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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예지 Feb 04. 2019

무의식의 세계

라캉은 말했다. "자아는 타자다."

 일상에서의 말실수를 떠올려보자. 내가 전혀 의도치 않았던 단어가 툭 튀어나와 당황하거나 웃었던 경험들. 자,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 상황이 ‘내가 전혀 의도치 않았던’ 것이란 사실이다. 내가 의도적으로 내뱉은 말들은 나의 의식 안에 조합되고 변형된다. 나의 의식 안에서 발생한다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 혹은 상황을 만들기 위해 나의 기억 속에서 적절한 언어를 ‘스스로’ 끄집어내어 사용하는 절차를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말실수는 어떠한가. 말 그대로 ‘전혀 의도치 않았던’ 말이 ‘나와지는 것’이다. ‘스스로 끄집어내어 사용하는’ 것이 능동적인 과정이라면 말실수는 주체에게는 수동적으로 일어나는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나의 안에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부분, 나를 수동적으로 만드는 대신 나보다 더 능동적으로 말하려 하는 내 안의 다른 부분. 프로이트는 이를 무의식이라고 불렀고, 라캉은 “무의식은 타자의 담화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일상에서 ‘무의식’이란 단어를 심심치 않게 사용한다. 실수를 했을 때, 의도치 않은 결과를 만들어냈을 때, 혹은 이상하게 무언가에 끌릴 때, 우리는 이것이 ‘무의식’의 소행이라 생각한다. 이는 정신분석이 생각보다 우리에게 친밀하게 다가와 있음을 보여준다. 무의식은 내 안에 있는, 의식과는 다른 층위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의식적으로 내뱉는 말들은 다시 말해서 나의 ‘자아’가 하는 말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무의식적으로 내뱉은 말실수도 과연 ‘자아의 말’이라 할 수 있을까. 내가 전혀 의도하지 않았고, 나조차도 낯선 그런 말들을 내뱉었을 때 말이다. 그래서 라캉은 무의식이 타자의 담화로 이루어진 세계라고 보았다. 내 안에 있지만 자아와는 다른 심급의 장소, 외래적이고 낯선 세계. 내 안에 언제부터, 어떻게 이런 세계가 들어오게 됐을까?


 우리가 처음 태어났을 때 만나게 된 세상은 언어의 세계였다. 언어로 이루어진 세계를 라캉은 '상징계'라고 부른다. 의사는 나를 남자 혹은 여자라고 하는 상징으로 분류했을 것이고, 엄마와 아빠는 이미 지어놓은 상징으로 나를 호명했을 것이다. 내가 울면 누군가는 ‘배가 고프구나’, ‘기저귀를 갈아야겠구나’라고 내 울음의 이유를 언어로 규정해주었을 것이며, 나의 행위에 대해 ‘착하다’, ‘이쁘다’, ‘나쁘다’ 등등의 정답지(?) 제시해줬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나라는 존재를 타자에 의해 이미 만들어져 있는 언어의 체계 속으로 밀어 넣었다. 실은 배가 고프거나 기저귀가 축축해서가 아니었을 수도 있지만, 무언가를 먹고 싶거나 기저귀가 갈고 싶을 때는 울어야 한다고 믿어버리게 되었다. 이것이 나 아닌 타인과 소통하는 방법이었다. 이렇게 타자는 내 안으로 들어온다. 그래서 라캉의 말대로 자아는 타자이기도 하다.


 무의식은 언어와 같이 ‘구조화’되어 있다. 정보들이 무질서하게 저장되어있는 혼돈의 공간이 아니라 질서정연한 ‘사슬’과 같이 얽혀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의식은 영원히 파괴되지 않는다는 것이 라캉의 견해이다. 무의식 속에서 언어처럼 구조화된 정보들은 영원히 그 곳에 남아 우리의 의식을 간섭한다. 우리가 주체인 입장에서 간섭을 ‘당한다.’ 글의 처음에서 언급한 말실수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원치 않는 말이 튀어나오는, 실은 무의식이 원했던 말이 튀어나오는, 말실수를 ‘당한다.’ 언제 경험했는지도 모를 것들이 사슬에는 기록되어 있다. 마치 생물 세포의 염색체를 구성하는 DNA처럼 말이다. DNA는 우리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자율적이고 자동적으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다. 다시 말해 과거가 현재를 구성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우리 생의 초기로 돌아가자. 언어의 세계가 정해준 ‘나의 울음의 이유’가 아닌, 내가 정말 울어야 했던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이를 라캉은 ‘실재’라고 한다. 언어, 즉 상징계의 지배를 받기 이전의 세계, 어떠한 틈이나 여백도 없는 충만한 세계. 실은 상징계란 틈과 여백의 투성이다. 왜냐하면 언어라는 기표는 결코 실재를 온전히 담아낼 수 없다. 생의 초기에 우리가 울었던 이유가 물론 배가 고프거나 기저귀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아닌’ 이유들은 사라지지 않고 남아서 상징계에 틈을 만든다.


 또 예를 들어보자. 나라는 인간이 있다. 나는 누군가의 자식이고 누군가의 형제·자매이며, 특정한 이름으로 불리워지기도 하며, 내가 분류된 젠더에 따라 사회가 정한 남성성 혹은 여성성으로 정의되기도 한다. 이렇게 ‘나’를 설명할 수 있는 부분 집합들을 다 모아보자. 그 부분 집합들은 또 다시 ‘나’를 포함한다. 그래서 나라는 존재는 온전히 정의될 수가 없다. 결국 틈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 틈 속에 라캉의 ‘실재’가 있다.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불가능성을 가진 그것.


 하나의 몸짓에 불과했던 그 무엇이 누군가 이름을 불렀을 때야 비로소 ‘꽃’이 되고, 서로에게 의미있는 무엇인가가 된다고 했던가. 이 의미란 사회적인 소통을 위해 ‘꽃’이라는 언어적 기표로 실재가 덧씌워짐을 말한다. 상징계 속에서 ‘실존’케 하는 과정을 거친 것이다. 하지만 그가  ‘꽃’이라는 이름을 붙이기 이전의 실재는 ‘몸짓’이었다. ‘몸짓’은 ‘꽃’으로 치환되며 그 안에 담기지 못한 나머지를 남긴다. 이는 상징계 내에서 공백, 즉 틈이 되는 것이다.  


  




참고서적

브루스 핑크, '라캉의 주체-언어와 향유 사이에서', 이성민 역, 도서출판 b, 2016, 1장-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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