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파트 화단에는 고양이가 살고 있다. 왼쪽 입 위의 까만 점이 매력적인 아이가 이곳의 터줏대감이다. 이 아이에게도 한때는 형제들과 엄마가 있었다. 퇴근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 화단 쪽에서 뭔가가 나를 감시하는 듯한 기분이 들어 고개를 휙 돌려보니, 아파트 벽 쪽으로 자그마하게 뚫린 구멍 속에 작은 고양이 네 마리가 부채춤을 추듯 붙어 앉아 반짝반짝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우린 지금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는데, 엄마가 여기서 나가면 큰일이 난다고 했으니 네가 좀 이쪽으로 와줄래?”
어디선가 눈을 깜빡깜빡하는 것이 고양이들의 인사라고 들었던 것 같다. 내 눈이 작아 혹시 안 보일까 싶어 과장되게 끔뻑거리며 다가갔다. 표정이 너무 부담스러웠기 때문일까, 인사는 실패였다. 고양이들은 빛의 속도로 구멍 깊은 곳을 향해 숨어버렸다. 그날부터 나의 출근길과 퇴근길의 모든 관심사는 고양이였다. 한 번만 만져보고 싶어 먹을 것도 사고, 장난감도 사서 유혹해 봤지만 그들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아기 고양이를 함부로 만져서 인간의 체취가 남게 되면 엄마 고양이들이 아기 고양이를 버리게 되는 불상사가 일어날 수도 있다고 한다. 다행히 그들은 나에게 단 한 번도 ‘만짐’의 기회를 주지 않았다. 가정교육이 매우 잘 된 아이들이었다.
어느새 그들은 우리 동네의 화젯거리가 되어가고 있었다. 아장아장 걷는 아이들부터 교복 입은 아이들, 그들의 부모까지 삼삼오오 모여서 고양이를 구경하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모두들 고양이를 사랑했다. 고양이 급식대가 생기고, 비가 오자 급식대에 우산도 씌워주고, 나는 급기야 튼튼한 집까지 주문해서 화단 옆에 놓아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늘 걱정하던 일이 일어났다. 호기심을 주체할 수 없었던 아기 고양이 하나가 드디어 화단 밖을 벗어났고, 때마침 오던 차에 치여 고양이 별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경비 아저씨로부터 들을 수가 있었다. 얼마나 화가 났는지 모른다. 그 차를 운전했을 어느 부주의한 사람에게 화가 났고, 결국 엄마 말을 듣지 않은 고양이에게 화가 났고, 그 아이들을 잡아서 안전한 곳에 옮겨놓지 못한 나에게 화가 났다. 엄마 고양이는 어딘가에서 새살림을 차렸는지 이미 안 보인 지 오래였다. 남은 고양이들에게 이 상황을 설명해줄 길이 없었다. 형제의 사고에 대한 충격 때문이었을까. 터줏대감이 된 점 난 고양이는 지금도 절대 찻길에는 발을 디디지 않는다. 나도 그 이후로는 화단에 고양이만 보이면 “절대 밖으로 나오면 안 돼. 여기 나오면 정말 큰일 나는 거야. 안쪽으로만 다녀야 해!”라고 손짓 발짓을 하며 외쳐본다. 누군가는 분명 나를 미친 사람이라 생각했겠지.
아무튼 화단 안쪽은 살기 좋은 신도시로 소문이 났는지, 많은 고양이들이 드나들었다. 노란 나비도 있었고, 덩치가 큰 얼룩이도, 멋진 무늬를 가진 고등어 태비도 있었다. 하루는 덩치 큰 얼룩이가 멀리서 보이기에 반가운 마음에 달려갔더니, 사냥을 했는지, 아니면 어디서 죽은 걸 물어왔는지 피가 뚝뚝 흐르는 커다란 까마귀를 물고 있었다. 고양이만 보면 늘 자연스레 입꼬리가 올라가는 나였지만, 그 순간에는 등골이 오싹했다. “아, 안...녕...”이라고 말하며 조금씩 뒷걸음질 쳤다. 두려웠다. 혹시 저 까마귀를 들고 나에게 다가오면 어떡하지. 하필 오늘따라 나에게 그런 친절과 사랑을 베풀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갑자기 친구 녀석 하나가 생각이 났다. 집에 자주 오는 고양이가 있어 밥도 주고 놀아줬는데, 어느 날 아침 눈을 뜨니 그 고양이가 쥐를 물어다가 머리맡에 놔둔 채 초롱초롱한 눈으로 자기를 쳐다보더라고.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혹시 고양이가 실망하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에 눈물을 머금고 그 쥐의 꼬리를 들고 머리를 뒤로 젖혀 먹는 시늉을 했더란다.
