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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난지 Jun 03. 2021

<순정만화>, 우리의 욕망이 조우하는 공간

<순정만화>, 우리의 욕망이 조우하는 공간


몇 년 전, 우리 대학의 만화도서관에서 개최하는 순정만화 계보에 대한 심포지움을 맡은 적 있다. 내가 맡은 주제는 2000년대 이후, 웹툰 시대의 순정만화였고 195,60년대부터 시작된 순정만화의 특성을 2000년대의 웹툰에서 파악해야 했다. 주제에 맞춰 고민하다 보니 친숙하고 애정 어린 단어였던 ‘순정만화’라는 용어가 오늘날의 웹툰에도 여전히 유효한지 의문이 생겼다. ‘순하고 정감 있다’는 뜻의 이 단어는 한국전쟁 이후 고아가 된 여자 어린아이의 고생담을 그린 작품에서 사용되었다. 사회가 준 시련과 고통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여자아이가 가져야 할 태도가 곧 ‘순정’이었고 특정한 시대가 원하는 여아의 상(像)이 반영된 단어다. 여아가 주인공이었으니 여성 독자들의 이야기로 받아 들여졌고 이렇게 순정은 여성들의 것이 되었다. 순정의 이름 붙여진 당시를 돌이켜보니 우리 세대의 젊음과 정신을 지배했던 순정만화의 의미와는 어쩐지 맞지 않아 불편했다. 답을 내리지 못한 채 여러 날을 고민하다가, 여성 작가와 여성 독자의 ‘욕망’이 60여 년의 세월을 관통하는 ‘순정만화’의 공통 모티브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시대별로 여성 작가들의 작품은 여성 독자들의 욕망을 대신 채워주는 역할을 해왔다. 독자의 입장에서 작가는 독자의 욕망을 채워주기 위해 만화를 만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반면 작가의 입장에서 살펴보면, 작품은 작가 욕망의 실현체다. 작가들은 작가 나름의 목적과 목표, 하고 싶은 말들이 있어서 작품을 만들었고, 독자들은 자신의 이야기로 해석한 것이다. 두 가지가 잘 맞아떨어질 때 시대를 대표하는 작품이 탄생한다. 나는 순정만화가 나에게 준 가치들을 되새기며 독자의 욕망을 대신 실현해 준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순정만화를 통해 여성으로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져야 할 가치와 태도를 배워나갔기 때문이다. 그 가치와 태도는 ‘순정’이라는 단어가 붙여졌을 시작점의 의미와는 매우 달랐기에 불편함을 느낀 것이었다.      


그럼에도 순정만화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있다. 그 단어의 탄생 맥락이나 의미는 여성들의 것이 아니었지만, 서서히 여성들의 욕망이 투영되었기 때문이다. 신일숙 작가는 1993년 한국만화가협회지 <만화 동네>에서 “순정만화는 우리들이 많은 불이익과 멸시를 받아가며 가꾼 순정만화가들만의 화단”이라 밝혔다. 여성 만화가들은 사회에서 떠안긴 여성성이란 편견에서 자유로울 순 없었기에 종종 불합리한 평가를 받았다. 사랑 소재의 신데렐라 스토리, 이야기의 구조 없이 감성적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려 했기에 기존의 순정만화 공식을 깨는 작품을 만든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순정만화의 센세이션을 일으킨 1980년대의 신일숙, 김진, 김혜린, 강경옥 등의 만화에는 주어진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어 울어버리거나 순응하는 근대적 여성에서 탈피하여 자신의 질서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의지가 넘치는 현대적 여성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작가들이 살았던 시대의 한계가 작용했던 것인지 주인공들이 원하는 세계에 도달했다고는 볼 수 없는 비극적 결말이 나타나기도 한다(<아르미안의 네 딸들>의 샤르휘나, <별빛속에>의 유신혜(혼 시이라젠느), <비천무>의 설리). 여성들의 욕망이 해피엔딩을 맞이하지 못한 채 1990년대 중반부터는 다양하고 개성이 뚜렷한 캐릭터들의 순정만화가, 2010년대에는 다시 1980년대 여성 작가들의 작품들처럼, ‘분노’와 ‘도전’이 드러나는 웹툰이 나타난다. 그러고 보면, 순정만화의 단어가 어떻든 간에 작가들의 욕망을 통해 지켜보면 유사한 흐름과 계보가 보인다. 이 발견을 통해 연구자로서 기쁨보다는 여성으로서의 안타까움이 먼저 밀려왔다. 1949년 시몬 드 보부아르가 <제2의 성>에서 “페미니즘 논쟁에 대해서는 이미 쓸 만큼 썼고, 이제는 사실상 끝났으며 더 이상 거기에 대해 할 말이 없다”고 했지만 결코 끝나지 않은 것처럼, 그때의 강한 반동과 움직임 속에서 거대한 욕망을 성취하지 못한 채로 개별화된 것이 아쉽게 느껴지기도 한다.      


