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이력서

경력을 무기로

by 남연

다시 운 좋게 취업이 된다고 하더라도

내 작업물로 또다시 평가받을 생각을 하니 이력서를 쓸 수가 없었다.


디자이너로 취업을 하면

당연히 업무를 받고, 작업을 하고, 그 결과물로 평가받는다.

머리로는 너무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 과정 자체가 두려워졌다.


그래도 취업은 해야 했고, 전공을 살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다 문득 스물한 살부터 약 5년 동안 학원에서 일해왔던 내 경력을 살릴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스무 살이 되던 해,

아무 생각 없이 올리브영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일이 힘들어서라기보다는 점장님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로 결국 일을 그만두게 됐다.


그 일을 계기로 막연하게 서비스직에서는 더 이상 일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자연스럽게 학원 아르바이트로 눈길을 돌렸다.

그러다 운 좋게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영어학원에서 일할 수 있게 되었지만,

개인적인 사정으로 1년을 채우지 못하고 그만두게 됐다.


그런데도 그 짧은 경력은 이후 내가 계속해서 학원에서 일할 수 있게 만들어줬다.

다음 아르바이트를 구할 때는 중학생을 대상으로 한 영어학원에 비교적 쉽게 들어갔고, 그곳에서만 3년 반이 넘는 시간을 일했다.


처음에는 학생들을 관리하는 조교 역할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원장 선생님의 신뢰를 얻게 됐고

학생들의 간단한 질문을 받아주거나, 교재를 검수하고, 단어 시험지를 만들고, 학원 행정과 관련된 업무까지 조금씩 맡게 되었다.


비록 아르바이트였고 대형 학원은 아니었지만, 교육열이 높은 지역에서 성적이 좋은 학생들이 시험을 보고 들어오는 학원이었기에 그곳에서 보낸 3년 반이라는 시간은 나에게 나름 의미 있는 이력 한 줄이 되었다.

그 경험 덕분에 사정상 영어학원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다른 일을 구해야 했을 때도,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대형 국어학원에 비교적 수월하게 들어갈 수 있었다.


이 모든 경력을 어떻게든 살려보고 싶어졌다.


학원에서 일한 경력을 살려 취업을 준비하되,

디자인을 주 업무로 삼지 않더라도 그동안 배운 것을 완전히 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디자인을 ‘활용할 수 있는’ 업무를 중심으로 다시 회사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교육 계열 회사로 방향을 틀고 보니,

디자인을 할 줄 안다는 사실만으로도 내가 꽤 괜찮은 무기를 가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학원에서 일했던 경험을 전면에 내세우고,

1년 반 동안 배운 디자인과 그 과정에서 만든 작업물들을 포트폴리오로 정리해 교육 계열 회사들에 이력서를 넣기 시작했다.


막막해서 눈물만 나던 상황이 조금씩 풀릴 수 있을 것 같았고,

디자인 직무로 지원할 때보다 더 큰 규모의 회사, 익히 이름을 들어본 회사들에도 지원할 수 있다는 사실이 나에게 조금씩 용기를 주었다.


그렇게 다시 이력서를 넣기 시작했고,

지원한 지 일주일쯤 지났을 무렵,

내 기대보다 훨씬 괜찮은 회사들에서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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