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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예지 Feb 15. 2019

즉흥연주, 순수기억과 습관적 기억의 사이

 베르그손에게 실재는 지속이다. 공간의 개념이 조금도 개입되지 않은 순수지속이다. 언뜻 따로 떨어져 있는 책상과 의자 사이에도 먼지나 미생물 같은 것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으며, 여기에 서 있는 나와 저기에 서 있는 너의 사이에도 그것은 마찬가지이다. 결국 어디에도 진정 빈틈이란 없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실재는 지속이다. 한 숫자와 다음에 오는 숫자 사이에는 더 작은 숫자가 존재하며, 그 숫자와 다음 숫자 사이에는 그보다 더 작은 숫자가 존재한다. 우리가 눈으로 구분하는 무지개의 색깔 사이사이에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색의 스펙트럼이 펼쳐진다. 실재는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부분에서도 지속되고 있다.


 지속한다는 것은 또한 이전의 상태와 이후의 상태가 구분된다는 것이다. 이전의 상태와 이후의 상태가 동일하다는 것은 지속이 아니라 고정이며 죽은 시간이다. 지속, 즉 살아있는 시간에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질적인 변화가 반드시 수반된다. 영원히 고정되어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 방에 있는 의자가 오늘과 내일이 같아 보일 수 있지만, 현재의 모습과 10년 후의 모습이 동일하진 않을 것이다. 지금보다는 어딘지 모르게 낡고 색이 바래져 있을 것이다. 그러한 변화는 10년이라는 기간의 어느 한 부분에 집중되어 있지 않다.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매일매일 꾸준하게 변해온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오늘이 의자와 내일의 의자는 똑같지 않다. 그래서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나는 다르며, 한 시간 전의 나와 현재의 나는 다르다. 실은 ‘지금의 나’를 인식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과거의 내가 되어 버린다. 그렇게 지속은 흐르고 변화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신의 지속을 가능케 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현재를 현재라고 인식하는 것은 과거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현재는 현재 이전의 기억과 현재 이후에 대한 결정이 공존하는 차원이다. 미래에 대한 결정 또한 과거의 기억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우리는 세계에 대한 경험을 기억하고, 유사한 상황이 일어났을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에 대해 과거에 수집해 놓은다양한 정보 중에서 선택을 하게 된다(생명과 관련된 특정 상황들에 대해서는 선택지가 다양하지 않을 수도 있다. 무조건 피해라! 가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아무튼 이러한 이유로 우리의 현재는 하나의 점이 아니라 넓이를 가진 하나의 차원이 되는 것이다.


 베르그손은 이러한 기억을 크게 두 가지 종류로 나누고 있다. 자전거 타는 법을 익히거나 악기 연주하는 법을 배울 때는 같은 행위를 반복적으로 수행하여 그것이 마치 습관인 것인 마냥 신체가 기억을 하게 만드는데, 이를 습관적 기억, 혹은 신체적 기억이라고 한다. 반면에 일부러 기억하려고 하지 않았으나, 기억의 저장고에 남아있는 우리의 과거 그 자체라고도 할 수 있는 기억이 있다. 이는 어떤 감각에 의해 촉발되어 습관적 기억으로 도출될 수 있으나, 그렇지 않은 경우, 무의식처럼 정신의 깊은 곳에 침잠되어 있다. 감각이란 우리의 정신이 외부의 자극과 만나는 지점으로 이는 신체가 매개가 된다. 습관적 기억은 신체와 굉장히 가깝게 연결되어 있는데 반해, 순수기억은 신체와는 먼 거리에서 우리의 과거를 구성한다. 순수기억은 습관적 기억을 통해 신체의 감각이나 운동으로 도출되는데, 이를 재인이라고 한다. 나는 크리스마스날 아침, 부모님이 베란다에 놔둔 선물을 가지러 가는 것에 대한 기억이 있는데, 그때의 기억이란 베란다에서 나던 오래된 짐의 냄새, 차가운 공기 등이었다. 그러나 그런 사소한 기억에 대해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가 좀 더 자란 어느 날, 아이스크림을 고르기 위해 슈퍼마켓의 커다란 냉동고 안에 머리를 넣었을 때, 그날의 ‘냄새’를 맡으며 크리스마스의 행복함을 떠올리게 된다. 내가 평소에 인식하지 못했던 베란다의 오래된 짐의 냄새, 차가운 공기 등은 분명 순수기억의 형태로 저장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그때와 비슷한 냄새와 온도가 순수기억을 심상화하여 습관적 기억, 즉 크리스마스의 행복감으로 도출되게 만든 것이다.


