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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예지 Nov 28. 2017

양가적 공간 속의 진짜 얼굴과 가짜 얼굴

영화 『버틀러:대통령의 집사』



영화는 주인공 세실 게인즈의 삶을 통해 흑인 인권운동에 대한 미국의 근현대사를 관통하고 있다. 세실은 어린 시절, 농장의 주인이었던 백인 남자가 어머니를 겁탈하고, 아버지를 살해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한 백인 할머니의 도움으로 세실은 ‘집검둥이(house nigger)’가 되어 상대적으로 쉬운 집안일을 하게 된다. 그러나 ‘집검둥이’라는 말이 얼마나 모욕적인 표현인지에 대해 말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세실은 자기 자신을 백인의 시선으로 대상화시킨 채, 백인들의 눈으로 사고하고, 그들의 욕구에 대해, 그리고 그들을 미소짓게 하는 방법에 대해 고민한다. 농장을 떠나 처음으로 일하게 된 호텔에서 만난 한 흑인 노동자는 세실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린 얼굴이 두 개야. 진짜 얼굴과 백인들에게 보여주는 얼굴이 존재하지. 이 세상을 살아가려면 그들에게 거부감을 줘서는 안돼.” 세실이 이 말의 진정한 뜻을 깨닫는 데는 백악관의 버틀러로 입성하여 무려 8명의 대통령을 거치는 동안의 긴긴 시간이 필요했다.


세실은 백악관 버틀러로 일하게 되면서 백인들의 질서에 더욱 순응해 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사실 세실의 비극적인 가정사를 생각하면 이 점은 이해하기가 힘든데, 아마도 그는 끔찍한 기억 모두를 의식의 깊은 곳 어딘가로 침잠시킨 채, 자신의 세계를 송두리째 쥐고 흔들 수 있는 권력을 가진 백인 농장주인의 세계로 편입하여 살아가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영화는 백악관에서 더욱 더 충성스러운 일꾼이 되어가는 세실의 모습과 흑인 차별에 대한 저항운동에 점차 깊이 빠져드는 첫째 아들 루이스의 모습을 반복적으로 교차 편집하여 보여줌으로써 미국의 흑인 인권문제에 대한 더욱 극명한 시선을 드러낸다. 백인과 유색인종이 사용하는 변기조차 구분해놓은 질서 속에 당연한 듯 순응하는 세실은 아버지라는 이름의 권력을 내세워 또 다른 지배자-피지배자의 구조 속으로 아들을 억압하고자 하나, 루이스는 이를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던 사운드트랙 중 하나인 ‘You and I ain’t nothing no more’이라는 곡에서는 ‘You gave me life, but I don't share your sorrow.’라고 말함으로써 아버지 세대에서 용인되던 사회적 차별을 그대로 대물림하지는 않겠다는 루이스의 의지를 더욱 간절하게 드러내주고 있다.  


한편 세실의 아내 글로리아는 남편과 아들의 흑인 차별에 대한 관점의 온도차 속에서 괴로워한다. 그녀는 세실이 아들과 멀어지는 이유를 백악관으로부터 찾으며, 백악관과 관련된 모든 것이 미우면서도, 동시에 케네디 대통령의 부인 재클린을 동경하며 은연중에 그녀와 닮아 가고자 하는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여준다. 아들을 힘들게 만드는 백인 사회에 대한 증오가 백악관과 겹쳐지며, 그러나 백악관의 또 다른 모습이기도 한 남편 세실에 대한 사랑을 잃고 싶지 않은 그녀는 양가적 가치가 혼종된 공간 속에서 방황하게 된다. 


‘양가적 공간(the ambivalent space)’은 탈식민주의 학자인 호미바바(Homi Bhabha)의 용어로써,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정형화된 이분법적 구조 속에서 중간 영역인 혼종의 공간이 존재할 수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지배자가 반드시 지배하기만 하는 것도, 피지배자가 반드시 지배당하기만 하는 것도 아닌, 일종의 교섭적인 공간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지배자는 피지배자를 보이지 않는 이데올로기 안에 억압함으로써 통치를 쉽게 하려 하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이데올로기로 인해 지배 체제가 전복되지는 않을까 두려워한다. 버틀러라는 아버지의 직업을 부끄럽게 여기는 루이스에게 그들 또한 근면과 성실로 흑인에 대한 편견과 증오심을 깬 사람들이라고 하는 동료의 말 속에서 흑인들에 대한 온갖 부정적인 이데올로기들이 팽배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당시 백인들은 흑인이 게으르고 나태하며, 야만적인 성질을 가졌다고 정형화시켰는데, 우습게도 백인들은 자신들이 만들어낸 흑인의 야만성으로 인해 자신들이 해를 입지는 않을까 오히려 두려워하기도 했던 것이다. 


