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남예지 Apr 17. 2018

신화, 끝없이 반복되는 삶의 이야기

영화 『흑인 오르페(Orfeu Negro, 1959)』



신화란 단지 초월적 존재들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신화는 인간 삶의 근원적 구조이자 물음이며, 시간이라는 흐름 속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는, 영원히 순환하는 이야기이다. 그런 점에서 영화 ‘흑인 오르페(Orfeu Negro)’는 고대 그리스 신화의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슬픈 사랑 이야기에 대한 프랑스의 영화감독 마르셀 카뮈(Marcel Camus)의  현대적 변용이다.  


그리스 신화의 오르페우스는 시인이자 음악가로, 그의 리라연주와 노래는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의 환희의 대상이었다. 그의 음악성은 네덜란드의 화가 로엘란트 사베리(Roelandt Savery), 알베프트 코이프(Albert Cuyp), 세바스티안 브랑스(Sebastian Vrancx)의 그림 속에서 리라 연주를 듣기 위해 그의 곁에 머무는 숲의 모든 존재들-날아가던 온갖 새들과 맹수인 사자나 표범, 심지어 유니콘과 같은 상상의 동물까지도-로 재현된다. 오르페우스에게는 아름다운 아내인 에우리디케가 있었는데, 그녀는 자신에게 끈질기게 관심을 표하는 아리스타이오스를 피해 도망가려다가 그만 독사에 물려 죽게 된다. 아내의 죽음에 괴로워하던 오르페우스는 저승으로 가서 아내를 데려오기로 결심한다. 오르페우스의 리라연주는 저승을 지배하는 왕인 하데스와 왕비인 페르세포네의 마음을 움직이고, 이에 에우리디케를 자신의 삶 속으로 다시 데려갈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단, ‘이승에 도착하기 전에는 결코 뒤를 돌아보지 말 것.’이란 조건 하에. 모든 금기란 어쩌면 위반을 위해 존재하듯이, 오르페우스는 돌아보지 말라는 금기를 지키지 못하고 결국 에우리디케를 영영 잃게 된다. 엄청난 절망에 빠진 오르페우스는 점차 고립되어 갔고, 그 어떤 여자의 구혼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런 그의 모습에 앙심을 품은 여자들은 그에게 돌을 던져 사지를 찢어 강에 던져버리는데, 그의 머리와 리라는 강물에 떠내려가면서도 노래를 계속 했다고 한다.  


‘흑인 오르페’는 이러한 오르페우스 신화를 브라질 리우에서의 비극으로 재탄생시킨다. 마르셀 카뮈 감독은 전령의 역할을 하는 역무원 헤르메스를 등장시키고, 오르페우스가 그의 연주로 태양을 불러낸다고 믿는 아이들의 모습(신화 속에서 오르페우스는 아폴론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다), 에우리디케를 끊임없이 좇는 해골분장을 한 의문의 남자, 마지막에 오르페우스에게 돌을 던져 죽게 하는 미라의 모습을 통해 오르페우스 신화를 비교적 충실히 재현하려 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나타나는 신화의 변용이 특별한 이유는 기존의 백인 중심이었던 신화의 세계를 ‘흑인’들의 삶으로 옮겨왔다는 것이다. 이 영화의 출연자는 모두가 흑인이며, 그들이 살아가는 세계는 브라질의 빈민가이다. 현실에서 ‘타자’로 여겨지던 변방의 존재들을 중심으로 부각시키며 신화의 세계를 재현하고자 했던 것은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는 다소 파격적인 시도였다. 


영화의 이러한 전복적 이데올로기는 영화 전체의 흐름을 관통하는 브라질의 최대의 삼바축제 리우 카니발을 통해 좀 더 명료하게 드러난다. 브라질로 이주하여 도시의 변두리에서 거주하던 아프리카 출신의 흑인들은 자신들의 가난과 절망을 이겨내기 위해 끊임없이 춤을 추고, 노래했다. 그들의 춤과 노래 속에는 위반과 전복을 통한 웃음이 있었다. 카니발 기간 동안에는 자신들을 억압하던 사회적 구조 속에서 오는 모든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 삶의 진정한 주체로서의 순간을 만끽할 수가 있었다. 영화 속에서 흑인 등장인물들은 백인 귀족의 분장을 하고 삼바춤을 추며,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여겨지던 백인의 세계를 희화화한다. 그 웃음은 풍자적이고 패러디적인 웃음이며, 이를 통해 모든 서열과 권위는 전복된다. 그래서 카니발 속의 ‘뒤집힌 삶’은 민중성과 저항성을 갖는다.  


카니발 속의 삶은 니체(F. W. Nietzsche)가 『비극의 탄생(Die Geburt der Tragödie)』에서 언급한 예술의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아폴론적인 적인 특성을 모두 내포하고 있다. 아폴론적인 것이 균형과 조화, 질서를 추구한다면,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무질서와 도취, 파괴적인 황홀경을 추구한다. 카니발의 위반과 전복은 디오니소스적인 특성을 갖고 있지만, 카니발을 통해 억압된 욕망을 분출하고 나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는 점에서 아폴론적인 특성도 동시에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모두가 감동하는 오르페우스의 음악이 디오니소스적이라면, 그의 음악이 태양을 불러내는 힘은 아폴론적이다. 이렇게 영화는 양가적 세계의 공존을 표현하고 있으며, 이는 또 다시 영화의 전복적 이데올로기로 환원될 수 있다.  


사실 ‘흑인 오르페’를 처음 알게 된 계기는 이러한 서사적인 내용보다 ‘Manha De Carnaval’이라는 음악을 통해서였다. 이 영화의 음악에는 그 유명한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Antonio Carlos Jobim)과 루이스 본파(Luis Bonfa)가 참여하고 있는데, 영화는 그들의 음악이 널리 알려지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으며, 그들의 음악은 미국의 재즈와 결합하여 오늘날 전 세계적인 사랑을 받고 있는 보사노바(bossa nova)라는 장르를 만들어낸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에선가 연주되고 있을 법한 ‘Manha De Carnaval’은 스탠다드 재즈의 반열에 올라있다. ‘카니발의 아침’이라는 뜻으로 번역되는 이 곡은 카니발이 끝나고 난 아침, 영원할 것만 같던 사랑도 끝나버린 상황에 대한 아픔을 노래하고 있다.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사랑이 그렇게 끝나버렸듯이. 


그러나 ‘Manha De Carnaval’에서 ‘노래하라 그대여 다시 오는 삶의 기쁨으로’라는 끝 소절은 두 주인공의 비극적인 죽음이 결코 신화의 완전한 소멸을 뜻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내포한다. 영화는 마지막 부분에서 어린 베네디토와 친구들이 죽은 오르페우스의 기타를 연주하며 태양을 불러내는 장면을 통해 새로운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탄생을 보여준다. 그리고 영화의 첫 장면에서 산산조각났던 오르페우스의 부조(浮彫)가 다시 오버랩되며, 결국 신화는 현재의 삶 속에서 또 다시 반복될 것임을 암시한다. 이렇게 신화는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인간 세계의 근원적인 구조이자, 동시에 인간의 삶에 대한 핍진감(逼眞感)있는 미메시스로서 영원히 순환한다. 영화 ‘흑인 오르페’는 삶 속에서 끝없이 반복될 오르페우스 신화의 한 조각인 것이다.    





-본 텍스트는 문화뉴스의 <남예지의 영화 읽어주는 여자>에 연재하고 있는 칼럼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영원히 돌고 도는 환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