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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예지 Mar 03. 2019

재즈의 '낯설게 하기'

 우리의 사고는 생각보다 창의적이지 않다. 우리는 ‘알고 있는 대로’ 말하고 ‘알고 있는 대로’ 행동하기를 좋아한다. 아니, 좋아한다기보다는 알고 있는 대로 반응하기를 자동적으로 선택한다. 이는 어쩌면 라캉이 말하는 상징계로 들어선 결과의 일부가 될 수도 있겠다. 상징계를 구성하는 언어는 내가 태어나기 훨씬 이전부터 내가 살아갈 세계, 즉 타자의 세계를 구성하고 있던 견고한 체계이다. 상징계에 성공적으로 안착한 대가로 나는 타자가 말하는 나로서 재구성된다. 이에 나는 대타자의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보게 된다. 대타자의 시선, 즉 상징계의 법, 문화, 질서, 규범 등을 통해 세계를 분류함으로써 우리는 일종의 안정감을 얻게 되는 것이다.


 ‘알고 있는 대로’ 반응하는 것은 베르그손의 ‘습관적 기억’에 의존하는 것이다. 우리는 낯선 자극에 대해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끼는 경향이 있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알고 있는 대로’ 분류를 해야만 곧 세계에 대한 안정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우리는 가장 복잡한 대상인 인간을 분류해보기 위해 별자리, 혈액형 등을 기준 삼아 보기도 하고, 과학적으로는 그다지 근거가 없어 보이는 테스트 따위를 만들어내기도 하며, 실제 이론과 통계에 의거하여 성격검사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심리학에서는 ‘알고 있는 대로’ 행동하게 하는 인지적 도식을 스키마(schema)라고 한다. 쉽게 말해서 선입견도 스키마의 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겪어 보지 않은 어떤 대상을 이미 존재하는 인지적 도식을 통해 판단하는 것이다. 스키마는 생존과 직결된 상황이나 습관적 기억이 필요한 상황에서는 긍정적인 작용을 하지만,  특정 상황이나 대상에 대한 부정적 사고가 자동화될 경우에는 불필요한 불안감을 유발하여 생활에 불편을 초래하기도 한다.  


 특히 예술가들의 창작활동에 있어서 이러한 자동적 사고 혹은 습관적 기억은 창작자를 관습적인 틀에 얽매이게 하는 경향이 있다. 이에 러시아의 형식주의자 슈클로프스키(Viktor Borisovich Shklovskii)는 예술의 본질적 기법을 특정 자극에 대한 자동적 사고에서 벗어나기 위한 ‘낯설게 하기’를 통해 찾는다, 슈클로프스키는 우리의 사고가 지나치게 자동화되어 있어서, 낯선 것을 쉽게 소화될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바람에 지각작용이 활발히 일어나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예술은 지각작용을 방해하거나 그 방해의 기법에 주의를 쏟게 하는 기술”을 다양하게 발전시켜 왔다는 것이다. 슈클로프스키는 “행복한 생이란 세계를 완전히 인식한 자의 생”이라는 I.A.리처즈의 말을 인용하며, 예술이란 “그러한 인식의 기록이며 인식을 위한 계기”라고 말하며, 이에 지각력을 증진시키기 위한 예술적 표현기법의 하나로써 ‘낯설게 하기’를 제안한 것이다. 우리의 자동적 사고는 문장이 채 완성되기도 전에 문장의 방향, 심지어는 문장 그 자체를 미리 짐작할 수 있게 하며, 어떤 대상의 아름다움에 대해 감탄할 때에도 이미 ‘아름다움’을 나타내기 위해 ‘마련’되어 있는 통상적인 언어들로 사고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일단은 습관적 기억에 의해 반복적으로 경험한 표현들이 자동적으로 나오기 마련이고, 그렇게 표현해야만 타인과 소통이 원활하기 때문이다. 친구와 길을 걷다가 피어있는 꽃을 보고, ‘알록달록한 꽃이 참 이쁘다.’라던가, ‘꽃들이 하늘하늘 춤을 추네.’라고 표현한다면 타인과의 소통에 별 문제가 없겠지만, 시인 김춘수처럼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라고 말한다면 일상적 소통이 이루어지기는 힘들 수가 있다. 후자의 표현은 왜 일상적 소통을 힘들게 할까? 이유는 바로 ‘자동적 사고’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슈클로프스키는 예술의 이러한 기능에 주목했다. 자동적이고 습관적인 사고로부터 벗어나 적극적으로 지각하고 인식할 수 있도록 자극하는 것이다.


