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 전 일기, 외할머니를 보내드리며
며칠 동안 목감기로 약을 안 먹으면 목이 너무 아프고, 약을 먹으면 병든 닭 신세여서
엄마아빠 걱정하실까 봐
연락을 안 했는데 엄마한테 카톡이 왔다.
감기에 걸려서 평소 하던 연락이 좀 뜸했을 뿐인데도 멀리 계시니까
혹시나 내가 또 혼자 맘고생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시니,
이러니 평소의 나는 더더욱 힘든 티를 낼 수가 없다. 가족들 앞에선
엄마가 보낸 어제 카톡을 보니
어, 10월 말엔 엄마의 엄마, 나의 외할머니의 기일이 돌아온다는 게 생각났다.
2018년 10월 24일,
지금으로부터 6년 전, 마흔도 안된 30대의 끝자락에 내가 쓴 일기
(나는 삼십 대 후반이었고, 아기새는 겨우 아홉 살 때였네)
갑자기 이 날 썼던 일기가 다시 꺼내보고 싶어 져서, 옮겨본다.
외할머니께서 92년 생을 마감하시고 천국으로 가셨다.
고령이시고. 꽤 오래 병환 중이셔서 마음의 준비를 했다 해도
자손들은 막상 그 순간이 되면 꿈인 것 같기도 하고. 잘 믿기지가 않는 듯.
내려갈 준비를 하는 내내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또 애 엄마가 되고도
만나면 "아이고 귀한 내 사람" 하면서
안아주고 쓰다듬어주시던 할머니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맴도는 듯.
#1. 엄마
엄마는 2남 3녀 중 막내딸이셨는데
엄마 밑으로 남동생이 둘이나 태어나서
옛말로는 터를 잘 팔아서 아들 낳게 해 준 딸이라며 부모님께 사랑받았고.
언니들과 나이터울도 제법 나서, 나이가 들어도 외가 모임 때 보면
여전한 막. 내. 딸인데.
장례기간 내내 괜찮다가도
울컥하는 기억이 계속 나는지 많이 우셨다.
그래도 할머니가 병환이 있으신 후엔
큰 외삼촌과 엄마가 가까이 살아서
할머니 병원도 딸들 중에 가장 자주 다니고 했는데도.
마지막엔 못다 한 것만 생각이 나는지... 하염없이 우신다.
누구나 유한한 삶을 살고
최선을 다하고 있노라 하지만
죽음 앞에선 속수무책인 우리네 인생을 보니.
무엇보다 가족들에게. 사랑하는 이에게
아낌없이 표현하고 나의 시간을 나누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2. 나
이사를 하더라도 어릴 때부터 살던 동네 범위를
벗어나지 않고 부모님이 아직 살고 계셔서
이웃어른들. 교회어른들이 장례식장에도 많이 오셨는데
나의 이혼을 모르시는 분들도 많아서
꽤나 오랜만에 질문세례를 받으며 난감해진다.
남편질문 사절이건만..ㅎㅎ
어색한 미소만 쩜쩜 ㅎ
그나마 아기새를 보며 엄마와 똑 닮았네 말로 자연스레 화제가 재빨리 넘어가는 게 다행.
사실 이 정도 팩트공격에 쓰러질 이혼 4년 차는 아니니
자연스레 순간순간 넘겼으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장면은 따로 있었으니..
그건
상주역할을 함께하고 있는 아빠나 이모부들을 뵈니
문득 내가 이대로 계속 살다가는
우리 부모님 돌아가실 땐 내 옆자리 비어있어
든든한 큰 사위 없이 혹여나 쓸쓸하진 않을까.
열심히 동분서주하고 계신 아빠나 이모부들을 보니
못난 자식 이혼으로 상처드린 것도 죄송한데
혹시나 빈 옆자리로 든든히 지켜드리지 못할까 봐...
상처 난 살에 바닷물이 닿을 때처럼
마음이 조금, 아니 꽤 많이. 따끔거린다.
#3. 딸
아기새는 외할머니 입장에선 막내딸의 딸의 딸.
-증손녀
손자손녀도 많고, 증손자증손녀도 이미 많으시지만
그중 막내인 아기새
친척들이 이렇게 많이 한꺼번에 모인건
아기새 기억 속에선 첨이라
여기저기 어른들과 인사하느라 바빴다.
마냥 귀여워해주시는 친척들 사이에서
장례식이라 해도 아직 해맑은 아기새를 보니 아이는 아이네 싶다가도..
아이고. 내 딸은 외동이라
증조할머니나 할머니의 장례식과는 다르게
그 먼 훗날의
내 장례식엔 세상에 딸랑 혼자 남겨진 것같이
쓸쓸하고 슬프겠구나 생각이 들면서
짠하고 안쓰럽네.
지금처럼의 장례는 아마 우리 세대가 마지막이지 않을까
나 죽을 땐 세상이 바뀌어서 막연해도 다른 방법 아닐까. 라며
애써 쿨한 척 생각해보려 해도 마음이 울컥한다.
형제자매가 있는 나와는 다른 느낌일 것 같은.
세상에 혼자 남은 것 같은.
그 쓸쓸한 마음이
이미 벌써 눈에 마음에 밟히는 부모마음.
아마 그런 마음으로
임종 가까이에서 할머니도
자식들을 마지막으로 마주할 무렵,
목소리만 겨우 들으실 수 있는 상황인데도
자식들 목소리를 들으며 눈물 지으셨겠지...
가족의 장례는 어릴 때 이외에
어른이 되고 나선 처음이나 마찬가지였기에.
빈소를 지키며 생각이 많아졌다...
나의 삶도 이미
이제는 삶과 죽음의 가운데서
늙어감으로 죽음에 더 가까워지는 나이가 되어가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으며.
그렇기에
조금 더 가치 있게.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욕심을 내어본다.
(2018.10.24 할머니를 보내드리고 쓴 일기)
30대의 나는 애 같은데도 나름 많은 생각을 했었구나,,,
이혼 앞에 빨리 철들었나 조금 짠하기도 하고?
나는 그때 한 다짐대로 가치 있게,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나?
여전히 고민하고, 망설이고, 때론 후회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의 좌우명대로 "천천히 그러나 앞으로" 가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난 엄마를 걱정시키는 딸이고,
엄마 노릇을 하느라 정작 내 엄마에겐 소홀한 날이 더 많은 못난 딸이네.
엄마인 나도 엄마가 보고 싶어 지는 날이 있는데
우리 엄마도 매년 10월이 되면 떠나보내드린 엄마의 엄마, 외할머니 생각이 많이 나시겠지.
빨리 목소리를 되찾아 전화드려야겠다.
그리고 부산에도 추워지기 전에 다녀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