나는 동물들을 통해서 인간을 본다. 세상에 절대적으로 선(善) 한 존재가 있겠냐 만은, 조금 달리 말해 악(惡) 하지 않은 존재가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동물일 것이이다. 그들은 악의를 갖고 행동하는 일이 없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일도, 그래서 복수를 하는 일도 없다. 다만 사랑한다. 그저 자신을, 또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를 위해 방어할 뿐이다. 악함을 모르는 동물들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 속에서 인간 군상의 갖가지 부류를 본다.
화단 고양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고양이들의 식량 때문에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리고 먹을 것을 주면 자꾸 새끼를 낳는다는 이유로 급식대 설치를 반대했다. 다른 한편 남은 음식 찌꺼기를 고양이 밥이라고 급식대 주변에 놔두는 사람들도 있었다. 심지어 치킨을 배달시켜 먹고 그 포장 박스에 뼈를 담아 놔두고 고양이가 맛있게 먹길 바라는 사람들도 있었다. 결국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났다면 그것은 사람들 때문이지 고양이 때문이 아니었다. 고양이는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결코 가까이 오지 않는다. 심지어 피해 다닌다. 매우 조용한 걸음으로. 가끔은 숨은그림찾기 하듯 애써 찾아야지만 화단에 고양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정도다. 새끼를 낳더라도 꽁꽁 숨겨 놓는다. 새끼를 발견하고 호들갑을 떠는 것은 도리어 인간들이다. 새끼들은 금방 성체가 되고 여기저기 흩어져 독립한다. 고양이가 한곳에서 점점 늘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실제로 화단에는 고양이가 바글대지 않는다. 어른이 된 고양이들이 가끔 밥을 먹으러 오갈 뿐이다. 나는 이 글에서 고양이가 우리 삶에 얼마나 유익한 존재인지를 설파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저, 고양이는 ‘나쁘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나쁜 생각을 하는 것은 사람들이다.
다행인 것은 우리 동네에는 여기저기 활발하게 운영되는 고양이 급식소가 꽤나 여러 곳이라는 점이다. 고양이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급식소를 치워버릴 만큼 매정하지는 않다는 것이리라.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그 자체로 무한한 우주를 품고 있다. 그들 또한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내는 존재가 아닌가! 고양이들도 우리와 똑같이 생각하고, 소통하고, 꿈꾸고, 사랑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생명 그 자체가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단지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것이 다른 생명을 지배할 수 있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생명이란 무엇이 더 좋고 나은 것이라 판단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모든 생명은 더불어 살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고양이는 우리에게 기대고, 우리는 고양이에게 기대어 살도록, 나는 세상이 처음부터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라 믿는다. 그렇지 않고서는 내가 고양이로부터 받은 위로와 깨달음을 어떻게 설명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 동네의 고양이들이 좀 더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특히 그들의 삶을 위협하는 것들이 조금씩 사라지기를 바란다. 골목이나 아파트 내 도로를 쌩쌩 달리는 차들, 거리에 깨져있는 유리조각처럼 상처를 입힐 수 있는 날카로운 장애물들, 무엇보다 그들이 ‘나쁘다’고 오해하는 사람들의 각박한 마음. 이 모든 것들은 결국 우리 인간을 위협하는 것이기도 하기에. 나는 이것들이 조금씩 사라질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또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