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남예지 Jan 11. 2019

시간에 대하여

베르그송의 ‘지속’을 중심으로

 우리는 시간을 숫자로 센다. 한 시간은 두 시간보다 짧고, 세 시간은 두 시간 보다 길다. 오후 한 시는 오후 두 시 이전의 시간이고 오후 세 시는 오후 두 시 이후의 시간이다. 이러한 시간의 수적 개념은 실재하는 것인가? 답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시간이라는 비가시적인 관념의 세계를 마치 눈에 보이는 것처럼 이해하기 위해 숫자라는 기호체계를 임의로 대응시킨다. 숫자란 어차피 우리가 무한한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유한하게 꽂아놓은 기표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1과 2라는 구별된 숫자 사이에는 무한히 많은 숫자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것은 눈에 보이는 기호로는 설명할 수가 없는, 그야말로 실재이며 이데아의 세계인 것이다(음악과 가까운 우리는 도와 레 사이에 존재하는 수많은 음들을 생각해볼 수도 있겠다. 평균율이 절대적인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그것은 서양고전음악의 관습적 체계일 뿐이다).


 베르그송은 “분석이라는 조작은 대상을 기지(旣知)의 요소로 환원하는 것이다. 분석이란 한 사물을 그 사물이 아닌 것에 조회해서 함수관계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분석은 번역, 부호에 의한 설명, 차례로 관점을 바꾸면서 하는 표현이어서, 그 관점들로부터 지금 연구되고 있는 새로운 대상과 기지의 다른 대상과의 접촉을 기술하는 것이다(Henri Bergson, 『Oeuvres』: 소광희, 『시간의 철학적 성찰』에서 재인용).”라고 말했다. 여기에서 “분석”이란 과학적인 일련의 인지과정을 말한다. 과학에서는 미지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 기지(旣知), 즉 이미 알고 있는 정보 속으로 그 세계를 환원시킨다. 쉽게 말해서 기존의 체계 안으로 미지의 세계를 끼워 맞추는 것이다. 인간이란 대대로 미지의 것에 대해 알 수 없는 불안을 느끼게 되며, 기지의 세계 속으로 그것을 편입시킬 때 안정을 얻곤 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이 때의 ‘앎’이란 편의에 의해 이 세계에 공인된 방식으로 얻은 대자(對自)적인 ‘앎’일뿐 실재에 대한 ‘앎’은 아니라는 것이다. 베르그송에게 실재는 연속적이며 영원히 변화하는 것이기에 언어나 부호 등의 고정된 기표를 부여하는 순간 그것은 곧 과거에 대한 것이 될 뿐이다. 그래서 라캉의 말처럼 기표는 “끊임없이 미끄러진다.”     


 베르그송은 시간의 지속을 순수 지속과 공간 개념이 개입된 혼합 지속으로 나눈다. 시간이라는 것은 본래 관념적인 것이며, 이는 주체의 내면적 인식에 의해 직관되는 것이다. 베르그송은 직관을 이렇게 정의했다, “내가 여기서 직관이라고 부르는 것은, 대상 내부에 파고들어가서 대상이 가지고 있는 유니크한 것 따라서 표현할 수 없는 것과 합일하는 공감이다(같은 책에서 재인용).” 즉, 직관이란 앞에서 언급한 ‘이 세계에 공인된 방식으로 얻은 대자(對自)적인 앎’이 아닌 실재와 보다 가깝게 접촉하기 위한 노력이다. 부여된 기표로 인해 거세된 세계로부터 벗어나 나의 정신을 영원히 변화하는 실재 속에 합치시켜 보는 것. 이것이 베르그송이 말하는 직관이며, 그래서 직관한다는 것은 다시 말해 변화의 과정 속에 올라타 지속의 개념으로 사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순수 지속이라면, 혼합 지속이란 글의 서두에서 말했던 기호체계로 환원된 지속이다. 쉽게 말해 순수 지속이라는 것이 개별자의 내면에서 각기 다르게 일어날 수 있는 것이라면 혼합 지속은 누구에게나 동질적으로, 균등하게 나누어진 지속성이라고 할 수 있다. 연속적인 어떤 것을 ‘나눈다’는 것은 공간의 개념이 포함될 수 밖에 없다. 앞에서 예를 들었듯이 오후 한 시는 오후 두 시 이전에 ‘위치한’ 시간이고 오후 세 시는 오후 두 시 이후에 ‘위치한’ 시간이다. 한시와 두시 사이는 열 개의 구분된 ‘공간’이 있고, 하나의 공간과 하나의 공간은 앞·뒤, 혹은 좌·우로 구분된다.


 베르그송의 순수 지속으로써의 시간은 결코 나누어 구분할 수 없는 것이며, 그래서 과거와 현재가 지속적으로 상호 침투하는 시간이다. 현재가 현재인 것은 한 때 현재였던 과거를 주체가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현재와 과거를 동시에 인지함으로써 현재는 현재가 되고, 과거는 과거가 될 수 있다. 베르그송의 순수 지속은 불가분의 것으로 비재현적인 성격을 띤다. 어떠한 기표로 고정하여 분류할 수 없는 성격의 것이라는 말이다. 이는 온전히 주체의 내면적 의식의 차원에서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베르그송의 순수 지속은 주체의 ‘체험된’ 시간이다.


 결론을 말하자면 시간은 베르그송의 ‘지속’을 중심으로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는데, 하나가 순수 지속으로써 내면적이며,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시간이라면, 다른 하나는 혼합된 지속으로써 외부의 것으로 대상화되어 있으며, 객관화되어 있어 인간 사회에서 모두가 공유하는, 절대적이라고 ‘여겨지는’ 시간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스윙의 시간성 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