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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예지 Oct 07. 2017

행복한 마츠코의 일생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일단은 과장된 순정만화의 감성과 ‘혐오스런’이라는 수식어가 교차되며 만들어내는 오묘한 느낌의 포스터가 마음에 들었다. 어쩌면 포스터가 이미 영화의 많은 부분을 이야기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영화를 보고 난 후에야 할 수 있었다. 영화는 보는 내내 주체적 인간으로서 지양해야할 마츠코의 모습과, 그러나 내 속 어딘가 숨어 있을지도 모를 마츠코의 모습이 교차되며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애매한 상황들을 만들어냈다.  

  마츠코는 늘 사랑을 꿈꾸지만 그녀에게 사랑은 매번 환상일 뿐이었다. 도무지 잡히지 않는 사랑의 근원에는 그녀의 아버지가 있었다. 아버지의 사랑을 애타게 갈구하던 어린 마츠코는 아버지가 보여주는 사랑의 기표(記標)를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렇게 자라난 마츠코는 그 사랑의 빈자리를 아버지가 아닌 타인에게서 채우고자 했다. 타인의 애정과 관심을 받는 것만이 삶의 유일한 목표이며, 오직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만 자아의 의미를 찾을 수 있기에, 관계가 뜻대로 유지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정서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상태가 되어 반복적으로 삶을 포기하려했다. 누군가와의 관계가 끝났다고 판단될 때마다 마츠코가 습관처럼 되뇌던 ‘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라는 말이 그녀의 관계 의존적인 모습을 단적으로 나타내주고 있었다.

 그녀는 폭력을 휘두르는 무능력한 작가의 동거인, 언뜻 친절해 보이는 유부남의 정부(情婦), 매춘업소 포주(抱主)의 밑에서 일하는 창녀라는 관계 속에서 자아를 찾고자 하나, 그들은 마츠코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그녀가 원하는 방식의 사랑을 보여주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마츠코가 원하는 사랑이란 그 기의(記意)만이 존재할 뿐 기표라는 것이 아예 없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영원히 미끄러져가는 사랑이라는 기의를 포착할 수 있는 기표란 마츠코에게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저 그들과 맺고 있는 관계 자체만이, 그 관계가 어떠한 형태이든지 상관없이, 그녀를 한 인간으로서 규정해주는 일종의 언표(言表)가 될 뿐이었다. 마츠코는 그들의 폭력과 폭언 속에서, 심지어 불륜이라는 부적절한 관계 속에서 비로소 자신의 정체성을 찾을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류’와의 관계는 조금 달랐다. 류는 마츠코가 학교 선생이던 시절, 마츠코를 도둑으로 몰아 학교를 떠나게 만들었던 학생이었다. 성인이 되어 우연히 만난 그는 마츠코의 불행을 모두 자신의 탓으로 돌리며 마음을 고백한다. 마츠코는 자신의 불행의 시발점에 있었을지 모를 그와의 관계를 다시 정립한다면, 자신의 모든 불행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들의 관계는 뜨겁게 시작되나, 언제나 그랬듯 안정은 오래가지 못한 채, 류의 폭행이 시작된다. 무지막지한 폭언과 폭행 속에서도 마츠코는 혼자인 것보다는 지금이 낫다고 생각하며, 그의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하라는 대로 하겠다고 맹세한다. 마츠코는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그야말로 류의 욕망만을 욕망하며 살아간다. 실재의 ‘나’란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오로지 ‘그’에 의해 존재할 뿐이었다. 여기까지는 지금까지의 다른 관계와 다룰 바가 없었으나, 이후 류가 마츠코를 위해 선택한 관계는 특별한 모습이었다. 그는 ‘마츠코를 만나지 않는 것’이 마츠코를 위한 것임을 깨닫는다. 자신으로 인해 그녀가 더 이상 불행해지는 것을 방관할 수는 없었다. 그는 마츠코의 애정이 눈부시도록 아픈 것이었음을, 감히 ‘신’의 사랑에 비유될 수 있을만한 것임을 깨달은 유일한 타인이었다. 마츠코가 자신에게는 신이었다고 말하는 류의 말에 마츠코의 일생을 되짚어오던 조카 쇼는 고모처럼 사람들을 웃게 하고, 힘이 나게 하고, 사랑하지만 정작 자신은 상처받는 그런 사람이 신이라면 무신론자인 자신도 그 신만은 믿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마츠코는 아파서 누워만 있던 동생에게는 세상의 전부였으며, 엄격한 아버지를 진심으로 웃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어딘지 모르게 비뚤어진 사람들에게 대가없는 사랑을 베풀었고, 사후에도 조카에게 진심으로 존경을 받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마츠코였다. 비록 마츠코 자신은 자신이 바라는 ‘사랑’이라는 것을 갖지 못해 불행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누군가에게 마츠코는 사랑이었던 것이다. 류는 그녀의 철저히 혼자였던 죽음을 기꺼이 자신의 탓으로 돌린다. 그렇게라도 그녀와 ‘관계’되어지는 것이 그녀에게 받은 사랑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했던 걸까. 이렇게 보면, 마츠코가 과연 혐오스런 삶을 살았던 것인지에 대해서도 혼란이 오기 시작했다. 

