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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예지 Feb 27. 2018

남성성과 여성성을 횡단하기

영화『스텝포드 와이프(The Stepford Wives, 2004)』


우리는 언제부터 인간을 여성과 남성이라는 이분법으로 변별하기 시작했을까. 그 기원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나라는 존재는 태어나기 이전부터 이미 여성 혹은 남성이라는 구분을 통해 언표되어 있었음이 분명하다. 여자아이라고 불릴 경우에는 분홍색 옷과, 인형, 꽃무늬 머리핀이, 남자아이라고 불릴 경우에는 하늘색 옷과, 로봇 장난감, 기차가 그려진 모자 따위가 이미 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현실이라는 세계로 진입하기 이전에 이미 나는 여성 혹은 남성이라는 상징체계 속에서 분류되어 있었던 것이다. 출생 후 의학 권위자의 최종선언에 따라 이러한 기표의 힘은 흡사 실재와 같은 온전함을 지니게 된다. 여성 혹은 남성이라는 기표로 덮을 수 없는 내 존재의 잉여는 거세되고, 무의식의 깊은 곳으로 가라앉아 될 수 있는 한 강하게 억압된다. 그러나 억압된다는 것은 동시에 언제든 회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 견고해 보이는 이분법의 환상 속에 본질이라는 것은 ‘틈’으로 존재하며, 구조 내에서 지속적으로 균열을 일으킨다. 영화는 이렇게 여성과 남성을 구분하는 ‘여성성’과 ‘남성성’이라는 우리의 ‘환상’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스텝포드 여성들의 외모는 하나같이 고운 금발머리에 화사한 꽃무늬 옷을 입은 바비 인형을 떠올리게 한다. 그녀들은 하루 종일 남편을 기다리며, 남편의 어떠한 행위에도 의문을 제기할 수 없는 순종적인 존재이다. 스텝포드 남성들은 자신들의 편의에 따라 부인을 조종할 수 있는 리모컨을 갖고 있으며, 필요에 따라 부인들은 ‘현금 지급기’로써의 역할까지도 할 수 있다! 그 리모컨의 형태가 뼈(骨)모양 이라는 것에서 우리는 아담이 이브에게 빌려줬다는 갈비뼈 하나를 떠올릴 수가 있다. 갈비뼈 신화를 통해 탄생한 남성의 소유물로써의 여성, 지극히 가부장적인 이야기이다. 스텝포드 남성들이 술과 음담패설을 즐기며 여성의 속옷이 걸린 게임에 환호할 때, 스텝포드 여성들은 독서모임을 통해 가족을 위한 요리나 뜨개질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며, 골프치는 남편들을 위해 캐디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삶의 가장 큰 행복으로 여긴다. 이는 가부장적 성역할에 따른 대립구조를 명백히 드러내기 위한 과장된 영화적 표현일 수도 있으나, 우리에게는 어딘지 모르게 낯설지가 않다. 오랜 세월, 우리의 어머니들은 이렇게 살아왔을지도 모른다. 


여성성 혹은 남성성이라는 것은 성별에 대한 이분법이 만들어낸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결코 존재의 본질이 아니라는 말이다. 존재란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불가능성이며, 의미화시켜 분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듯이, 출생 시에 권위자에 의해 한번 분류된 성별은 마치 그것이 실재인 양 우리 삶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다. 이로써 문화라는 것은 결국 우리에게 하나의 ‘억압’으로 작용한다. 내가 남성에, 혹은 여성에 속하는 신체적 구조를 타고 났을 경우, 내가 해도 되는 것과 해서는 안 되는 것들이 선험적으로 주어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문화에 의해 인간은 상징적으로 거세된다. 그러나 본질은 남성성과 여성성이라는 상징으로 덮을 수 없는 나머지, 곧 틈이다. 영화 속 바비는 견고한 구조 내에 존재하는 틈을 드러내기 위해 끊임없이 세계에 균열을 가하며, 여성성이라는 환상으로 억압된 욕망을 드러내려한다. 같은 방식으로 그녀는 백인사회의 유대인에 대한 편견이라는 환상에 대해서도 이의를 제기한다. 인종차별 또한 성역할과 마찬가지로 실재라는 틈을 가리기 위해 만들어 낸 환상일 뿐이다. 반유대주의의 입장에서 유대인의 본질이라는 틈이 드러나는 것은 곧 그들만의 견고한 문화가 깨어지는 일이기 때문에, 백인 사회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서는 인종차별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유대인들을 사회에서 고립시켜야만 하는 것이다. 


