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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예지 Feb 07. 2018

언어의 온도차

영화 『컨택트(Arrival, 2016)』


 어느 날 외계인이 지구에 나타난다. 당황하는 인류와 그 안에서 충돌하는 의견들, 대립 혹은 공존의 문제들. 여기까지는 대강 예측 가능한 이야기일 수 있다. 그러나 영화는 지구를 구하는 희생적 영웅이나 동심에 호소하는 천진난만한 어린아이들 대신 언어학자라는 신선한 매개를 등장시킨다. 다른 언어체계를 가진 존재와의 소통, 이에 관한 이야기이다.


 저명한 언어학자인 루이스는 국가기관의 요청으로 외계인들이 지구에 오게 된 목적을 알아내기 위해 셸(shell)이라 이름 붙여진 미지의 공간으로 들어가게 된다. 외계의 존재들은 그들의 언어로, 지구인은 인류의 언어로, 서로의 상징적 기호 체계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다. 셸은 미국 뿐 만 아니라 중국, 러시아, 수단 등 세계 여러 곳에 동시에 출현했고, 이에 각국은 각기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소통을 시도하는데, 루이스는 마작패를 이용해 게임의 언어로 소통을 해보려는 중국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내가 저들에게 영어 대신 체스를 가르친다면 모든 대화는 오직 게임의 개념으로 이뤄질 거에요. 적, 승리, 패배 같은 걸로 말이죠.”


 언어는 사고와 주체를 구성한다. 우리는 생의 초기에 상상계의 파편화된 이미지들을 언어를 통해 구조화하고, 기표화 될 수 있는 욕망의 일부를 통해 세상으로부터 내가 원하는 것들을 얻어낸다. 여기서 ‘기표화 될 수 있는’이란 수동태를 사용한 것은 주체가 자의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 아님을 내포한다. 아이는 타자에 의해 주어지는 상징체계 안으로 포섭되며 그로부터 아이는 욕망의 소외를 경험함과 동시에 타자의 욕망의 대상이 되고자 하는 주체를 갖게 된다. 나를 설명하는 타자의 언어 속에서 우리는 우리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내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설명의 언어는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은 오롯이 언어일지 모른다. 이런 의미에서 루이스의 저 말은 이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주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존재란 언어에 의해 사후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영화 속 루이스는 언어가 인간의 사고를 결정한다는 사피어-워프의 가설을 언급하는데, 한 세계의 언어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 세계의 인지적 구조 속으로 억압당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언어의 구조 안에서만 사고할 수 있다. 언어라는 해석의 틀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언어로 인해 우리의 실재적 욕망은 거세당한다. 언어라는 기표로 포착된 상징을 통해서만 소통할 수 있다. 루이스에게 ‘당신은 우리를 소통의 덫으로 몰아넣었다’고 하는 이안의 말 속에서 언어의 힘에 대한 그의 깨달음을 알 수 있다. 외계의 존재가 인류에게 주고자 한 것이 ‘무기’로 잘못 해석된 것 또한 이러한 연유에서 기인한다. 게임의 언어를 통해서는 자신들의 의도를 ‘무기’로 밖에는 포착할 수 없었고, 인류는 이를 당연히 위협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영화의 초반에 과학자인 이안은 “언어는 문명의 초석이자 사람을 묶어주는 끈이며, 모든 분쟁의 첫 무기다.”라는 루이스의 책 서문에 대해 문명의 초석은 언어가 아니라 과학이라 반론한다. 여기서의 과학이 수(數)로 증명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면, 그 숫자체계 또한 상징적 기표의 세계이다. 우리는 무한을 향해 연속적인 어떤 것을 숫자라는 상징체계를 통해 분절하여 이해한다. 어떻게 보면 보편적 진리나 법칙이라는 것도 연속성 위에 기호로 꽂아놓은 깃발들, 즉 재현이 가능하도록 만든 상징을 통해 구조화되는 것이다. 무지개라는 빛의 무한한 스펙트럼 속에서 ‘빨주노초파남보’라는 색을 인식하는 것처럼 말이다. 태초에 빅뱅이 있었다는 이론 또한 언어에 의해 사후적으로 구성된 허구적 진실에 지나지 않는다. 태초에 무엇이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라캉(Lacan)의 언어대로 ‘빈 틈’이며 ‘공백’일 뿐이다.


 루이스와 이안이 알아낸 외계의 언어는 인류의 언어와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인류의 언어는 한 점에서 시작되어 한 점으로 끝나는 선의 구조를 갖고 있다는 것, 다시 말해 지금 쓰고 있는, 혹은 말하고 있는 문자는 곧 과거의 것이 되어버린다. 이에 반해 외계의 언어는 시작점과 끝점을 구분할 수 없었다. 그들의 문장은 선이 아닌 원으로 구조화된다. 이러한 언어의 구조적 차이는 사고의 차이를 가져온다. 인류의 시간은 선으로 흐르지만, 외계의 시간은 원으로 흐른다. 인류의 시간은 과거와 현재, 미래의 구분이 가능하지만 외계의 시간은 그 모두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것이다. 외계의 언어는 미래를 과거처럼, 과거를 미래처럼 사고할 수 있게 만든다. 루이스는 외계인들로부터 이러한 능력을 ‘선물’로 받는다. 루이스가 시시때때로 겪던 딸과 관련된 알 수 없는 환상은 결국 미래에 대한 예지(豫知)이자 이미 겪었을지도 모를 과거에 대한 파지(把持)였던 것이다. 딸의 이름이 순방향으로 읽어도, 역방향으로 읽어도 같은 형태인 ‘Hannah’인 것은 이러한 언어와 사고의 시간적 순환구조에 대한 기표라 할 수 있다. 


 루이스의 능력은 결국 미국과 중국의 대립으로 대표되던 외계의 존재에 대한 각국의 온도차를 극복하고 조화를 이룰 수 있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그리고 루이스는 행복하지 않을 자신의 미래를 알고 있지만 기꺼이 그 미래 속으로 뛰어든다. 그녀는 불행할 미래를 결코 바꿀 수 없다. 그것은 이미 지나온 과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현재 속에는 과거와 미래가 공존한다. 그녀는 주어진 현재를 충실히 살아가기로 한다. 이안과 함께 사랑의 언어를 나누고, 아이를 갖고, 환상 속에서 경험했던 모든 것을 그대로 살아낸다. 루이스의 언어는, 또한 그녀의 삶은, 계속해서 순환한다.  





-본 텍스트는 문화뉴스의 <남예지의 영화 읽어주는 여자>에 연재하고 있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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