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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예지 Dec 30. 2017

'두려운 낯설음'에 대하여

영화 『그것(It, 2017)』


정신분석학자인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두려운 낯설음(Das Unheimliche)’이라는 다소 애매모호한 감정에 대한 글을 썼다. 영어로는 ‘The Uncanny’라고 번역되는 이것은 단지 낯선 대상이나 익숙하지 않은 무언가에 대한 두려움이 아닌, 이전까지 내가 분명히 알고 있던 것, 나의 인지체계 안에서 온전히 분류될 수 있었던 대상이 어느 날 갑자기 낯설게 느껴짐으로써 야기되는 두려움에 대한 것이다. 프로이트는 ‘두려운 낯설음’에 대해 옌치(E. Jentsh)와 셸링(F.W.J. Schelling)의 말을 각각 인용하여 “어떤 한 존재가 겉으로 보아서는 꼭 살아 있는 것만 같아 혹시 영혼을 갖고 있지 않나 의심이 드는 경우, 혹은 반대로 어떤 사물이 살아 있는 생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연히 영혼을 잃어버려서 영혼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드는 경우”, “어둠 속에 비밀로 남아 있어야 하는 것과 어둠 속에서 나온 것”이라 덧붙이고 있다.


영화 ‘그것(It, 2017)’은 바로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두려운 낯설음’에 대한 이야기이다. 공포영화라고 소개되고 있지만, 더 정확히 말하자면 ‘공포에 대한 영화’라고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영화에서는 이른바 ‘루저 클럽’이라고 칭해지는 일곱 명의 소년·소녀가 나오는데, 이들이 제각각 광대인 ‘페니 와이즈’로 표상되는 자신만의 ‘두려운 낯설음’과 맞닥뜨리는 것이 영화 전반부의 내용이다. 


빌은 비오는 날 자신이 만들어 준 종이배를 물길에 띄우러 나갔다가 실종된 동생 조지에 대한 복잡한 감정을 갖고 있다. 자신 때문에 동생이 실종됐다는 죄책감, 함께 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후회, 어딘가에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과 그리움의 혼재는 빌의 내면에서 마구 뒤엉켜 조지에 대한 공포를 만들어 낸다. 더군다나 조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면 화부터 내는 아버지의 태도는 이러한 두려움을 더욱 극대화시킨다. 빌에게 있어 조지에 대한 복잡한 감정은 프로이트가 인용한 셸링의 말처럼 ‘어둠 속에 비밀로 남아 있어야만 하는 것’이었으나, 이는 곧 어두운 집안에서 ‘두려운 낯설음’인 페니 와이즈의 형상으로 나타난다. 


엄격한 유대교 집안에서 자라난 스탠의 종교적 강압에 대한 내면의 공포는 율법서를 놔두는 방에 걸려있는, 모딜리아니의 화풍을 닮은 그림 속 여인으로 환유된다. 이미 수백 번은 드나들었을 그 방에 들어갈 때마다 이미 익숙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스탠은 여인의 형상을 보지 않기 위해 손으로 시야를 가려야만 했다. 그러한 스탠의 내면적 공포가 극에 달한 어느 날, 그림 속 여인은 ‘두려운 낯설음’이 되어 스탠 앞에 나타난다. 


루저 클럽의 유일한 여성 멤버인 베벌리는 초경(初經)을 앞둔 소녀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시시때때로 그녀에게 ‘아빠의 딸’임을 확인해야만 하는 사람이었고, 그러한 행동은 점차 심해져 어른이 되어가는 베벌리를 어린 소녀 속에 옭아맨다. ‘아빠의 딸’임을 부정하기 위해 긴 머리를 직접 잘라버린 베벌리는 어느 날 머리카락을 흘려보낸 하수구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듣게 되고,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인 순간 하수구 구멍으로부터 엄청난 양의 피가 폭발하듯 방 안에 흩어지는 경험을 한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구멍으로부터 분출되는 피는 여성의 생리혈을 표상하고 있으며, 이는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의 아브젝트(abject)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생리혈에 대해 아브젝트의 개념을 빌어 설명하자면, 여자아이가 어른이 되기 위해, 즉 아버지의 법이 지배하는 상징계로 진입하기 위해 반드시 분리해야할 주체의 일부이다. 아브젝트는 신체의 내부에 있을 때는 내 존재의 일부로 기능하나, 신체 경계의 밖으로 한 발자국이라도 벗어나면 그 때부터는 더럽고 비천한 것이 되어 버리는, 분명 불쾌한 것이나 때로는 매혹적이기도 한, 그 자체로 ‘두려운 낯설음’이라 할 수 있다. 언제까지나 ‘아빠의 딸’이길 강요받은 베벌리는 어른이 되고 싶은 자신의 욕망과 아버지의 욕망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으며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베벌리를 짝사랑하는 벤은 독서가 취미인 소년이다. 전학생인 터라 친구도 없었던 벤은 도서관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마을의 사건·사고와 관련된 서적에 관심을 가지며 마을에 대한 내면의 공포를 키운다. 여느 때처럼 도서관에서 책을 읽던 벤은 부활절에 일어난 폭발사고와 관련하여 목이 잘린 소년의 그림을 보게 되고, 순간 엄청난 공포를 경험한다. 그와 함께 어디선가 나타난 빨간 풍선에 이끌려 가게 된 어두운 열람실에서 폭발사고 희생자인 목 없는 소년과 페니 와이즈를 만나게 된다. 그 때 벤의 귀에 들려오는 ‘책벌레’라는 외침에서 그의 또 다른 두려움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독서라는 자신의 취미가 친구가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선택하게 된 차선책일 수도 있다는, 벤 자신도 인정하기는 싫으나 분명히 느끼고 있었을 내면의 양가성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겠다.


