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어디에도 없는 그 맛
나는 6살 때부터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할머니와 단 둘이 살았다.
나는 유달리 아침잠이 많았는데 할머니는 아침밥을 먹지 않으면 학교에 가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 아침마다 졸린 눈을 비비며 밥을 꾸역꾸역 욱여넣었다.
할머니가 싸 주신 도시락은 투박했다. 달걀을 입혀 구운 햄과 김치가 단골 반찬이었다. 정성보다는 간단한 것이 우선인 도시락이었고, 나는 점심시간에 친구들 앞에서 도시락을 꺼낼 때 왠지 좀 부끄러웠다.
소풍 날도 마찬가지였다. 할머니의 김밥은 다른 재료보다 밥이 더 많이 들어간, 싱겁고 배만 부른 김밥이었다. 친구들의 화려하고 맛있어 보이는 김밥에 비해 어딘지 초라해 보이는 할머니의 김밥을 내놓기 부끄러웠다. 그래서 나는 소풍 날을 좋아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도시락 반찬 때문이 아니라 할머니가 싸 주셨기 때문에 부끄러워했던 것 같다. 엄마가 싸 준 도시락이나 김밥이 아니라는 사실이 나를 주눅 들게 했고, 그 내용물이 더 초라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기숙사 생활을 하며 처음으로 할머니 품을 떠났다. 식당 밥은 형편없었지만, 이제껏 먹어 보지 못했던 다른 음식들이 나의 미각을 자극했다. 친구들과 용돈을 모아 한 번씩 사 먹었던 해물칼국수, 야식으로 몰래 배달시켜 먹었던 순대볶음, 내 생일날 점심시간에 학교 담장을 몰래 넘고 나가 친구가 사 주었던 갈비탕, 주말에 삼촌이 기숙사 앞까지 데려다주고 친구들과 함께 먹으라고 사 주셨던 피자.
중학교 때까지 주로 할머니가 해 주신 집밥만 먹던 나는, 세상에 이렇게도 맛있는 음식들이 많다는 사실을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대학생이 되고 서울에서 자취를 하게 된 후에는, 한층 더 세련된 음식들에 눈을 뜨게 되었다. 각종 소스와 재료들로 버무려져 저마다의 맛을 자랑하는 스파게티, 이제껏 내가 먹던 피자와는 차원이 다른 얇고 담백한 이탈리안 피자, 문지르면 램프의 요정 지니가 튀어나올 것만 같은 그릇에 담긴 인도 카레, 바삭한 식감에 톡 쏘는 겨자맛이 감도는 소스가 곁들여진 일본식 돈가스.
맛없는 학식에 질릴 때면, 학교 주변에 즐비한 음식점들에서 위에 나열한 음식들을 번갈아가며 찾아먹었다.
그렇게 20대의 나는 촌스러운 할머니의 집밥을 기억에서 지우고, 그 자리를 각국에서 온 세련되고 맛있는 음식들로 채워나갔다.
방학이 되어 할머니 집에 가면, 할머니는 내가 좋아했던 음식들을 해 놓고 기다리셨다. 하지만 나는 그 음식들이 달갑지 않았다. 무엇보다 할머니가 담아 주는 고봉밥이 부담스러웠다. 외지에서 잘 못 먹고 지냈을 손녀를 위해 할머니는 장정이나 먹을 만한 고봉밥을 담아 주시고는, 남기면 왜 이렇게 못 먹냐고 잔소리를 했다. 나는 그 잔소리가 듣기 싫어 억지로 밥을 밀어 넣었다. 내 위가 도저히 못 버티는 날에는,
"더는 못 먹겠다고!!"
하며 짜증을 냈다. 그렇게 고봉밥을 주고도 돌아서면 과일을 내오고, 자기 전에는 또 출출하지 않냐며 식혜를 내오셨다. 안 먹으면 한소리 들을 게 뻔하기에 나는 부대끼는 위를 쓸어내리며 또 꾸역꾸역 먹을 수밖에 없었다.
시장에 다녀오실 때면 어릴 적 내가 잘 먹었던 양념통닭을 꼭 사 오셔서 따뜻할 때 어서 먹으라고 꺼내 놓으셨다. 몇 조각 먹고 있으면 또 밥을 내오신다.
"방금 통닭 먹었는데 무슨 밥을 또 먹어?"
라고 황당해하는 나에게, 할머니는 통닭이 무슨 밥이냐고 얼른 먹으라고 하셨다.
할머니 집에 머무르는 며칠간은 말 그대로 사육을 당하는 기분이었다. 먹고 또 먹고 또 먹어야 했다.
나는 이제 하루에 네 끼씩 먹어치우던 성장기 소녀가 아닌데, 할머니의 기억 속에 있는 나는 여전히 먹성 좋은 10대 소녀였다 보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는 일본으로 유학을 왔고, 13년째 일본에서 살고 있다.
