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그야말로 노래에 푹 빠져 살았다.
장르를 가리지 않았고, 딱히 하고 싶은 음악도 없었기 때문에 여기저기 보컬이 필요한 곳엔 부지런히 불려다녔다.
반주 음원이 아닌 악기와 함께 합주하는 일은 신세계였다. 정해진 바탕 위에서 ‘나만 잘하면 되는’ 노래와는 완전히 달랐다. 모두가 잘해야 했는데, 하필 내가 제일 못했다. 내가 가진 것은 겨우 목소리 뿐이었다. 악기 연주하는 친구들이 사용하는 음악용어의 대부분을 알아들을 수 없었고, 심지어 보컬 친구들이 발성이나 호흡에 대해 이야기하는 내용도 낯선 세계였다.
그나마 흉내내는 것엔 자신이 있었다.
어떤 노래든 여러 번 따라 부르면 비슷한 느낌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귀가 좋았던 것 같다. 영어발음도 나쁘지 않게 따라할 수 있었으며, 비록 어려운 용어는 알지 못했지만 ‘모창’을 열심히 한 덕분에 다양한 발성 방법을 연구할 수 있었다.
난 요즘도 학생들에게 모창을 해보라고 권유한다. 결과적으로 원 가수와 목소리가 똑같은지 아닌지는 중요한 게 아니고, 목표한 소리를 내는 과정에서 어떤 부분의 공명이 필요한지, 후두부와 성대의 움직임이, 또 호흡과 비브라토가 어떻게 사용되어야 하는지를 연구할 수가 있다.
어느새 노래 잘 하는 아이로 소문이 나고 있었다.
부르는 곳이 많아졌다. 원도 없이 노래를 부르고 졸업할 무렵엔 학원에서 오디션을 보러가라는 공지가 내려왔다.
당시의 나는, 아니 서른이 될 무렵까지도 누군가 시키는 일은 별 다른 생각없이 그저 열심히 하는 순종적(?)인 인간이었다. 무슨 오디션인지도 모르는 채, 그냥 나에게 시키는 일이니 당연히 해야된다는 생각으로 갔다. 녹음실 같은 곳이었던 것 같은데, 당시 연습하고 있던 <This Masquerade>를 불렀다. 만족스럽게 부르진 못했던 것 같은데, 그 회사에서는 나에게 관심을 보였다.
이 장면에서는 특히 내 목소리가 마음에 든다며 영어를 섞어 쓰며 흥분하던 한 사람이 꼭 떠오르는데, 그 회사의 프로듀서이자 소속 아티스트였던 트럼페터 이주한 선생님이셨다. 나는 춘천가는 기차의 영어 발라드 버전을 녹음하게 되었는데, 그게 누보송(nouveau son)이라는 이름의 음반의 수록곡이라는 것은 녹음을 다 하고 한참 후에 알았던 것 같다.
과정이 세세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이 음반을 녹음하면서 회사와 전속 계약을 했던 것 같다. 누보송 이후에 내 음반을 낸다는 계획이었다. 무턱대고 계약을 할 수는 없었고, 부모님의 도움을 받아 여기저기 조언을 받고 고심해서 싸인을 했던 것 같다.
스무살의 나는 알리시아 키스나 로린 힐 같은 알앤비, 소울 음악에 푹 빠져 있었기 때문에, 그들과 같은 음악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회사의 계획은 노라 존스 같은 대중적인 재즈 가수를 만드는 것이었다. 불행히도 당시의 나는 노라 존스에는 큰 매력을 못 느끼고 있었는데, 단순히 ‘지르는’ 소리를 쓰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난 무대에서 누구보다 큰 소리로 고음을 질러내고 싶었다. 그게 나의 매력이라 생각했다. 그때의 나는 뮤지션이라기보다는 그냥 ‘소리꾼’이었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 때도 알았더라면. 누구나 그렇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