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주 어릴 때는 디즈니 만화영화들을 많이 봤던 것 같다. 일요일 아침에 하던 디즈니 만화동산은 교회가기 전 꼭 봐야하는 필수 코스였다. 아직도 생각나는 건 부자 오리아저씨와 그의 조카들이 나오는 만화에서 오리 아저씨가 맨날 금고의 금화 속에서 수영하던 장면이다. 극장에서 하는 인어공주, 알라딘, 미녀와 야수도 꼭 챙겨보는 편이었다. 특히 알라딘에서의 지니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캐릭터였다. 내 옆에서 늘 함께하며 내가 필요할 땐 무슨 소원이든 들어주는 존재! 같은 맥락에서 메리포핀스도 엄청 좋아하는 캐릭터였다. 메리포핀스는 책과 영화를 엄청나게 반복해서 봤던 기억이 난다. 디즈니에서 나온 메리포핀스 영화는 실사와 애니메이션이 합성된 형태의 영화였다. 바람이 세게 불던 날 우산을 타고 날아와서 내가 필요한 것들을 작은 가방에서 꺼내주는 존재. 지니와 비슷했다. 그러고보니 도라에몽의 서사도 비슷한 구조를 갖고 있다. 미래에서 와 배의 주머니 속에서 필요한 것들을 척척 꺼내준다. 아, 아기공룡 둘리도! 아기 때는 절대적인 존재였던 엄마가 결국 나와 다를 바 없는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어린 시절 내가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줄 수 있었던 전지전능한 엄마에 대한 그리움으로 아이들은 지니, 메리포핀스, 도라에몽, 둘리 같은 환상을 꿈꾸게 되는 건 아닐까.
#2.
어릴 적 아빠가 광화문에서 회사를 다닌 탓에 광화문 교보문고를 엄청 자주 갔었다. 어느 날인가 아빠랑 광화문 교보에서 둘리 만화책 전집을 사서 집으로 돌아가던 차 안에서 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정말 행복하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 만화책은 정말 책장이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오래 봤던 것 같다. 중학생이 되기 전에 보던 만화책은 거의 대부분 한국 만화였다. 보물섬에서 연재하던 요정핑크와 곤충소년 땡삐, 노래도 아직 외우고 있는 달려라 하니, 그리고 지금은 돌아가신 길창덕 선생님의 이웃집 돌네, 신판 보물섬 등등. 다행히 우리 부모님은 만화책 보는 것을 나무라거나 하시지는 않았던 것 같다. 집에는 내가 사 모은 만화책들이 엄청나게 많았었다. 가끔씩은 그때의 만화를 다시보고 싶어서 구입할 수 있는 곳을 찾아보곤 한다.
#3.
중학생이 되어서는 명랑만화(?)류 보다는 이미라, 원수연, 이은혜, 황미나의 순정만화를 즐겨봤다. 정말이지 심장 떨리는 장면들과 함께 울고 웃고 했던 것 같다. 급기야 만화가가 되고 싶어서 종이에 그림을 열심히 따라 그리던 시절도 있었다. 친구들과 공책에 만화를 그려서 돌려보며 서로 평가를 해주기도 했다. 지금은 만화 작업이 디지털화 되어서 옛날과 많이 다르겠지만, 예전에는 만화 속 배경의 규칙적인 무늬나 명암같은 것을 표현할 때 쓰는 스크린 톤이라는 것이 있었다. 스티커 같이 원하는 부분만큼 잘라 붙이는 거였는데 그런 전문가(?)나 쓸법한 재료들까지 다 사서 열심히 그렸었다. 그때 포기하지 않고 만화가가 되었더라면 지금 어떻게 살고 있으려나.
#4.
일본만화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을 수는 없다. 가장 오래된 일본 만화에 대한 기억은 ‘작은영웅실버’라는 10편짜리 비디오테입이다. 어릴 때부터 강아지를 엄청나게 좋아했는데, 작은영웅실버는 개가 몇 백 마리쯤 나오는 만화였기 때문에 안볼 수가 없었다. 버려지거나 도망친 개들이 모여 붉은곰이란 사나운 적을 무찌른다는 내용이었는데, 정말이지 그 안에 탄생과 죽음부터 사랑, 우정, 배신, 도전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생의 철학이 담겨 있었다. 지금도 영상을 찾아서 잊을만하면 한 번씩 본다.
특히 나에게 큰 감동을 주었던 드래곤볼은, 제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결국 세상엔 그보다 더 뛰어난 존재가 끊임없이 나타나니 결코 자만해서는 안 되며,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유명한 성경말씀처럼 처음엔 괴물성을 가진 적이었던 이웃들(피콜로, 베지터, 마인부우 등등)도 알고보면 나와 다르지 않은 사랑스런 존재들이란 사실을 깨닫게 해준 그런 대작이었다.
작가로는 우라사와 나오키를 특히 좋아했는데, 20세기소년이나 몬스터같은 스릴러는 말할 것도 없고 해피나 야와라 같은 스포츠 만화까지 정말 다양한 주제의 작품을 전문성있게 다루는 사람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그 직품들을 그리기 위해 얼마나 공부를 했을까!
일본 애니메이션은 빨강머리 앤이나 키다리 아저씨, 엄마찾아 삼만리, 알프스 소녀 하이디 등 세계 명작 소설을 기반으로 한 것들을 참 좋아했다. 그 중에서 빨간머리 앤은 비단 만화 뿐 만이 아니라 소설의 여러 번역본을 다 섭렵할 정도로 읽고 또 읽은 작품인데, 드라마로 제작된 것들까지 모조리 챙겨 볼 정도로 사랑한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사랑스러운 앤의 모습은 일본 애니메이션 속의 그 모습과 우리나라 성우의 목소리의 결합으로 강하게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