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내가 꽃이라면

6월의 인왕산에서

by 레몬트리

하트모양의 잎이 이미 충분히 무성하고, 이미 충분히 커졌는데도

사이사이마다 새 잎이

거침없이 용감하게

반질반질 예쁘게도

화수분처럼 나고 또 난다.

사랑을 해보고, 안다고 생각했던 어느 날,

덥석, 내 마음에 다가왔던 그 마음이

내 마음 나도 몰라.

속수무책으로 커지고, 많아지고, 깊어지는

'겪어보지 못한 엄청난 감정이야'했던

그 어느 날의 나처럼 그렇게 "사랑은 화수분처럼"

원래 너의 이름을 알 수 없어도

오늘부터 내게 너의 이름은 "사랑은 화수분처럼"



좋아한다, 좋아하지 않는다, 좋아한다, 좋아하지 않는다.....

아슬아슬 숨죽이며 잎사귀 한 잎에

너의 마음을, 우리의 운명을 걸었던 그 간절함

그런데 오늘 보니 이 풀꽃은 마지막 잎이 무조건 홀수로 끝난다.


'좋아하지 않는다'로 시작하면 결국 '좋아하지 않는다'로 끝나버리지만,

'좋아한다'로 시작하면 끝내 '좋아한다'로 끝나게 만들어 놓은


희망은 절망을 기어코 이겨낸다는

하지만 인간의 마음이 어떠한가에 따라 시작도 결말도 달라진다는

친절하지만, 공평한 신의 섭리가 비밀처럼 숨겨진 풀



선명하기도 하다.

가던 길을 멈추고 고개를 떨구고 바라보니

산딸기가 봉우리에서 톡! 하고 나왔다.

곧 너도 나도 터지고 나올 것 같은 기특한 녀석들이 줄줄이.

6월의 인왕산은 산딸기가 주인공이었구나.

꽃들이 다 진 자리, 초록 잎들 사이에 지천으로 열매 맺은 산딸기

예쁘고 기특해서 눈에 담는데,

줄기에 가시가 뾰족뾰족 어라? 혹시? 하고 찾아보니

산딸기는 장미과란다.

6월의 장미가 지천에서 예쁨을 뽐내고 저버리는 동안

속에 열매 꽁꽁 품고, 꽃이 진 자리 빨간 탐스런 열매를 내어놓는 산딸기

꽃 중의 여왕이 장미라더니,

장미 중의 최고는 산딸기였네.

마지막 지는 모습까지 기특하고 고마운 산딸기가 되고 싶다.

너에게 내가 꽃이라면.



"내가 가야 할 길은 나는 잘 모르거든"

언젠가 그런 말을 했었다.

쉴 새 없이 날갯짓을 하는 나비 한 마리가

어디로 가야 할지. 어디로 가고 싶은지 모르고

한참을 고단한 날갯짓 하다

소박한 개망초 꽃잎에 살포시 앉았다.

지친 날갯짓, 짧은 시간이라도

이 순간만큼은 너에게 행복이길, 안식이길, 쉼이길.

나비야,

알고 있니? 개망초의 꽃말은 '순수한 마음' '기다림'

너는 우연처럼 내려앉았을지 몰라도

개망초는 꽃을 피울 때부터 너를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야.

"네가 가야 할 길을 몰라도, 네가 언제 올지 몰라도 나는 너를 응원해" 개망초의 마음을

부디, 기억해 주렴. 나비야.



누군가의 바람, 누군가의 추억, 누군가의 약속

인왕산 전기탑 아래로 그날의 우리를, 그날의 감정을 기억하고 싶은 이들의 염원이

빼곡하게도 붙어있다.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몰라도,

어릴 적 "철수가 영희를 좋아한데요" 화장실 벽 구석에 흔적을 남겼던 꼬마처럼

남산의 자물쇠처럼 다시 찾지 못할지라도 설렘을 가득 안고 서로의 약속을 남겼던 청춘들처럼

우리는 여전히 서로의 특별함을 흔적으로 남기고 싶어 한다.

사랑이란 그런 거겠지.

마음속을 꺼내놓고 보여줄 수 없으니

세상 어딘가에 어떻게라도 그 마음 표식을 남기고 싶은 마음

'너'라는 의미를 담으면 풀 한 포기, 돌멩이 하나도

새로운 의미 아니, 유일한 의미가 되는 기적




"이 터널 같은 시간을 얼마나 보내야 할지 몰라도 그다음엔.."


그다음엔?

끝없을 것 같은 터널도 끝은 있고, 끝없을 것 같은 오르막 길도 정상이 나오거든.

하지만 조심스레 기대해도 좋아.

깜깜한 터널을 이윽고 통과하면 그 빛이 더 눈부시게 환하고,

숨찬 오르막 길을 오르고 드디어 정상에 오르면 숨통이 트이는 하늘과 가까워져 있거든.

이 터널 같은 시간.

숨죽여 울지 말고, 그저 고요히 기도하며,

알 속에 아기새가 깨어나는 그날을 꿈꾸는 것처럼.

어둠 속에서조차 함께 행복하자.

희망을 품고, 서로를 품고

고요하게 따뜻하게




6월의 인왕산은 습기를 가득 머금고 있다.

눈물이 슬플 때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기쁠 때도 나는 것처럼

땀도 햇빛만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햇빛 하나 없이 잔뜩 낀 구름이 만들어 내기도 한다.


하늘에 물기 머금은 솜뭉치를 머리에 잔뜩이고서,

온 세상을 쥐고 비틀어 물기를 짜내듯.

오늘은 땀이 나고, 내일은 비가 내리겠지만,

그렇게 짜내고, 쏟아내고 나면

다시 화창한 날 오겠지.

하늘도, 내 마음도.







덧)
달력을 보니 6월이 딱 하루 남았지 뭐예요
조금 늘어지고 싶은 마음을 이겨내고, 다녀왔습니다 인왕산
정말 신기하지 않아요?
매달 다음 달엔 이제 쓸 말이 없겠다 싶은데,
새로운 걸 매달 쏟아내 주는 나에게 애틋한 곳
사진으로 담지 못한 풀벌레 소리가 여름을 알리듯, 가득하고,
다음 달엔 모기 조심해야겠다. 하며 장마 기운이 주는 습습한 기운으로
땀 한번 제대로 내고, 집에 와서 씻고 쭈쭈바 하나 입에 무니, 이것이 지상낙원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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