반대로 양가적 공간 속에서의 피지배자는 현실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함과 동시에 다른 한 편으로는 지배자를 동경하며, 지배체제에 순응하여 그들을 닮고자 한다. 어린 세실은 비극적 기억으로 점철된 농장, 곧 백인 주인의 지배체제로부터 벗어나고자 하였으나, 버틀러라는 직업을 통해 백인들의 또 다른 지배체제 속으로 편승하며, 그들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자 한다. 이러한 양가성은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를 모호하게 하며, 지배자가 피지배자를 일방적으로 타자화시키는 구조에서 벗어나 두 계급의 상호교섭의 가능성을 열어줌으로써 우월과 열등이라는 정형성으로 완결된 사고 속에서 탈피하도록 만들어 준다. 


지배자의 질서와 피지배자의 질서로 대변되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양가적 공간 속에 위치하고 있는 글로리아에게 혼란을 야기하는 것은, 버틀러라는 세실의 직업 덕분에 주어진 비교적 풍족한 삶에 대한 가치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흑인이기 때문에 결국에는 차별받을 수밖에 없는 삶에 대한 가치의 충돌이다. 때로는 세실을, 때로는 루이스를 밀어내며 질서에 온전히 순응할 수도, 온전히 저항할 수도 없는 상태가 반복된다. 이러한 양가적 공간의 혼종성은 세실을 거쳐 간 대통령들에게서도 볼 수 있다. 지배자 중에서도 최고의 자리에 위치하는 그들 중에서는 지배자임에도 불구하고 피지배자에 대한 억압과 폭력에 대해 진심으로 괴로워하는 이도 있었으나, 자신의 지배 권력을 보존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흑인에 대한 정책을 교묘히 이용하려는 이도 있었다. 


온전히 지배계급의 질서 속에 편승해 있던 세실은, 흑인 버틀러들의 봉급 인상에 기여한 공적으로 백악관 만찬에 초대된 자리에서 불현듯 과거 호텔의 흑인 노동자가 자신에게 말했던 ‘흑인의 두 얼굴’에 대한 깨달음을 얻는다. 손님의 눈으로 동료 버틀러들을 바라보니, 그제서야 그들의 진짜 얼굴 위로 살아남기 위해 억지로 만들어 낸 가짜 얼굴이 겹쳐져 보였던 것이다. 자신 또한 그들처럼 두 얼굴로 살아왔다는 것을, 어린 시절 농장주인이 자신의 어머니를 겁탈하고, 아버지를 살해하던 바로 그 때, 어린 세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가짜 얼굴로 진짜 얼굴을 부정해야만 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는다. 


세실은 아들 루이스가 법을 어기고 체제 전복을 꿈꾸는 범죄자가 아닌, 진정 조국을 위해 싸운 영웅이라는 사실을 인지하는 동시에 버틀러라는 직업에 대한 극도의 상실감을 경험한다. 강제 수용소라는 타국의 역사를 비난하면서도 정작 200년간 보이지 않는 수용소 속에서 흑인들을 억압해왔던 미국이라는 나라가 침묵해왔던 것들에 대해 깨닫게 된 세실은 버틀러 직을 그만두고 만델라 석방 시위를 하고 있는 루이스를 찾아가 용서를 구한다. 그리고 둘은 뜨겁게 화해한다. 영화는 마지막에 이르러 오바마라는 한 흑인이 미국의 대통령이 되는 모습을 통해 세실과 루이스에게, 나아가 미국의 모든 흑인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희망을 제시하며 아름답게 마무리된다. 그러나 영화 속 해피엔딩에 이어지는 미국의 오늘은 어떠한가. 하루가 멀다 하고 들리는 총기난사 사건이 결국 인종차별로 인한 것임을 알았을 때, 수많은 세실과 루이스의 치열한 투쟁의 역사는 무색해진다. 아직까지도 미국의 자유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가장 큰 적 중의 하나가 인종차별이라는 것, 이것은 참으로 씁쓸한 현실이다.





-본 텍스트는 문화뉴스의 <남예지의 영화 읽어주는 여자>에 연재하고 있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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