기숙사로, 서울로, 그리고 일본으로, 나는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할머니 품에서 멀어져 갔다. 그만큼 할머니의 집밥을 먹는 횟수도 줄어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갈수록 할머니가 해 주시던 집밥에 대한 기억이 또렷해진다. 그저 달다거나 맵다거나 얼큰하다거나 그런 단어들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그 맛이 내 감각 속에 살아 숨 쉬고 있음을 느낀다.
할머니의 집밥 하면 떠오르는 음식들이 몇 가지 있다.
경상도식 얼큰한 콩나물국, 꽃게 된장찌개, 추어탕, 사골국, 밥국, 늙은 호박전 그리고 떡볶이.
할머니는, 콩나물과 무와 파와 마늘이 듬뿍 들어간 얼큰한 국을 자주 끓여주셨다. 건더기를 좀 건져먹다가 국물에 밥을 말아 후루룩 삼키면 속이 따끈하고 든든해지곤 했다. 나는 그것이 경상도에서만 먹는 콩나물국이라는 것을 한참 뒤에 알게 되었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밥을 말아 살짝 걸쭉해진 국물의 마지막 맛이 혀끝을 감도는 것 같다.
꽃게 철이 되면, 할머니는 속이 꽉 찬 꽃게를 두 토막 내고 호박을 성큼성큼 썰어 넣고 된장찌개를 끓여 주셨다. 꽃게의 감칠맛이 우러난 국물도 일품이었지만, 제철 맞은 꽃게의 살 맛은 달큰하기 그지없어 젓가락으로 열심히 쑤셔가며 꽃게 살을 발라먹었다.
고모네 가족이 온다고 하면, 할머니는 며칠 전부터 이웃집 할아버지에게 부탁해 미꾸라지를 공수했다. 거품이 나도록 박박 씻은 미꾸라지를 솥에서 푹 삶아 으깨고, 시래기와 부추를 넣어 끓인 다음 다진 고추와 제피(산초)를 팍팍 넣어 먹던 추어탕을 당시에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제피의 강한 향이 거북하기도 했고, 채 으깨지지 않은 미꾸라지의 뼈가 씹히는 것이 싫어서 조심조심 입속에서 굴려가며 먹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귀한 줄 모르고 꺼려하던 그 음식이 어른이 된 어느 날 불현듯 먹고 싶어 졌다. 할머니는 더 이상 미꾸라지와 씨름할 기력이 없었기에 밖에서 사 먹을 수밖에 없었는데, 추어탕이 보양식이라는 것도 그때 알게 되었다. 사위가 올 때마다 할머니가 추어탕을 끓이셨던 이유도.
마산에서 정육점을 하는 큰 고모네는 겨울마다 사골뼈와 고기를 보내주셨고, 그 덕분에 나는 겨울 내내 삼시 세 끼를 사골국을 먹어야 했다. 식탁에는 항상 소금과 후추가 담긴 종지와 다진 파가 담긴 그릇이 놓여 있었다. 때때로 소금은 숟가락에 묻은 국물과 엉켜 딱딱하게 굳어 있었고, 다져놓은 지 한참 된 파는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지겹게 먹어서 살면서 더는 안 먹어도 될 줄 알았던 그 사골국이 나는 지금 몹시도 그립다. 일본에 있는 한국 음식점들은 여러 가지 메뉴를 놓고 장사하는 집이 많다 보니 대체로 맛이 그저 그렇다. 더욱이 사골국과 같은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은 아예 메뉴에도 없는 경우가 많고, 있다고 하더라고 조미료에 의존한 맛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아무리 먹고 싶어도 시키지 않는다. 한국에 가지 않는 이상 먹을 재간이 없다. 뼈를 사다가 끓이면 되겠지만, 그 조차도 일반적인 마트나 정육점에서도 잘 팔지 않는다. 제대로 된 사골국을 먹어본 지가 언제인지 까마득하다.
밭 일이 늦어져 저녁 시간이 빠듯한 날이면 할머니는,
"오늘은 밥국이나 해 묵자"
라고 하셨다. 할머니가 말하는 밥국은, 다진 쇠고기를 넣고 끓인 죽(이 죽의 이름이 쇠고기 장국죽이라는 사실은 나중에 요리책을 보고 알았다)이거나, 김치와 멸치를 넣고 끓인 김치 밥국이었다. 밥국 소리를 듣고 좋아하는 나를 보며 할머니는 미안하다는 듯,
"오늘은 쇠고기가 없어서 김치 밥국이다"
라고 하셨지만, 나는 어느 쪽도 좋았다. 고소하고 담백한 쇠고기 밥국도, 얼큰하고 시원한 김치 밥국도 나름대로의 맛이 있었다.
지금도 가끔씩 쇠고기 밥국을 해 먹는다(김치는 귀해서 못 먹는다). 비록 요리책에서 본 레시피로 끓인 쇠고기 장국죽이지만, 얼추 비슷한 맛에 만족하며 영양과 함께 마음의 안식을 얻는다.
