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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 못 이루는 밤

by 남예지

#1.

잠이 오지 않는 밤, 하지만 자야만 하는 밤에는 이미 몇 번이나 봐서 익숙해진 영화를 튼다. 내용은 다 알고 있으니 스토리 전개에 대한 특별한 기대는 없지만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장면을 기다리는 약간의 설레임과 눈을 감아도 소리만 들으면 어떤 장면인지 다 알 수 있는 친근함은 마치 어릴 적 잠자리에서 엄마 아빠가 해주시던 옛날 이야기를 들을 때 느끼던 그것과 같다. 늘 비슷한 이야기라 결말은 다 알고 있지만 다시 들어도 재미있는 몇몇 부분에 다다를 때마다 두근거리는 마음, 의식의 세계에서 무의식의 세계로 넘어가는 그 중간 즈음에 느끼는 알 수 없는 두려움으로부터 나를 보호해주는 듯한 익숙한 목소리, 그렇게 눈을 떴다 감았다 몇 번 하다 보면 어느새 잠이 든다.

참고로 수면용(?)으로 내가 자주 고르는 영화는 오즈의 마법사, 사운드 오브 뮤직, 스위니 토드 등과 같이 대사와 음악의 비율이 적절히 섞여 있는 뮤지컬 영화들이다.


#2.

사랑에 빠지면 두근거리는 마음에 잠이 잘 오지 않는다. 자꾸 보고 싶고, 지금 뭐하고 있는지 궁금하고, 목소리가 듣고 싶고. 그래서 그의 SNS를 염탐하느라 잠 못 이루는 밤도 많았다. 그 사람은 뭘 좋아하는지, 친구들은 어떤 사람인지, 평소에 뭘 하고 지내는지. 너무 심하게 염탐을 하다 보면 막상 만났을 때 내가 이미 그에 대해 너무나 많은 것들을 알고 있다는 것을 들킬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아는 것도 모르는 척 할 것. 갑자기 내가 너무 스토커 같군.


#3.

살면서 가장 잠이 안 왔던 날이 언제인지 지인 설문조사(표본 1명)를 통해 알아보았더니, 3위 여행이나 소풍가기 전날, 2위 중요한 시험 전날(특히 실기시험), 대망의 1위는 군 입대 전날이라고 한다. 난 군대를 가본 적이 없으니 그 마음을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친구들이 군대 가기 며칠 전부터 얼마나 심란했었는지는 기억이 난다. 입대 전날 밤 함께 술 마시며 듣던 김광석 노래, 입대 날 다같이 기차 타고 춘천 102보충대에 배웅가서 마지막으로 함께 먹었던 우울한 닭갈비 집. 남자 친구들과 이야기 하다보면 가장 끔찍한 악몽이 군대 재입대 하는 것이라고 하니, 실제 입대 전날엔 얼마나 잠이 안 왔을까.


#4.

중고등학교 때는 잠이 안 오면 라디오를 많이 들었다. 이문세가 진행하던 별이 빛나는 밤에, 이본의 볼륨을 높여요, 신동엽의 내일로 가는 밤 등등. 특히 지금의 오디션 프로그램의 원조격이었던 별밤 뽐내기는 안 그래도 안 오는 잠을 완전히 달아나게 할 만큼 재밌었던 프로그램이었다. 신동엽의 내일로 가는 밤에서는 성교육과 관련하여 고민을 읽어주고 이야기를 나누는 코너가 있었는데, 당시에만 해도 성적으로 많이 개방된 사회가 아니었기 때문에 누가 들을까봐 소리를 줄여놓고 몰래 들었던 기억이 난다.


#5.

실은 난 남들보다 잠이 쉽게 드는 편이다. 물론 20대 시절의 한켠에는 불면증으로 고생한 기억도 있지만, 지금은 거의 눕는 즉시 잠들기 때문에 잠들지 못하는 밤을 겪는 일이 거의 없다. 물론 20대 때 보다 고민들이 줄어서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도 낮에 몸을 혹사하는 라이프 스타일을 고수하다 보니 나이가 들면서는 잠으로 체력을 보충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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