여기까지 1980년대의 순정만화에 치중해서 이야기했지만, 정작 내가 순정만화에 흠뻑 빠져 학창시절을 보냈던 건 1990년대다. 나의 현재와 미래를 1990년대의 순정만화가 열어주었다면, 현재와 미래를 뒷받침해줄 든든한 배경이 되어준 것이 1980년대의 순정만화다. <아르미안의 네 딸들>의 샤르휘나가 어린 여자아이에서 당당히 아르미안의 레마누로 성장해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가질 수 있는 꿈의 너비를 마음껏 확장 시켰다. <비천무>에서는 시대의 역경 속에서도 의지를 꺽지 않는 캐릭터들의 용기와 담대함을 봤고, <별빛 속에>는 나의 존재를 더 넓은 세계(우주) 속에서 바라볼 수 있게 했다. <인어공주를 위하여>는 얽힌 관계의 상처에서 구원해낸 이슬비와 서지원의 사랑이 있었고, 그 이름만으로 우리의 판타지가 되었다. <호텔 아프리카>는 드넓은 아메리카 대륙의 각양각색 캐릭터들이 벌이는 갈등과 사랑, 용서와 화해를 통해 다층적인 관계를 가르쳐줬고, <크레이지 러브스토리>에서는 경직된 사회에서 탈출구를 찾는 캐릭터를 통해 일탈의 즐거움을 느꼈다. <언플러그드 보이>에서는 동등한 관계의 귀여운 사랑을 봤다. <쿨핫>, <그린빌에서 만나요>는 성장통을 이겨내는 방법을 알려줬다.      


돌이켜보면 그때의 나는, 나로서 살고 싶은데 그것이 왜 이렇게 어려운지 고민하며 불안했다. 싫은 것들이 많지만 시대가 원하는 여성상이 되기 위해 “no”가 아닌 “yes”를 말해야 할지,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스스로 질문해야 했다. 이럴 때 순정만화는 길잡이가 되어주었다. 어쩌면 순정만화 작가들의 욕망은 사회 개혁, 새 시대의 도래와 같은 거대한 담론보다는 각자의 ‘욕망’이 조우하는 순간을 원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신일숙 작가가 순정만화계의 대표 만화가로 불릴 때도 “순정만화가요? 와- 굉장히 멋진 직업을 갖고 계시는군요!”하는 말을 듣고 싶다고 했던 것처럼. 사회에서 정한 ‘여성’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받고 싶은 욕망을 알아채 주기를 바랐던 것은 아닐까. 아직도 나는 삶이 팍팍할 때면 그 시절의 순정만화를 읽는다. 순정만화를 통해 답을 찾았던 기억을 추억하기 위해서. 순정만화가 내게 준 것은 내 삶을 내 욕망대로 만들어가도 괜찮다는 긍정과 희망이다. 


패션매거진 <하퍼스바자> 3월호에 실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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