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포레스트 검프(Forrest Gump)』
아이큐가 불과 75밖에 되지 않는 포레스트 검프는 풋볼스타이자, 탁구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며, 전쟁영웅이자, 새우잡이 배를 수십 척 가진 갑부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도한 욕심을 부리거나, 자만하는 일 따위는 결코 없으며, 맡은 일에 대한 완벽한 책임감을 갖고 규칙과 질서 내에 온전히 순응하는 그의 모습은 그야말로 흰 도화지와 같은 순수함, 그 자체를 표상하고 있다. 우리는 영화를 보는 내내 한결같은 그의 모습에 대해, 특히 아이큐가 75 이상의 사람이라면, 지금껏 나의 삶이 검프보다 덜 화려했던(?) 까닭을 순수성의 결여에서 찾으며, 앞으로 남은 삶 속에서 검프와 같은 순수함을 되찾고, 모든 욕심을 버린다면 가까운 미래에는 선물과 같은 특별한 성공이 오리라는 이상한 낙관주의에 빠지게 된다. 검프의 순수함을 본받는 일은 전혀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갖고 있던 모든 욕심과 경쟁심, 계획성, 혹은 반항심을 모두 내려놓고 그저 ‘흘러가는 대로’ 있으면 될 일인 것이다. 듣기만 해도 얼마나 마음이 편해지는 일인가! 마치 신(神)께 모든 것을 맡기면 얻어진다는 그 안식처럼, 검프는 하나의 종교와도 같은 깨달음을 준다. 당시 미국에서는 ‘검피즘(gumpism)’이라는 말까지 생겨났다고 하니, 검프의 삶이 사람들에게 미친 영향이 대단했던 모양이다.
인생은 초콜릿 상자와도 같아서 그 속에서 무엇을 집을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지만, 검프처럼 매번 좋은 것만을 집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바보같은 동화를 통해서 다시 한 번 속아주게 되는 것이다. 녹록치 않은 현실을 살아내기엔 그 편이 훨씬 나을테니 말이다. 환상은 우리에게 이러한 힘을 준다. 현실에서는 도무지 불가능할 것만 같은 일들을 핍진성있게 제시함으로써 잠시나마 현실을 전복시키고, 현실의 굴레 속에서 잃어버렸던 일말의 희망을 애써 찾아내어 보여주는 것이다. 당시로는 혁신적이었던 컴퓨터 그래픽 기술이 만들어낸 검프와 케네디 대통령의 악수 장면이나, 존 레논과의 인터뷰 장면 등은 그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정교한 시뮬라크르(simulacre)임을 인지하고 있는 우리에게는 큰 웃음을 주기도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검프라는 인물이 어디엔가는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그저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아니라는 믿음을 시나브로 주입하는 지도 모른다.
검프는 곧 미국의 희망이자 영웅이었다. 그는 절대선(絕對善)으로써 모든 악(惡)을 끌어안고 정화시키는 존재였다. 버바의 가족을 가난이라는 악으로부터, 댄 중위를 자포자기라는 악으로부터, 그리고 사랑하는 제니를 방종(放縱)과 병(病)이라는 악으로부터 구제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신과 같이 범접 불가능한 존재는 아니었다. 미국 문화의 대표적 영웅인 슈퍼맨이나 스파이더맨 보다는 더욱 현실에 가까운, 그래서 누구든 쉽게 닿을 수 있을 법한 이상(理想)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시계태엽오렌지’를 통해 절대적인 선과 악을 구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세계 제일의 강대국, 누구나 잘 먹고 잘 사는 미국을 보여주기 위해 영화는 가난한 자들을, 꿈을 잃고 방황하는 자들을, 질서 속에 순응하지 못하고 저항운동에 참여하는 자들을 타자화시킨다. 가난하고 지능도 낮은 버바는 전쟁에서 죽임을 당하고, 그의 꿈은 갑부인 검프를 통해 이루어진다. 자신의 소신을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방황하는 댄 중위의 두 번째 인생을 찾아주는 것 또한 전쟁영웅이자 갑부인 검프였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끊임없이 질서에 저항하고, 삶에 안주하려하지 않았던 캐릭터인 제니는 결국 몹쓸병에 걸리고, 그나마 그녀의 마지막에 행복을 안겨준 것은 질서 속에 늘 순응하던 검프였다.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전집회에서 우연히 검프가 단상에 오르게 되는데, 이때 반대 측에서 마이크 전원을 뽑아 버리는 바람에 검프의 발언이 들리지 않게 된다. 결국 아무 말도 듣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자의 말 한마디에 거기에 모인 수많은 반전주의자들은 동의의 구호를 외친다. 이처럼 그들을 부화뇌동하는 우매한 무리로 그려내는 것은 혹시 영화가 미국의 베트남 전쟁에 대한 정당성을 슬쩍 내비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여기에서 검피즘, 정체모를 낙관주의에 대한 우리의 마음 한 구석이 뜨끔해진다. 결국 우리는 ‘어른 말씀 잘 듣는 어린아이’가 되어야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말인가.
국가마다 자신들의 지배 체제를 공고히 하고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다양한 신화들을 갖고 있기 마련이고, 이는 종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과거 왕권국가에서는 지배 계급의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해 신화를 이용하기도 하였다. 신화는 집단의 구성원들을 질서 속으로 자연스럽게 밀어 넣고, 그 안에서 안주하게 만들어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공고히 하도록 도와준다. 오늘날과 같이 신자유주의가 각광받는 사회에서는 개인의 성공신화를 다룬 콘텐츠들을 통해 사람들로 하여금 성공을 위한 새로운 질서 속으로 자신을 억압하도록 만든다. 그리하여 모두가 내일을 위해 오늘을 타자의 질서 속에 저당잡힌 채 살아간다.
이러한 관점에서 검프의 삶은 하나의 신화와도 같다. 삶에 있어 다양한 주체들이 있음을 부정한 채, 머리 굴릴 필요 없이 주어진 일에 대해 성실하게만 살아가면 부자도 되고, 영웅도 될 수 있으며, 결국 그러한 결과가 삶에 있어 최고의 행복임을 보여준다. 제니처럼 질서를 전복시키고자 지배계급에 대항하는 존재도 종국에는 질서의 수호자인 검프에게 돌아오게 되어 있으며, 그 안에서의 비로소 행복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는 이 이야기가 말하고 있는 것이 단지 희망에 대한 어른들의 동화만은 아닐 것이다.
과연 검프처럼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을 최선으로 이끌 수 있는 것인지, 그게 아니라면 다른 누군가의 최선의 삶을 위해, 나를 버리고 그들의 이데올로기 안으로 순응하게 되는 것인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을 해본다.
-본 텍스트는 문화뉴스의 <남예지의 영화 읽어주는 여자>에 연재하고 있는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