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편지
봉별기님
머리망 핀이 보급품이냐고 물었던 주변 남군들 말에 난감하셨다구요. 재밌어요. 우리가 보기엔 모두 다른 리본 두께와 길이, 그 각각의 풍성함. 멋부리고 싶을 땐 큐빅까지 촘촘히 달린 핀으로 고르는 거 우리끼리만 알죠. 그런 망핀이 어떻게 보급이 되나요.
제가 후보생 때도 여자 후보생을 처음 후배로 받은 남자 선배들이 물었어요. 스커트 단복에 착용하는 스타킹 그거 보급이냐고요. 이런 걸 보면 같은 조직 구성원임에도 여군에게는 어떤 특별한 것이 제공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내돈내산 망핀과 스타킹, 예쁘고 편하면 말도 안해요. 전투력과는 상관없는 것들이 빨리 사라지면 좋겠어요. 자잘하게 돈도 많이 드는데. 아니 애초에 군인한테 왜 스커트를 입히는 거에요?
‘두렵고 무서웠던 기억은 늘 마음 한켠에 서늘하게’란 지난 편지의 제목을 보고 가슴이 내려앉았어요. 첫 발령지인 강원도 인제에서 복무한 2년 반 정도의 시간, 제 마음도 내내 그랬거든요. 가족도 친구도 없는 먼 곳에서 내가 선택한 길이라는 이유 하나로 셀프 유배생활을 했었죠. 모든 군인이 그렇겠지만 여군 소위였기 때문에 외롭고 서러운 적이 많았어요.
언젠가 봉별기님이 군 생활동안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죠. 지나고 보니 그냥 그곳에 간 것, 거기서 만난 사람들... 모든 게 잘못된 거 같아요. 과거로 돌아가 바꾸려고 해도 바꿀 수 없는, 제 의지와는 다르게 벌어졌던 일들이요.
저는 대대에서 근무하는 남군 동기들과는 다르게 사단사령부에서 근무하게 됐어요. 교육성적이 좋았고 장기복무를 희망했기 때문에 부서에서 저를 선택했다고 생각했죠.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원래 가기로 정해졌던 부대 지휘관이 여군을 못 받겠다고 했대요.
전투병과 소대장, 중대장도 아니고 병사들 교육하는 게 일인 행정병과 장교가 뭐 그렇게 부담이 됐을까요. 후에 그분은 장군이 되어 사단장으로 근무하셨더군요. 여군 소위 한 명도 부담스러워 거절한 분이 ‘양성평등’을 강조하는 군 조직에서 어떻게 승승장구하셨을까요. 여전히 여군들을 부하로 인정하지 않으실까요. 어쨌든 저는 여군 중령이 부서장으로 근무하는 부대에 가게 됩니다.
봉별기님도 많이 들어보셨죠? 여군 훈육관들, 선배들에게 “너희는 여자가 아니라 군인이야!”라는 말이요. 곰곰 생각해봤어요. 남군에게 “남자가 아니라 군인이야!”하고 윽박지르는 사람은 없어요. 또 반대로 엄마처럼, 누나처럼 따뜻하고 섬세한 리더십을 발휘하라는 상관들도 있었어요. 여자였다가 남자였다가, 군인인 동시에 누나까지... 여군에게 바라는 게 왜 이렇게 많을까요.
또 어떤 사람들은 여군을 여자로 보고, 본인에게 여자이길 원하죠. 여군 소위와 여군 하사들이 얼마나 만만하게 여겨지는지, 또 얼마나 쉽게 휘두를 수 있는 존재인지 우리는 너무 잘 알아요. 꿈을 펼치기 위해 당당히 들어온 군대에서 사소하고 잦은 일로 좌절하게 되는 순간들을.
첫 부대에 전입해서 2박 3일 산악행군을 하는데 남군 하사, 중사들이 제 군장을 대신 메려고 하더라구요. 그때 느꼈어요. 이 사람들은 내가 자기들처럼 사격도 화생방도, 각개전투 훈련도 받은 군인으로 생각하지 않는구나, 이 사람들에게 나는 그냥 여자구나, 하고요. 내 군장을 내 힘으로 지켜야 할 때, 그런 당연한 일을 오기로 해야할 때 힘 빠지죠.
여러 부대에 정신교육을 다녀오면, 주말에 GOP를 순찰하고 복귀하면 다른 부대 동기들에게 연락이 와 있어요. 부대의 누군가가 낯선 여군 소위를 보고 소개를 부탁한 거죠. 그럴 때마다 단상 앞 정신교육 교관인 내가, 방탄 헬멧을 쓰고 철책선을 걷는 군인인 내가 지워지는 듯 했어요.
저를 여자로 본 건 남군들만이 아녜요. 20년 위 선배인 여군 부서장은 저를 부하나 부서원으로 여긴다기보다는 사무실 여직원처럼 대했습니다. 옛날 드라마에 나오는 전형적인, 손님 오면 커피 타고 과일 깎는 그런 ‘미스 신’이요. 아직도 잊혀지지 않아요. 월간 업무를 마감하고 있던 제게 과일을 깎아오라던 그 말. 그리고 그 자리에 있던 담당관과 병사들이 경악하던 표정.
그런 날 숙소로 돌아오면... 아무 말도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어요. 강원도의 그 밤은 어찌나 캄캄하고 깊은지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것 같았죠. 내가 이러려고 그 모든 훈련과정을 견뎠나? 숙소 앞에 흐르는 내린천을 하염없이 바라만 보고 있었어요. 가족, 친구, 애인 그 누구에게도 고민을 나눌 수 없었어요. 내가 선택해서 내 발로 걸어들어온 군대니까요. 지친다고 외롭다고 얘기하는 것보다 저 강물에 몸을 던지는 게 더 쉽다고 생각했어요. 그때 행동으로 옮기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지만요.
봉별기님은 공군 기지에 근무하며 외로울 때 어떻게 보내셨나요? 육군 부대에 비하면 불빛도 사람도 많아서 고독하기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이제 봉별기님도 저도 마음 여린 하사, 소위 시절을 지나 훈육관을 할 정도의 짬(ㅎㅎ)이잖아요? 만약 군대를 선택하는 여성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무엇인지, 또 다시 선택한다면 어떤 병과를 선택하실 건지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