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남예지 Sep 11. 2017

선과 악, 그 모호함

영화 『시계태엽오렌지(A Clockwork Orange)』

 

 영화의 전반부는 마치 알렉스라는 청년을 통해 인간이 어디까지 폭력적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듯하다. 그는 폭행과 도둑질, 강간을 일삼으며, 심지어 살인까지 저지르고도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다. 그는 철저히 본능이 주도하는 쾌락의 원칙만을 따르며, 상징계의 질서에 순응하지 못한 채, 상상계에 고착되어버린 존재로 그려진다. 이러한 알렉스의 비정상성은 애완용 뱀이나 성적인 상징물들, 그리고 그의 상상 속 교수형 당하는 신부(新婦)의 모습이나 전쟁과 재해의 상황, 웃으며 피를 흘리는 드라큘라 등의 그로테스크한 이미지와 베토벤, 로시니 등의 아름다운 음악이 교차되며 양가적(ambivalence)으로 드러난다. 


 알렉스의 폭력사를 그린 것이 영화의 전반부라면, 영화의 후반부에서는 알렉스의 갱생기를 그리고 있다. 살인죄로 가게 된 교도소에서 알렉스는 ‘루도비코’라는 교화 시스템을 경험하게 되는데, 교도소장의 말에 따르면 이는 ‘악(惡)을 선(善)으로 바꾸는’ 조건 학습 시스템이다. 구토를 유발하는 약물을 주입한 뒤 눈꺼풀을 고정시키고, 강간장면이나, 나치의 만행 등 온갖 폭력적인 시각자극을 제시한다. 이 과정을 통해 마치 종소리만 들으면 침을 흘리는 파블로프(Pavlov)의 개처럼 폭력적 상황에 구토를 일으키도록 조건화된 알렉스가 만들어진다. 그는 심지어 평소 사랑해 마지않던 베토벤의 교향곡에 대해서도 구토를 일으키게 된다. 자, 여기서부터 혼란이 생긴다. 루도비코 시스템이 ‘악을 선으로 바꾸는’ 것이라면 폭력을 즐겼던 이전의 알렉스가 ‘악’이고, 폭력 앞에서 구토를 일으키도록 학습된 알렉스는 ‘선’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알렉스에게 보복을 하고자 또 다른 폭력을 휘두르는 피해자들의 행동은 ‘선’인가 ‘악’인가. 알렉스를 교화시키고자 폭력에 대한 그의 자유의지를 앗아가는 행위는 ‘선’인가 ‘악’인가. 선과 악의 절대적인 기준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는 것인가. “문제는 이 프로그램이 정말 사람을 선하게 만드느냐 인데, 선은 사람의 내면에서 나오는 거야. 선은 사람이 선택하는 거지. 사람이 선택을 못하면 사람이길 포기하는 거야.” 라는 말이, 사람은 누구나 죄인임을 교리의 전제로 두는 기독교의 목사를 통해 나온다는 사실 또한 아이러니컬하게 다가온다. 


 범죄자의 탄생은 과연 그 자신만의 선택인 것인가. 범죄자 개인을 마치 기계의 고장난 부품을 교체하듯이 사회로부터 격리하여 교화시키면, 다시 말해 그가 ‘악’을 선택하지 못하도록 자유의지를 억압하면 그의 범죄와 관련된 모든 문제가 깨끗이 해결되는 것일까. 범죄의 책임은 온전히 개인에게 있는가. 영화는 이러한 의문에 대한 답을 교화된 알렉스를 통해 다소 우스꽝스럽게 보여주고 있다. 


 인간의 자아 정체성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 정신분석학자들은 인간을 연구하기 위해 ‘무의식’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냈다. 무의식은 생의 초기, 상상계에서 상징계의 이행 속에서 생겨나는 결핍을 통해 형성되며, 이에 무의식은 인간 욕망의 원천이 된다. 상징계의 인간은 자신의 무한한 욕망 중 상징계의 질서 속에서 용인 가능한 부분에 한해서만 표출이 가능하다. 표출되지 못한 욕망의 나머지 부분은 무의식 깊은 곳으로 침잠하여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곳에서 나의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상징계라는 것은 언어가 지배하는 세계이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타인이 나를 언표하는 방식으로 자아를 형성한다. 그러므로 ‘나’라는 존재는 또 다른 타자인 것이다. 그래서 자크 라캉(Jacques Lacan)의 말처럼 “인간은 타자가 욕망하는 것을 욕망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범죄자의 탄생은 목사의 말처럼 결코 자신의 선택으로 인한 것만은 아니다. 알렉스를 고장 난 ‘시계태엽’처럼 교체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영화는 인간의 선과 악의 절대적 기준의 모호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 위해 알렉스의 범죄행위와 교화 시스템, 그리고 피해자들의 보복행위를 통해 지속적으로 양가성을 야기한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조건화된 알렉스의 행동과 피해자들의 보복행위는 관객으로 하여금 그가 살인자임을 잊고 동정심마저 갖게 한다. 또한 타인의 폭력 앞에서 최소한의 방어도 하지 못하게 된, 인간으로서의 자유의지를 잃어버린 알렉스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서글프다. 


 피해자의 보복행위로 인해 자살을 시도한 알렉스는 병원에서 심리검사를 하게 되는데, 사람들이 대화하고 있는 그림에서 빈 칸에 들어갈 말이 무엇일까를 묻는 의사의 질문에 ‘상대방이 할 것 같은 말’을 떠올리며 타자의 언어 속으로 조금씩 이행한다. 또한 병원을 찾은 장관이 떠먹여주는 밥을, 마치 어미 새의 먹이를 받아먹는 아기 새처럼 순순히 받아먹으며 타자의 질서 속으로 편승한다. 그리고 정치적 홍보효과를 노린 장관의 제안을 받아들여 플래쉬가 터지는 카메라 앞에서 마치 그와 친구(?)가 된 듯한 포즈를 취하며 마침내 상징계의 기표를 체화한다. 병실에 울려 퍼지는 베토벤 교향곡 속에서 알렉스는 구토 대신 낯선 여성을 강간하는 자신을 떠올리며, “그래, 내가 치료된 건 확실했다.”라고 되뇐다. 그는 드디어 타자의 언어를 이해하며,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게 되었고, 타자가 원하는 방식대로 행동을 통제하게 되었다. 자 그렇다면, 이제 상상 속에서만 강간을 하게 된 알렉스는 ‘선’한 인간이 되었는가?




-본 텍스트는 문화뉴스의 <남예지의 영화 읽어주는 여자>에 연재하고 있는 칼럼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이야기의 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