다른 아이들보다 조금 늦게 루저 클럽에 합류하게 된 마이크는 큰 화재로 인해 부모를 잃은 경험이 있었는데, 당시 죽기 전까지도 마이크에게 오기 위해 닫힌 문을 두드리느라 손이 다 녹았다던 부모의 모습은 마이크의 내면 깊숙이 남아 공포의 흔적이 된다. 허약한 몸 때문에 약을 달고 사는 에디는 세균이나 병에 대한 두려움으로 문둥병자로 형상화된 공포를 만나게 되며(후에 알게 되는 사실이지만 에디는 몸이 허약한 게 아니었다. 베벌리의 아버지처럼 언제까지고 자식을 소유하고 싶었던 그의 어머니에 의해 ‘허약하도록’ 만들어진 것이었다), 늘 주위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고자 하는 리치에게는 광대라는 존재 그 자체가 ‘두려운 낯설음’이 된다. 


이렇게  ‘페니 와이즈’라는 표상을 통해 각자의 내면적 공포를 맞닥뜨린 일곱 명의 루저 클럽 멤버들은 힘을 합해 두려움의 상황을 극복하고자 한다. 이 때부터 영화는 ‘구니스(The Goonies, 1985)’나 ‘스탠바이미(Stand By Me, 1986)’와 같은 전형적인 8, 90년대의 소년·소녀 모험물로 전개된다. 아이들은 온갖 난관을 함께 극복하고 페니 와이즈를 처단함으로써 베벌리는 자신을 옭죄던 아버지로부터, 에디는 세균과 병에 대한 강박으로부터, 빌은 실종된 동생 조지로부터, 나머지 아이들도 각자의 ‘두려운 낯설음’으로부터 해방된다. 


이 영화에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점은 아이들에게 내면의 공포를 심어주고 있는 것은 모두 어른들이란 사실이다. 에디가 언제까지고 '엄마에게 의지하는 나약한 아들’이기를 강요하는 것은 그의 어머니였으며, 베벌리에게 ‘아빠의 딸’로 남기를 강요하는 것, 스탠에게 율법을 강요하며, 동생 조지의 생존에 대한 빌의 희망을 짓밟는 것은 모두 그들의 아버지였다. 마이크는 '죽기싫으면 죽이라는' 할아버지의 강요를 통해 억지로 동물을 도축하며 부모의 죽음에 대한 공포를 내면화하였으며, 벤은 자신이 외면하고 싶었던 외톨이라는 현실을 도서관 사서를 통해 자각하게 된다.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 속에서 어른들의 욕망을 나의 욕망으로 받아들일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상징의 질서 속으로 나아갈 것인지에 대한 갈등 속에서 ‘두려운 낯설음’을 경험하고 있었다.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어른들의 욕망으로부터 해방된 아이들은 손에 피를 내어 맞잡고 맹세한다. 만약 ‘그것’이 다시 돌아온다면 우리도 다시 돌아오기로. 결국 영화는 두려움의 완전한 소멸이란 없음을, 유년의 두려움을 깨고 성인이 되지만, 또 언젠가는 익숙한 그 무엇이 어느 날 갑자기 ‘두려운 낯설음’이 되어 나타날 수 있음을 남겨두며 끝이 난다. 머지않아 영화의 속편이 개봉한다니 또 다시 돌아올 ‘그것’을 기대하며 이 글을 마치려 한다.






-본 텍스트는 문화뉴스의 <남예지의 영화 읽어주는 여자>에 연재하고 있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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