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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예지 Feb 06. 2019

나는 무엇인가

분열된 주체와 욕망의 대상

 내가 세상에 태어난다. 내가 태어나기 훨씬 이전부터 존재해왔던 언어의 세계는 나의 출생과 동시에, 아니 어쩌면 그 이전부터 내가 누구인지를 정의한다. 누군가의 딸이나 아들로, 누군가의 형제나 자매로, 심지어 나를 위해 마련되어 있는 물건들마저도 나의 정체성을 말해주고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온통 분홍색의 물건들이 가득하다면 나는 ‘여자’라고 분류되어 있을, 파란색의 물건이 가득하다면 ‘남자’라고 분류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여기까진 내가 아직 언어의 권력 앞에 온전히 복종하기 전이다.


 생의 초기 어머니는 아이의 전부이다. 어머니는 언어를 아직 모르는 아이가 표현하는 몸짓이나 소리로 아이가 필요한 거의 모든 것을 알아챌 수 있으며, 수많은 결핍을 채워줄 수 있는 전지전능의 존재이다. 그래서 아이 또한 어머니에게 동일한 존재가 되고자 한다. 자신만이 어머니의 결핍을 온전히 채워줄 수 있으며, 어머니의 모든 욕망의 대상이 자신이길 욕망한다. 급기야 아이는 어머니를 자신과 동일시한다. 그래서 아이는 어머니가 갖고 싶어 하는 것, 어머니가 먹고 싶어 하는 것들을 대신 욕망한다. 아이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아이는 어머니가 자신 이외에도 다양한 욕망의 대상을 갖고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점차 깨닫기 시작한다. 이 시기 즈음하여 아이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의 결정적인 ‘방해꾼’이 나타나는데, 어머니의 욕망의 대상이기도 하며, 나의 욕망을 거세하려 위협을 가하는 자, 그는 바로 아버지이다.


 상징계는 아버지의 법이 지배하는 세계이다. 언어로 이루어진 세계, 법, 규범, 규율로 이루어진 세계로 아이는 진입한다(프로이트와 라캉으로 이러지는 정신분석의 이론이 지나치게 가부장적이라는 비판으로 후에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상징계에서도 여전히 힘을 갖는 모체의 일부인 아브젝트(abject)라는 개념을 만들어냈고, 주디스 버틀러는 상징계의 분류체계 자체를 부정하기도 한다). 언어를 통해 내 욕망의 일부를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아이는 언어에 온전히 복종하게 된다. 언어라는 체계로 나의 감정과 생각을 치환하게 된 것이다. 내가 고플 때, 장난감이 갖고 싶을 때, 칭찬을 받고 싶을 때, 어딘가에 가고 싶을 때, 짧게라도 언어를 사용하면 비교적 즉각적인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 복종 또한 내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언어라는 기표를 통해야만 나는 상징계에서 ‘현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라는 존재는 언어를 통해 만들어진다. 나를 평생 따라다닐 이름부터 언어로 이루어져 있지 않은가. 라캉의 말대로 “강제된 선택”인 것이다.


 언어에 복종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만들어진다.’ 이름이라는 언어가 내포한 뜻으로, 타자가 나에 대해 말하는 방식으로, 여러 사회 속의 내 위치를 설명하는 방식으로. 그러나 그 어떤 것도 ‘나’라는 실재를 온전히 표현할 수는 없다. 주체의 잉여는 ‘나’라는 기표 밖으로 소외된다. 나를 설명하는 기표는 계속해서 미끄러짐으로써 진정한 주체는 타자 속에 공백으로 존재한다. 상징계 내에서 내가 인식하는 주체란 결핍된 주체일 뿐이다. 이렇게 주체는 분열된다. 일찍이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통해 근대적 이성의 출발을 알렸다.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내가 이렇게 생각을 할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정신분석은 ‘무의식’의 발견 혹은 발명을 통해 데카르트적 주체에 정면으로 맞선다.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도 존재한다. 즉 무의식 속에도 나는 존재하는 것이다.

 

 어머니를 더이상 소유할 수 없음을, 상징계 내의 현존을 위해서는 아버지의 법을 거부할 수 없음을 알게 된 아이는 자신의 온전한 욕망의 대상이었던 어머니와 분리되며 주체는 분열된다. 분열된 주체는 욕망의 대체물을 찾는다. 이를 ‘대상 a’라고 하는데, 온전하다고 가정된 대타자 A로부터 분리된 것이다. 분열된 주체는 대상 a를 욕망하며, 이는 전체가 아니라 부분일 뿐인 대상 a지만, 주체는 그것이 마치 전체인 것과 같은 환상을 가지고 그 안에서 살아간다. 이렇게 대상 a에 대한 환상 속에 살고 있는 분열된 주체를 라캉은 S◇a라고 표기한다(원래는 사선 빗금이나, 브런치에는 입력이 안되는 관계로). 빗금쳐진 S는 분열된 주체를 나타내며, 기표로 덧씌워지며 거세된 잔여물이고, 주체의 침전된 무의식이다. 우리의 삶은 수많은 대상 a에 대한 환상으로 둘러쌓여 있다.            






참고문헌

브루스 핑크, '라캉의 주체-언어와 향유 사이에서', 이성민역, 도서출판b,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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