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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Y Aug 08. 2022

박여사의 아픈 손가락

- 큰 언니는 이제 누구에게 전화를 걸어, 그 하루를 이야기할 것인가 -

    < 큰언니는 이제 소소한 그 일상을 누구에게 미주알 고주알 이야기할까 ?
    일테면,
    ‘딸이 괜스레 성질을 부린다던가,
    손주가 말을 안들어 골치가 아프다던가,
    허리가 끊어지듯이 아프고,
    집에 된장은 떨어져 가는데 큰일이네’ 같은...   

   

큰 언니가  일종의 자폐 스펙트럼이 아니었을까 하는 뒤늦은 깨달음

         내 유년기의 어렴풋한 초기 기억들은 성주 어느 시골집, 습기가 많아 담벼락에 푸른 이끼가 끼어 있던  뒤안에서 시직된다. 그 뒤안은 끊어질  이어지는  언니의 울음 소리로 연결된다. 아버지가 돌아오시기 전에  언니의 울음이 그쳤으면 하던  마음도 떠오른다. 결국 언니의 울음은 그치지 않아 퇴근한 아버지의 불호령이 떨어지고, 부엌에서 허둥대던 엄마에 대한 기억. 아마도 그즈음 큰언니는 초등학교 상급반 이었을테고, 나는 대여섯  정도 였을까... 아니면 그보다 조금  훗날들이었을까.  


         나중에 엄마가 되어 내 아이들을 키우던 시절, 자폐라든가 아스퍼거 증후군 같이 심리적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에 대한 정보를 접했다. 그때에서야 비로소 큰 언니가 일종의 자폐 스펙트럼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으나, 깨달음은 너무 늦었다. 어쨌거나, 우리 오남매가 자라던 육칠십년대는 자폐와 같은 특수 아동에 대한 정보와 관심은 커녕, 먹고 살기에도 바빴던 시대였으니 누구 탓을 할 것인가.


      큰언니는 그저 집안의 골칫거리였다. 혼자서 무엇 하나 제대로 하는게 없고, 아무하고도 말을 하지 않았다. 학교를  가려고 하면서, 어두운 뒤안에서 하루종일 울곤 했다고 한다.  우는지 아무리 묻고 달래도 답은 안하고 질긴 울음으로 부모님 속을 태웠다.


       아버지는 학교 선생님이었으나, 장녀의 이상한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고, 게다가 아버지는 성격이 예민하셨다. 아버지는 자주 큰언니를 혼냈고, 아버지의 불호령 속에 우리집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곤 했다. 나는 이해할 수 없는 큰언니를 창피해 했고, 집안 분위기가 엉망인 날에는 큰언니를 원망하며 성장했다.


         큰언니는 중학교를 가까스로 마친 후, 더 이상의 학업을 포기하였다. 혼자서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일이 없어지자, 비로소 울음도 그쳤다. 그저 있는 듯 없는 듯한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부모님 입장에서는 자나깨나 잊을 수 없는, 어깨에 올라 앉은 무거운 짐이었을 것이다. 성장하면서 큰언니는 무서운 아버지를 피해, 대구에서 공부하고 있던 우리 남매들에게 와 있거나, 혹은 장수에 있던 큰 집으로 가서 지냈다.      


         어느  밤의 부모님의 대화도 생각난다. 그날 아버지는 도무지 사람들하고 섞여 살 수 없는 큰 언니를 수녀원에 보내면 어떠냐고 하셨다. 엄마는 동생들에게 더 이상 부담이 안되도록 시집을 보내야겠다고 하시다가, 결국 네탓 내탓하시며 크게 다투셨다.  시절에도 집안은 넉넉하지 않았고, 큰언니란  존재만으로도 아버지는 때때로 부아가 치밀어 오르는지 자주 역정을 내어 엄마를 힘들게 했다.


         내가 대학생이었던 어느  봄에  언니는 마침내 시집을 갔다. 큰언니가 감당할 수 있도록 시부모가 없는 단촐한 가정에, 언니를 품을 수 있도록  나이가 좀 있었으면 하는 것이 당시 엄마의 첫째 사위의 조건이었다. 큰언니는 경제력 능력이 부족했던  형부와 아이 둘을 낳고 살았으나, 이혼을 하네 마네 하며, 울고 불며 우리 집으로 돌아와 방문을 걸어 잠그고는 했다. 어쩔수 없이 젖먹이 조카들은 엄마와 우리 자매들 손에서 크며, 우리 마음을 많이도 아프게 했다.  떼려다  큰 혹이 붙었다고 해야할까. 그 시절 엄마의 마음이 어떠했을지는 감히 짐작하기도 어렵다.

 

        그런 큰 언니가 마흔이 되고 쉬흔이 되며, 아버지가 병석에 누워 계실 때, 엄마를 많이 도왔다. 다른 형제자매들이 여기 저기 흩어져 각자의 삶을 사느라 바쁠 때, 큰언니는 엄마가 오라고 하면 오고, 가라고 하면 가면서, 아버지 곁에서 수발을 들어 드렸다. 어느날 부터인가, 빌딩 청소를 다닌다고 했고, 형부와 사네 마네 하는 소리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그러나, 큰 언니네 집안은 여전히 어려웠고, 사는 형편이 차이가 많이나는 동생들과의 만남을 피하곤 했다.     


큰언니는 하루에 두번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수십년 동안 하루도 안 빠지고.