 슈클로프스키는 톨스토이의 ‘태형’에 대한 표현을 ‘낯설게 하기’의 예로 든다. 태형이라는 낯익은 단어를 “범법자들의 옷을 벗기고 그들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엉덩이를 회초리로 친다.”라고 표현함으로써 낯설게 만드는 것이다. 나병철은 모더니즘적 표현기법으로써 ‘낯설게 하기’를 언급하며, 이상의 『날개』를 예로 들었다. 『날개』에서는 주인공 아내의 직업을 ‘매음’이라는 직접적인 용어를 사용하여 자동적으로 인식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유아적인 주인공이 아내의 직업에 대해 잘 모르는 것처럼 서술하도록 하여 독자들의 인식을 지연시킨다. 다시 말해서 독자들이 ‘매음’이라는 직업에 대해 자동적으로 사고하지 못하도록 ‘낯설게’ 만든다.


 재즈는 이미 익숙한 것을 낯설게 만드는 음악이다. 재즈는 즉흥연주를 통해 기존의 선율을 걷어내고 새로운 선율을 만들어낸다. 원곡의 선율 변형하거나 재조합하기도 하고, 완전히 새로운 선율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원곡이 존재하는 연주의 경우 대부분의 음악이 ‘예상’대로 흘러간다. 연주자와 청자 모두가 공유하는, 이미 익숙해진 악곡이 자동적으로 떠오르기 때문에 곡의 흐름을 대부분 예측할 수가 있다. 한편 재즈의 경우에는 즉흥연주가 주요한 핵심을 차지하기 때문에, 원곡에 익숙해져 있다 하더라도 자동적으로 예측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재즈 연주의 본질은 원곡의 위반과 전복에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일반적인 재즈 연주의 경우, 곡의 형식은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하다. 스탠다드 재즈곡들은 A-A-B-A, A-B-A, A-B-C 등 비교적 단순한 형식의 곡들이 많으며, 즉흥연주 시에도 특별히 편곡의 과정을 거치지 않는 한은 이러한 형식이 그대로 유지된다. 그리고 헤드라고 부르는 테마를 연주한 후, 그 테마를 이루는 화성진행을 토대로 하여 연주자들이 돌아가며 ‘솔로’라고 부르는 즉흥연주를 하게 된다. 이러한 전체적인 형식은 다른 음악들과 마찬가지로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하나, 슈클로프스키의 예술의 본질적 표현기법으로써의 ‘낯설게 하기’가 주로 적용되는 부분은 연주자들의 ‘솔로’ 부분이다. 연주자들은 솔로 연주 과정에서 테마의 선율을 다양하게 변형하기도 하며, 기억에 저장하고 있던 음악적 정보를 재조합되고 변형하여 테마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선율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또한 연습 과정을 통해 암기하고 있던 여러 가지 스케일을 통해 혹은 집단적인 즉흥의 과정에서 다른 연주자와의 소통을 통해 독창적인 선율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이렇게 다양한 사고의 과정이 연주의 매 순간 다르게 일어나기 때문에 솔로 연주는 연주자와 청자 모두가 자동적으로 예측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물론 연주자에 따라 연주의 처음과 마무리, 혹은 연주의 절정 등에서 연주자들끼리의 사인을 위해서 혹은 청자의 반응을 유도하기 위해 매번 동일한 릭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기는 하나 이런 경우들은 일단 제외하고 즉흥연주의 본질에 집중해서 고민해보도록 하자).


 또한 재즈에서는 리하모니제이션(reharmonization)을 통해 원곡의 선율을 낯설게 들리도록 만들기도 한다. 다양한 텐션음을 추가하여 원곡에는 없던 긴장감을 조성하기도 하며, 동일한 기능의 대체 화성이나 전혀 다른 기능의 화성을 사용함으로써 새로운 사운드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우리는 음악을 들을 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예상해서 듣기’를 실행하게 되는데, 다시 말해서 내가 이전에 알고 있던 방식대로 음악이 진행되기를 기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는 듯하다. 특히 화성진행은 선율과 같이 내가 실제로 소리내어 기억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특유의 ‘분위기’를 기억하게 되는데, 주제 선율과 어우러진 이러한 분위기는 반복 청취를 통해 일종의 익숙한 안정감을 형성한다. 이 익숙함을 깨뜨리는 것이 재즈 리하모니제이션의 목표가 된다. 물론 이러한 낯섦도 반복되다 보면 또 다른 익숙함이 될 수가 있다.



참고문헌

Viktor Borisovich Shklovskii, 『러시아 형식주의 문학이론』, 한기찬 역, 月印齋, 1980.

나병철, 『모더니즘과 포스트 모더니즘을 넘어서』, 소명출판,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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