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가 상징계 속에서 살아간다. 상징계를 이루는 가장 대표적인 요소는 바로 언어이다. 우리는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우리의 갖가지 욕망을 모두 표현할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우리 욕망의 일부만을 드러낼 수 있게 될 뿐이다. 언어라는 것은 우리가 사회적 소통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놓은 하나의 기호체계일 뿐, 우리의 모든 생각과 감정을 담아 내기는 힘들다. 대표적으로 우리는 종종 설레임, 고통, 그리움, 기쁨, 슬픔, 호기심, 두려움, 즐거움 등등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복합적인 감정의 결정체인 그것을 ‘사랑’이라고 표현할 수 밖에 없는 상황과 맞닥뜨린다. 그래서 ‘사랑’이라는 단어 안에는 언어로는 다 설명해 낼 수 없는 ‘공백’이 생긴다.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사회가 공유하고 있는 뜻과 내가 경험한 사랑의 실재 사이에 ‘틈’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상징계는 온전하지 않다. 기표는 끝없이 미끄러지며, 우리가 포착할 수 있는 것은 몇 개의 고정된 점일 뿐이다. 그 점들은 결코 온전한 전체가 될 수 없는, 부분대상일 뿐이다.
음악 또한 상징계 속에서 만들어진다. 가장 쉬운 예로 우리는 음악적인 소통을 위해 음표, 쉼표, 악상기호 등의 기표가 포함된 기보법을 습득한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의 음악적 표현을 온전히 나타내 주는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강세를 표기하는 몇몇 기호의 체계의 밀도는 매우 성기며, 그래서 포르테(f)라 표기되어 있다 하더라도 작곡가에 따라 포르테의 정도는 다를 수 있다. 실재와 기표 사이에 틈이 벌어지는 것이다. 특히 재즈의 블루스(blues)를 떠올려보자. 블루지(bluesy)한 느낌을 내기 위한 서로 다른 음 사이의 굴절 정도를 악보로 명확히 표현하는 것이 가능한가? 오선에 음표와 이음줄을 이용하여 대략적인 표현만이 가능할 뿐, 음표는 실재의 부분만을 표현할 뿐이다. 악보는 부분적 의미의 포착일 뿐이다.
서양고전음악은 재즈보다 훨씬 더 상징계에 구속되어 있다. 왜냐하면 음악적 의미의 대부분이 작곡 단계에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작곡 당시에 악보로 고정된 의미를 최대한 유사하게 재현해내는 것이 서양고전음악의 주요한 목표가 된다. 물론 악보만으로 작곡가의 의도를 모두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악보는 부분대상의 포착일 뿐이므로. 그러나 일반적으로 서양고전음악을 연주하는 연주자들의 경우, 그 곡을 작곡한 작곡가의 의도, 즉 실재와 기보된 기표 사이의 틈을 최대한 좁혔다고 평가받기를 원한다. 그렇다면 재즈는 어떠한가.
재즈가 상대적으로 상징계에서의 구속력이 떨어지는 이유는, 일반적인 스탠다드 재즈의 연주에서 고정된 원곡자의 의도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스탠다드 재즈 연주의 음악적 의미는 연주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즉흥연주의 과정에서 원곡을 위반하고 전복함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발생시키는 것, 이것이 재즈 연주의 목표가 된다. 기존 스탠다드 재즈의 연주가 아니라 작곡가와 현재 연주하고 있는 연주자가 동일한 경우에도, 결국 즉흥연주의 과정을 통해 악보로 표기된 테마를 전복하게 된다. 재즈에서의 음악적 의미는 즉흥연주를 통해 계속해서 미끄러진다. 그래서 재즈는 더욱 정의하기 어렵다. 더욱 큰 공백과 틈이 존재한다.
재즈에서 고정된 의미로 포착하기 가장 어려운 것 중의 하나가 ‘스윙(swing)’이라고 할 수 있다. 재즈의 스윙(swing)에는 크게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하나는 음악을 만들어내는 기본적 리듬 스타일로써의 스윙이고, 다른 하나는 연주자와 연주자 사이에서 만들어져 청자에게까지 전달되는, 그루브(groove)라고 하는 일종의 음악적 흐름(flow)으로써의 스윙이다. 전자는 아래의 [그림 1](김현종, 「재즈 라이드 심벌의 컴퓨터적 분석을 통한 재즈 리듬의 변화에 대한 고찰: 스윙 리듬의 실체」, 상명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6, p.7 에서 인용)과 같은 방법들로 표기될 수 있다.
2번의 “broken 8th triplet”으로 표기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는 하나, 연주자에 따라 표현되는 스윙의 형태는 위와 같이 다양하며, 이 외에도 다른 표기법이 있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이 동일하게 ‘스윙’을 말하고 있으며, 그래서 스윙을 명확히 정의하기란 어렵다. 후자의 음악적 흐름으로써의 스윙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스윙은 리듬을 타는 방식이며, 연주자 각자의 리듬이 공존하며 만들어지는 복층적 리듬 속에서 발생하는 긴장과 이완이고, 이러한 긴장과 이완을 조절하는 연주자들 간의 리듬적인 관계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스윙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연주자들의 자유로운 리듬 표현과 함께 비트(beat)라고 하는, 연주자들이 다 같이 공유하는 규칙적이고 바탕이 되는 리듬이 필요하다. 연주자들은 이 기본적인 비트를 다양하게 분할하고, 비트를 중심으로 박자를 밀거나 당기면서 각자가 표현하고자 하는 리듬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연주자들의 박자는 긴장과 갈등을 초래하는데, 이것이 반복되다 보면 어느 순간 연주자와 청자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흐름’, 즉 스윙이 생기게 된다. 결국 흐름으로서의 스윙은 더욱 기보하거나 정의하기 힘든 것이 된다. 말로 아무리 설명하려 해도 그 중핵으로는 들어갈 수가 없다. 왜냐하면 중심에는 직접 참여해보지 않으면 도저히 알 수 없는 부분이 공백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윙은 정의하려 할수록 중핵의 주위를 맴돌 뿐이다. 기표는 계속해서 미끄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