 이 영화가 재미있는 점은 영화 속의 영화나 드라마, 영화 속의 쇼나 뮤직비디오, 즉 ‘이야기 속의 이야기’로써의 기표를 통해 실제와 허구의 경계를 계속해서 모호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장치는 영화적 디제시스(diegesis)를 반영함과 동시에 영화의 주제의식에 대한 메타픽션적인 설명을 제공한다. 영화는 관람자로 하여금 의도치 않게 심연(深淵)으로 밀려들어갔다가 다시 튕겨져 나오는 경험을 반복적으로 하게 함으로써 환상과 실제의 연결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하고 있으며, 등장인물의 감정에 과도하게 빠져들지 않고 관찰자의 위치에서 담담하게 사건을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다. 이로 인해 영화는 적당히 우울하고, 적당히 행복하며, 과한 듯하면서도 과하지 않은 오묘한 균형감을 보여준다. 마치 영화의 포스터처럼 말이다. 

 한편 영화의 이야기는 마츠코의 조카인 쇼의 관점으로 시작하나, 후반부에서 한 가수의 팬으로 새 삶을 시작하기로 결심한 마츠코의 팬레터 속 자기 소개로 자연스럽게 교차되며 마츠코를 혐오스럽게 바라보는 시선이 과연 누구의 관점이었는지를 흐리게 만든다. 쇼도 처음에는 고모의 삶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으나, 결국에는 여자친구의 말처럼 인간의 가치라는 것은 타인에게 무엇을 받느냐가 아니라 내가 타인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는가로 결정된다는 것에 동의하며 마츠코의 삶에 가치를 부여한다. 어떻게 보면 자신의 삶 속에서 마츠코가 가지는 의미를 부여해 줌으로써 영원할 수 있는 ‘관계’를 규정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마침내 쇼로 인해 마츠코는 그렇게도 간절히 원하던 ‘관계’ 안에서의 그녀의 정체성을 찾은 것이다. 이로써 마츠코는 자신을 혐오스럽게 만들었던 세상과 화해를 하고, 즐겨 부르던 노래의 가사처럼 하늘에 가 닿는다. 그 곳에는 밝은 모습으로 자신을 기다리는 가족이 있었다. 더 이상 그녀의 삶은 혐오스럽지 않다고, 관객인 나의 시선도 함께 변화한다. 아니 어쩌면 ‘혐오스럽다’는 것은 그녀의 삶을 관찰하는 우리의 시선이었을 뿐, 마츠코는 혹시, 행복했던 것은 아닐까.



-본 텍스트는 문화뉴스의 <남예지의 영화 읽어주는 여자>에 연재하고 있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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