 자, 멀리 돌아왔지만 내가 베르그손의 기억에 대해 적지 않은 분량으로 다룬 것은 재즈에서의 즉흥연주가 이루어지는 메커니즘에 대해 기억을 중심으로 이야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우선 재즈의 즉흥연주에 대해 생각해보자. 즉흥연주는 베르그손의 두 가지 기억, 순수기억과 습관적 기억이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 과정이다. 재즈연주자들은 즉흥연주에서 선율을 만들어내기 위해 다양한 스케일(scale)과 릭(lick)을 암기한다. 이는 즉흥연주의 재료가 되는 것들인데, 우선 스케일을 암기하는 이유는 스케일을 구성하고 있는 음들을 재조합하여 화성진행에 어울리는 선율을 만들어내기 위함이다. 영어를 공부할 때 두 단어 이상으로 이루어진 숙어를 외워두면 문장을 좀 더 쉽게 완성시킬 수 있듯이, 재즈에서는 릭을 외워두면 즉흥연주의 선율을 만드는 것이 좀 더 용이해진다. 재즈 즉흥연주의 문법에서 숙어로 사용되는 셈이다. 릭은 스케일의 구성음들을 통해 연주자가 독창적으로 만들어 사용할 수도 있으나, 기존 연주자들의 즉흥연주나 작곡된 악곡 중 인상적인 선율을 차용하는 경우가 많다. 즉흥연주는 말 그대로 연주가 이루어지는 순간에 즉흥적으로 일어나는 작곡 행위이기 때문에 연주자들은 기억에 의존하는 경향이 크다. 반복을 통해 암기한 스케일이나 릭은 습관적 기억으로 즉흥연주의 순간에 거의 자동적으로 신체화되는 경향이 있다. 숙련도가 높은 연주자들일 경우에는 이러한 음악적 상투성을 피하려는 노력을 할 수 있으나, 숙련도가 비교적 낮은 연주자들일 경우에는 이러한 신체적 기억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베르그손의 순수기억은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무의식적 차원과 관련이 깊다. 무의식에 저장된 기억들은 순수기억과 마찬가지로 의도적인 노력없이 저장된 기억이다. 또한 순수기억은 과거를 형성하고 있으며 현재 속에서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도 무의식과 맥락을 함께 한다고 할 수 있다. 차이점이 있다면 베르그손의 순수기억이 과거 그 자체를 보존하고 있다면, 정신분석의 무의식은 상징계 내에서 언어로 포착되지 못한 잉여가 침참되는 장소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순수기억과 무의식에 저장된 정보들은 내 의지에 따라 현재에 불러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기치 않은 순간에 나도 모르게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러한 순수기억은 무의식이 예술가들의 창작에 영향을 미치는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다. 특히 초현실주의나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들이 무의식적인 이미지들을 끌어내어 작품의 재료로 활용하고자 했던 자동기술법(Automatism)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방식으로 재즈의 즉흥연주에서도 무의식적인 음악 언어들이 사용된다. 무의식과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는 결정적인 이유는 많은 연주자들이 연주 도중, 의도하지 않았던 선율들이 ‘자신도 모르게’ 나오는 경험을 한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인간의 담화에서 흔히 일어나는 ‘말실수’와도 같다. 실제로 연주자들은 본인의 연주가 끝난 후 자신의 즉흥연주 내용에 대해 특정 선율이 어떻게 도출되었는지에 대해 설명할 수 없는 부분들이 상당수 있으며, 심지어 레코딩된 자신의 즉흥연주 중 어떤 부분들에 대해서는 낯섦을 느끼는 경우들도 있다. 폴 린즐러(Paul Rinzler)는 재즈에서의 즉흥연주는 내부적인 자원에서 기인하는 것이며 이러한 자원은 깊은 무의식에 위치하고있기 때문에 성공적인 즉흥연주를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무의식을 자극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는 즉흥연주에서 정신집중을 통해 정신의 깊은 곳, 즉 무의식에 도달하는 것 즉흥연주를 하는 연주자들은 자신의 이 예술로서의 재즈가 갖는 이상적인 모습이라고 말했다. 크리스토퍼 스몰(Christopher Small) 또한 즉흥연주를 하는 연주자들은 자신의 모든 표현을 의식적으로 완전하게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며, 심지어 자신들의 연주가 그렇게 무의식적으로 흘러가게 내버려 두는 것에서 즉흥연주의 즐거움을 찾는다고 말했다.     




참고문헌


김재희, 물질과 기억 : 반복과 차이의 운동, 살림, 2008.

소광희, 『시간의 철학적 성찰』, 문예출판사, 2001.

Christopher Small, "뮤지킹 음악하기", 조선우·최유준 역, 효형출판, 2004.

Paul Rinzler, "The contradictions of jazz", Scarecrow Press,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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