스텝포드의 가부장적 문화는 게이남성인 로저가 갖고 있는 섬세함이나 패션 감각을 ‘여성성’으로 치부하고, 남성의 신체구조를 갖는 이상은 ‘남성성’을 가져야만 한다고 강요한다. 그들에 의해 ‘스텝포드 남성’으로 다시 태어난 로저는 자신이 더 이상 ‘계집애’가 아니라고 소리친다. 왜 여성들을 이렇게 만들었냐는 조애나의 물음에 남편 월터는 말한다.  

“우리가 만난 이후로 당신은 모든 면에서 나를 앞섰어. 더 좋은 학벌에 더 강하고 더 빨랐지. 춤과 테니스도 더 잘했어. 내가 꿈꿔왔던 것보다 최소 여섯 자리 이상의 수익을 올렸지. 나보다 말도 잘하고, 실무능력도 낫고,ᅠ심지어 섹스도 더 잘해. 다들 원더우먼, 슈퍼걸, 아마존 여왕들과 결혼한 거야. 우린 그래서 이렇게 한 거야. 우린 바보였던 거야, 우린 여자였어. 난 남자인데 말이야!”  


이들은 결국 남성성이라는 환상으로 자신의 존재를 더욱 옭죄고 있었다. 남성으로써 자신들이 여성성이라 여기는 것을 갖는다는 것, 그리고 특정 영역에서 여성으로 분류되는 존재보다 더 나은 능력을 갖추지 못한다는 것, 이러한 결핍을 메꾸기 위한 방편으로써 남성성이라는 환상은 더욱 굳건해졌고, 급기야는 갈비뼈의 원주인(原主人)이란 권력으로 여성들을 지배하고자 한 것이다. 그들의 욕망은 여성성에 대한 완벽한 물신화(物神化)로 나타난다. 그들은 이상적 여성상인 ‘노예처럼 행동하는 여자, 강박적으로 부엌청소를 하고 머리를 다듬는 여자, 어떤 식으로든 절대 도전하지 못하는 여자, 오직 당신의 손발이 되기 위해 존재하는 여자’를 직접 가공해내고자 한다. 그들은 여성성이라는 것을 완벽히 규격화하고, 이러한 체계에 속할 수 없는 잉여를 부정한다. 이로써 남겨지는 것은 순종하도록 잘 다듬어진 ‘스텝포드 와이프’들 뿐인 것이었다.  


조애나는 자신을 ‘스탭포드 와이프’로 가공하려는 월터에게 마지막 키스를 한다. 지젝(Slavoj zizek)이 말한 ‘환상의 주문에서 깨어나기’를 위해. 남성성과 여성성이라는 환상의 과잉에서 벗어나 존재의 불가능성, 즉 결핍을 기꺼이 받아들이고자 하는 것, 이것이 결국은 사랑이라는 것을 월터는 비로소 깨닫는다. 모든 사건이 일단락되고, 이후의 결혼생활에 대한 질문을 받은 조애나는 말한다. “우린 잘하고 있어요 왜냐하면 우린 완벽함을 추구하지 않으니까요. 완벽은 소용없어요." 그렇다. 우리는 결코 온전할 수가 없는 결핍된 존재들이다. 우리로서 재현되는 것은 겨우 상징체계가 허락하는 한해서일 뿐이며, 존재란 늘 그보다 더 큰 불가능성을 품고 있는 것이다. 자, 이제 우리에게 남은 과제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남성성과 여성성이라는 이분법의 환상을 횡단해보는 것이다.


-본 텍스트는 문화뉴스의 <남예지의 영화 읽어주는 여자>에 연재하고 있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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