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선 ‘when I fall in love’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이라는 영화의 삽입곡으로 사용되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곡의 제목이다. 맥 라이언과 톰 행크스가 주연했던 이 영화는 운명적인 사랑에 대한 우리의 환상을 극대화시키는 데에 한 몫을 했다. 극 중 애니로 나오는 맥 라이언에게는 누가 봐도 완벽한 짝인 약혼자가 있었는데, 어느 날 우연히 라디오에서 새엄마가 필요하다는 어린아이의 깜찍한 사연을 듣게 된 뒤, 그 아이의 아빠인 샘에게 알 수 없는 이끌림을 느끼게 된다. 결국 영화는 이들이 운명적 사랑을 이루는 것으로 마무리되며, 수많은 관객들에게 사랑이란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어느 날 운명처럼 찾아오는 것’이라는 환상을 심어줬었다. 8, 90년대의 로맨틱 코미디물들은 이렇게 사랑에 대한 운명론을 다루는 서사가 많았다. 그런 영화들을 보고 자라온 나는 삶의 곳곳에서 운명처럼 다가올 사랑의 ‘징조’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예를 들면 등굣길에 우연히 세 번 정도 눈이 마주친 사람이나, 우리 집 자동차 번호판의 번호를 전화번호 뒷자리로 쓰는 사람, 알고 보니 어릴 적 같은 동네에 살았던 사람, 생일이 같은 사람, 아무도 모를 것 같았던 나만의 음악을 함께 알고 있는 사람 등등. 이런 경우에 나는 애니와 샘의 운명적 사랑을 으레 떠올렸던 것 같다.
2.
사랑에 빠졌을 때 가장 먼저 나타나는 증상은 불면증이다. 눈만 감으면 그가 아른거리고, 귓가엔 그의 목소리가 웅웅거린다. 그런데 이 증상은 비단 사람을 대상으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미치도록 갖고 싶은 물건, 혹은 너무나 하고 싶은 일과 사랑에 빠졌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노래 부르는 일과 사랑에 빠졌을 때 난 잠을 못 이뤘다. 연습실이 없던 어린 시절, 모두가 잠든 밤에는 노래를 부를 수 없으니 어서 아침이 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억지로 잠을 청해보지만 잠이 쉽게 올 리가 없다. 한시라도 빨리 부르고 싶은 노래들이 끊임없이 뇌리에 맴돌고 있었으니까. 그때는 정말 노래 부르는 것을 미치도록 사랑했던 것 같다.
3.
우리는 사랑에 빠졌을 때 도리어 더 외로워지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혼자일 땐 하루종일 울리지 않던 전화기가 대수롭지 않은 것이었다면, 누군가의 사랑을 갈망할 때의 울리지 않는 전화기는 끔찍한 외로움이다. 그리고 의심이다. ‘그는 나를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로 반복되는 의심의 굴레 속에서 나의 정신세계는 극도로 예민해진다. 이럴 경우에 취해야 할 행동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눠 지는데, 첫 번째는 ‘용기를 내! 그도 같은 마음으로 널 기다리고 있어!’라고 생각한 뒤 적극적인 행동전략을 세우는 것, 두 번째는 위에서 언급한 운명론에 입각하여 ‘어차피 이루어질 사랑이라면 지금의 상황이 어떻든 결국엔 이루어질 거야.’라고 생각하며 나의 수동성을 합리화시키는 것, 마지막으로는 ‘이상한 사람이었네. 바람둥이인가봐.’하고 깨끗이 포기할 수 있는 타당한 이유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내 기억으로 난 두 번째 행동을 가장 많이 취했던 것 같다. 운명론에 맡긴 채 수동적인 내가 되는 편이 거절당하는 위험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면서도 짝사랑을 더 오래 즐길 수 있는 방법이었다.
4.
우리가 말하는 사랑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그 대상에 대해 더 알고 싶고, 더 오랜 시간 함께 있고 싶고, 나의 소중한 것들을 주고 싶은 마음? 예전에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사랑 고백의 성공률을 높이려면 흔들리는 다리 위에서 해라. 왜냐하면 흔들리는 다리 위에서는 누구나 심장 박동이 올라가고 짜릿한 긴장감을 느끼게 되는데, 그것은 사랑에 빠졌을 때의 신체 증상과 굉장히 흡사하기 때문에 우리의 뇌는 그 순간 고백받은 상대를 사랑하는 것으로 착각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란다. 이렇게 보면 우리는 정말 단순한 존재 아닌가! 상황에 따라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착각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니. 하지만 그 착각을 통해 설렘과 행복을 느끼고 일종의 성취감과 존재에 대한 소중함을 느끼게 된다면, 굉장히 쓸모있는 착각이긴 하다. 문득 착각이 하고 싶어지는데, 파주 마장호수에 있다는 흔들다리에나 한번 가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