컴퓨팅 소프트웨어 쪽 전문가들인 그들을 앞에 두고, 나는 최근의 기술 산업 변화에 따른 어려움을 토로하며, 우리가 나아갈 바를 물었다. 통신 기술이 더 이상 통신이 아니라며, 소프트웨어 기술로서 어떻게 경쟁력을 키울 수 있는지에 대해 조언을 구했다.


세월이 흐르고, 나는 무거운 책임에서 자유로워졌다. 지난해 년말이었을 게다. 연구소 근처 횟집에서 지인들과 소주 한잔을 나누고 있는데, 우연히 그 선배분을 다시 맞닥뜨렸다. 술이 거나하게 취한 그분은 우리 자리에 합석하여 이런 저런 추억담을 두서없이 들려 주었다. 그러다가 (이제는 저 위. 높.은. 자.리.에 앉은) 선배께서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갑자기 이야기를 꺼내셨다..

“우리 미국에서 만났었지요? 산타클라라였나…

그 때 … '전생에 뭔 죄를 지어서 오픈소스를 한다고

이 고생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그랬었지요...”

허걱… 내가 저 말을 했던가....저 말을 했단 말이지!

노력해도 쉽지 않다는 것을 농담삼아 자조적으로 표현했었나... 그러나, 뜻밖의 자리에서 술에 취한 그 분의 입을 통해 듣고 보니, 내가 참 못난 소리를 했구나 싶었다.


나는 살짝 억울했고, 또 조금 충격을 받았다. 기술산업의 급속한 패러다임 전환의 파도에 올라타, 이리저리 휘둘리며, 내가 깨닫고 내가 통찰했던 그 시사점과 우리가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를 물었던 그 의미있는 말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난데없는 운명론자의 징징대는 말만 어째 그의 기억에 또렷이 남아 있게 된 것인가? 그나마 나는 결코 징징댄 것이 아니라, 그냥 농담을 한 것에 불과했을텐데... 무엇보다 나는 징징대는 사람이 결코 아니다!


그 날 이후, 연구소에서 오고 가다 그 (높은) 분을 어쩌다 만날라 치면, 문득 그를 붙잡고 나를 설명하고 싶거나 따져 묻고 싶은 충동을 한동안 느꼈다.

'그런대요. oo님, 달을 가르켰는데, 왜 제 손가락 끝에 묻었던 먼지 한 톨만 (달랑) 기억하시는지요?'

그러나, 그는 내 소리가 닿지 않는 저 위 어딘가에 떠있고, 나는 '헛되고 헛되도다'를 깨달으며 스스로 물러 앉는 중이다.



어저께 퇴근길에, 건너 건너 아는 후배가 마음 고생 중이라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혼자서 열심히 한다고 뭐가 해결되기는 어려운 구조적 문제로 진퇴양난에 빠져 힘들어 하고 있는 듯 한데, 조직을 책임지는 입장에 놓인 그의 처지가 남일 같지 않았다. 무엇보다 하도 답답해서, '알았다고... 나는 빠질테니 알아서 해보라'고 가볍게 말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진지하게 전했던 앞의 말은 어딘가로 사라지고, 답답해서 던진 문장 하나만 남아, 뒷 수습이 안되고 있다는 이야기…내 마음 마저 심난해지며, 문득 나의 저 억울한 산타클라라 에피소드가 떠 올랐다.


달을 가르켰는데, 손가락 끝만 기억한다면, 누구를 탓해야 하는가?

물론, 손가락 끝만 바라본 그 상대가 문제이다. 그러나, 달을 가르키면서, 정작 손가락 끝만 바라보게 만들었을 수도 있다. 일테면, 아주 강렬한 색깔의 매니큐어를 칠하고 있었다던가, 손가락에 붕대를 칭칭매고 있어 보는 이가 자기도 모르게 손가락에 확 쏠리게 만들었다면, 어찌 그 상대만 탓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나의 산타클라라 에피소드가 남기는 시사점은 이러하다. 본질을 호도할 수 있는 말, 머리에 콕 박힐만 한 표현은 삼가라는 것. 특히나, 책임있는 자리에 있다면, 가벼운 표현을 함부로 하지 말라는 것. 가볍게 생각없이 툭 던진 말이 때로는 강렬하게 사람의 이.미.지.의 한 결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한두마디 말이 상징하는 이미지에 사로잡히면, 달을 향하는 그 내용과 서사는 잊혀지고, 사람들의 머리 속에 손가락 하나의 그림 한장, 만화 한 컷만 달랑 남아 있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말의 힘이 그렇게 강하다.


그나 저나.....


'일 잘하는 유능한 후배님,

꼭 그 일을 해야겠다면, 진심을 다해 한번 더 설득해 보세요.

(기분 따위는 꼭꼭 접어서 포켓 깊숙히 숨기고요.)

그럼에도... 툭 던진 말 한마디로 기회가 훅 날라가 버릴수도 있어요.

억울하겠지만 되돌아 보고, 살펴 보면,

딱 후배님 손가락 끝만 바라보게 한 그 무엇이 더 있을 거예요.

그리고, 정말 중요한 것!

물러나 앉아도 됩니다. 큰 일 아닙니다.

누군가가 죽을 끓이든, 밥을 끓이든 마무리를 할 것이고,

연구자로서, 전문가로서 성장하는 길도 열려 있고,

기왕 엎어진 김에 조금 쉬었다 가도 정말로 괜찮습니다,


이만큼 살아내고 돌아보니,

그런 일들, 정말 별 것 아닙디다!'


< 사진출처: pixaba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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