         아마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엄마가 혼자 살기 시작했던 무렵 부터 아니었을까 싶다. 큰 언니는 아침 저녁으로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이른 아침과 늦은 저녁에 엄마에게 전화해서, 큰언니의 하루 일과를 보고했다. 듣고 있다 보면 답답하기 그지없는 그렇고 그런 일상에 대해 시시콜콜 엄마에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가끔씩 내가 엄마 곁에 머물 때, 큰언니와의 통화를 듣고 있노라면, 다 늙은 엄마 걱정하시게 뭔 저런 이야기까지 하나 싶어 속이 상할 때도 있었다. 정말이지 하루도 안 빠지고,  큰언니는 전화벨 소리로 엄마의 아침과 저녁을 열고 닫았다. 엄마는 큰 언니의 이야기를 들어 주고, 다독였다. 엄마가 전화 속의 짠한 큰언니 삶을 듣다가, 속에 열불이 난 날에는 다른 딸들에게 전화를 걸어 하소연을 하시기도 했고, 그 열불은 자매들에게로 옮겨 붙기도 했다. 가끔은 우리들을 시켜 큰 언니의 애로사항을 해결해 주시기도 했다.


         지난 칠월,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마침 경기도 딸네서 머물던 큰 언니가 다음날이 되어서 장례식장에 왔다. 큰 일을 당한 딸 때문에 마음 고생이 심했던 큰 언니는 허리 수술까지 하여 삐쩍 마른 모습으로 나타나 엄마 영정 앞에서 대성통곡을 하였다. 최근에 파마를 했는지 뽀꼴뽀꼴한 언니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도 함께 울었다. 엄마의 아픈 손가락인 우리 큰 언니를 이제 어찌할거나 싶어 막막하기 그지 없었다.


         그날 저녁, 장례식장에 딸린 작은 방에 모여 큰집 사촌 오빠와 옛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잠자코 곁에 있던 큰언니가 문득 지나가는 말처럼 이야기를 꺼냈다.


                '어렸을 때 집에 있는 것이 그렇게 힘이 들었는데, 큰 집에 가면 마음이 편했다고...

                큰 엄마랑 냇가에 가서 빨래하고, 친할매가 아궁이에 불 때는 것 도와주고.

                   그 때가 가장 마음이 편했다고.

                   그래서 큰 집이 내 집 같았다고.  

    

                  그리고, 나중에 아버지가 편찮아서,

                 엄마 도와서 아버지 수발 들어 드렸을 때,

                 그렇게나 무섭던 아버지가

                더이상 무섭지 않더라고...’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큰언니의 뒤늦은 마음 이야기가 많이 애닯았다.


        언제였던가? 큰언니가 어렸을  너무 많이 울어 힘들었다는 이야기를 엄마가 지나가는 말로 한 적이 있다. 연년생 언니 오빠들을 키워야 했던 엄마는 어쩔  없어 큰언니를 친할머니에게 맡겼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할머니에게서 떼어내서, 물설고 낯설은 경상도 성주 땅으로 넘어 와버렸으니,  그래도 어려움을 겪던 작은 어린애였을 큰언니가 받았을 충격이 얼마나 컸을까 싶다.


        그런 시절들을 힘들게 넘어, 큰언니는 어느새 일흔이 코 앞이다. 남들 다 누리는 것도 제대로 누려 보지 못하고, 시들고 있는 가여운 큰 언니, 그 고단했던 인생의 어느 날들에는 기쁘고 즐거워 삶이 꽃처럼 피었던 몇날도 있었을까?  요즘 세상에 태어났다면, 좀 더 이해받고, 사랑받는 삶을 살 수 있었을까 싶어 안타깝다.     


엄마는 그렇게 엄마의 아픈 손가락을 보듬어 키워놓고  떠났다

        엄마가 떠난 후, 뜬금없이 눈물을 쏟곤 한다. 길을 가다가, 호박을 볶다가, 꽁이 작은 등을 쓰다듬어 주다가 울컥한다. 그러나, 이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고 가노라면, 내 눈물은 마를 테고, 엄마 없이도 나는 잘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엄마없는 큰언니를 생각하면, 그만 마음이 먹먹해진다. 내 큰 언니는 이제 누구에게 전화를 해서 그 소소하고 답답한 하루를 이야기할 것인가.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 긴 세월 동안, 엄마와 큰 언니는 아침 저녁의 전화를 통해 오만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속터지는 이야기를 들어주며 엄마는 큰언니를 보듬어 뒤늦게 나마 언니를 키운것 아닐까 싶다. 그래서 어느날 부터인가 큰언니는 동생들 앞에서 더 이상 울지 않게 되었고, 부족한 것 많은 자기 몫의 날들을 묵묵히 살아내게 된 것 아닐까 싶다.


       그렇게 엄마는 엄마의 아픈 손가락을 보듬어 키워 놓고 떠났다. 아마도 늙고 병들어 거동이 불편했던 노년의 엄마도 큰언니의 한결같은 전화로 외로움을 덜어내셨을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 내가 엄마없이 살아가게 되듯이, 큰언니도 그럭저럭 살아가게 될 것이다. 나의 엄마, 박여사가 그렇게 해 놓고 가신 것이다. 그럼에도, 친구 하나 없는 큰언니가 답답하고 외로운 속마음을 이제 누구에게 털어 놓을 수 있을까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아프다.


(그림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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