어린 시절 최고의 간식은 뭐니 뭐니 해도 늙은 호박전이었다. 누렇고 커다란 호박을 갈라 씨를 제거하고 숟가락으로 속을 박박 긁어 밀가루에 버무리고 소금과 당원(사카린, 당시에는 많이들 쓰셨다)으로 간을 한 다음, 노릇하게 구워낸 호박전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별미였다. 사카린 특유의 쌉쌀한 단맛이 호박과 어우러져 꽤나 조화를 이루었던 호박전의 그 맛이 여전히 내 뇌리 속에 남아있다.
시골 사는 조카에게 신식 음식을 맛 보여주겠다고 삼촌이 야심 차게 사다 준 식어빠진 피자(내 생애 첫 피자)를 한 조각 입에 물고,
"호박전이 훨~~~씬 맛있다"
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그 호박전이야 말로, 할머니가 해 주신 이후로 어디에서도 먹어 본 적이 없다. 한국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일본에서는 늙은 호박은 구경도 할 수 없고, 어디서 구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한국에서도 늙은 호박전을 파는 곳을 본 적이 없는데, 이러다 죽을 때까지 다시는 못 먹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할머니가 자주 해주셨던 또 다른 간식은 떡볶이였다. 흔하디 흔한 음식이고, 일본에서도 재료들을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지만, 할머니가 해 주셨던 그 맛은 도저히 흉내 낼 수가 없다.
명절에 먹고 남은 절편과 밭에서 바로 뽑아 온 대파를 대강 썰어 넣고, 할머니가 직접 담근 고추장으로 만든 떡볶이. 그릇은커녕 프라이팬 그대로 냄비받침 위에 올려놓고, 쓰읍쓰읍 숨을 삼키며 맵고 뜨거운 그 음식을 젓가락으로 열심히도 집어 먹었다. 절편에서 나온 전분으로 걸쭉해진 국물을 대파의 파란 부분으로 쓱쓱 훑어 먹는 그 순간을 가장 좋아했다. 나는 지금도 떡볶이의 떡보다 채소를, 그중에서도 파를 좋아한다. 하지만, 마트에서 사 먹는 파에서는 그 맛이 나지 않는다.
할머니가 해 주신 떡볶이의 맛은 내 기억 속에 분명히 남아 있지만, 내가 가진 어떤 어휘로도 묘사가 불가능하다. 달았고, 매웠고, 걸쭉하고 찐득했다. 이렇게 밖에 표현이 안되는데 어느 누가 그 맛을 구현해 낼 수 있을까. 믿을 건 내 혀끝밖에 없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요리에 별 재주가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할머니의 고추장을 지금은 구할 수가 없다.
서른이 넘은 나에게 10대 소녀와 같은 먹성을 바라시던 나의 할머니는 몇 년 전에 돌아가셨다. 개인적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기에 거진 1년을 안부전화도 한 통 안 하고 있던 어느 날 갑자기 할머니의 부고를 들었다.
고등학교 때 처음 할머니 품을 떠났을 때는, 할머니가 너무도 그립고 애틋해 일주일에 한 번씩 꼬박꼬박 전화를 드렸다. 그런데 학교 생활에 익숙해지고 기숙사에서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이 즐거워지면서는 전화하는 횟수가 점점 줄어들었다. 대학생이 되고 나서는 더 뜸해졌고, 일본에 오고 나서는 국제전화 요금을 핑계로 몇 달에 한번 전화를 할까 말까였다.
나는 당장 눈 앞에 놓인 내 삶이 너무 치열하고 힘들어 할머니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반면에 할머니는 나이가 들 수록 나를 그리워하셨다. 함께 살 때는 애정표현이라고는 하신 적이 없던 할머니였는데, 어느 날 찾아간 나를 꼭 껴안고 쓰다듬어주셨다. "할머니"하고 부르며 현관으로 들어서는 나를, 이전에 본 적이 없는, 반가움과 환희에 찬 얼굴로 맞아주셨다.
나는 그런 할머니의 애정표현이 당황스러웠다. 그래서 할머니와 같은 온도로 마주하지 못했다. 서른이 넘어서도 여전히 무뚝뚝하고 묻는 말에 대답이나 겨우 하는 철부지 손녀였다. 마지막으로 찾아뵈었을 때도 그 모습에서 한치도 달라지지 못한 채였다.
돌아가시기 전부터도 외국에 산다는 핑계로 1년에 한 번 찾아뵐까 말까 했기 때문일까. 솔직히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아직 실감이 잘 안 난다. 그저 어딘가에 계실 것 같다. 다만 내가 찾아가지 못하는 것일 뿐.
나를 그리워하던 할머니에게 너무도 모질었던 내가 할머니를 그리워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할머니가 그립다.
가끔씩 꿈에서 할머니를 만난다. 그러면 나는 그게 꿈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살아계심에 안도한다. 꿈에서 깨고 나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를 보듯이 마음이 허망하다.
다시는 먹을 수 없는 할머니의 집밥이 그립다. 그때는 소중함을 몰랐던 그 음식들이. 철없이 부끄러워했던 그때 그 도시락마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