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워진 돼지 저금통의 비밀
아마도 겨울 방학 때였을 것이다.
농한기가 되면 마을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마을 회관에 곧잘 모여 같이 밥도 해 먹고, 술도 마시고, 화투고 치고, 그러다 싸움도 나고(?) 그랬다.
그러다가 단체로 일당을 벌러 다녀오는 일이 종종 있었다. 요즘은 어떤 지 모르겠지만, 내가 어릴 때는 시에서 하는 꽃 심기 나무 심기에 농촌 어르신들의 일손을 빌리곤 했었다.
문제의 그날도 할머니는 일당을 벌러 나가시고 나는 하루 종일 아버지와 함께 집에 있어야 했다.
나는 아버지가 집에 돌아오는 것이 반갑지 않았다. 한 공간에 있는 것이 숨 막혔고, 나에게 말을 거는 것조차 싫었다.
특히, 할머니라는 매개체 없이 단 둘이 집에 있게 되면 어쩔 수 없이 몇 마디라도 주고받아야 하는 상황이 생겼기 때문에 그것이 끔찍이도 싫었다.
그래서 학기 중에 아버지가 집에 와 있을 때는, 할머니가 일 끝나고 돌아오실 시간까지 친구 집에서 놀다 오거나 그럴 상황이 안 되면 혼자서라고 밖에서 시간을 때우다 들어갔다.
하지만 방학 때에는 딱히 갈 곳도 없었고,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뛰어노는 것도 한계가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아버지와 단 둘이 집을 지켜야 하는 날이 많았다. 그럴 때면 나는 조용히 숨을 죽이고 티브이만 응시했다. 나에게 제발 말 걸지 말아 달라는 마음속 외침을 온몸으로 뿜어내면서.
그날도 그렇게 숨을 죽이고 시간이 빨리 흐르기만을 바라고 있었을 나에게, 아버지는 천 원을 내밀며 담배를 사 오라고 했다. 담배가 700원이니 나머지 300원으로 과자를 사 먹으라고 했다.
여기서 잠깐, 저 천 원의 출처에 대해 잠시 추론해 보겠다. 집에서 빈둥거리기만 하는 아버지에게 할머니가 담배값을 곱게 줄 리없다. 폭풍 잔소리와 함께 어렵게 타 낸 돈이거나, 아니면 내 돼지 저금통에서 몰래 꺼낸 돈이었을 것이다.
나는 돼지 저금통에 열심히 저축하는 아이는 아니었다. 용돈이라는 것이 거의 없었을뿐더러 어쩌다 생기더라도 간식 사 먹기 바빴으니까. 그래도 한 번씩은 훗날을 위해 동전 한 푼, 통 크게 천 원짜리 한 장을 넣는 날도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눈에 띄게 가벼워진 돼지 저금통을 발견하고 나서는 더 이상 돼지에게 밥 주기를 그만두었다. 범인이 아버지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어쨌거나 그 날의 천원도 내 저금통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밝혀두겠다.
나는 천 원을 들고 동네 어귀에 있는 구멍가게로 향했다.
요즘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겠지만, 당시에는 아이들에게 담배 심부름을 시키는 일이 흔했다. 그래서 담배를 사는 행위 자체에 대한 거부감은 없었다.
문제는 그 담배를 아버지에게 건네주는 것이 죽도록 싫었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있는 집으로 돌아가기부터가 싫었을 것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구멍가게 근처를 어슬렁거리던 나는 동네 언니와 마주쳤다. 그리고 무슨 담력으로 그랬는지, 별로 친하지도 않던 그 언니와 함께 천 원을 과자 값으로 탕진해 버렸다.
당시에 천 원으로 과자를 몇 봉지나 살 수 있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어쨌든 과자를 맛있게 먹으며 한참을 놀았다.
뜻밖에 횡재를 만난 그 언니는 과자 봉지가 바닥을 보임과 동시에 집으로 돌아갔다.
먹을 때는 좋았지만 막상 집으로 돌아가려니 막막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뭉개고 있을 수만은 없었기에 터덜터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며 집으로 향했다.
이제나 저제나 담배가 오기만을 기다리던 아버지는 빈 손으로 돌아온 나를 보고 당연히 노발대발했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나는 흡연자의 금단증상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지 못한다. 배고픈 데 굶고 있는 것과 비슷한 느낌일까. 그렇다면 화가 많이 났겠군.
나는 한겨울에 내복만 입은 채 쫓겨났다. 내 저금통에서 나왔을지도 모르는 돈으로 과자를 사 먹었다는 이유로.
집으로 돌아가면서 아버지한테 얻어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양호한 편이었다.
대문 앞에 내복 바람으로 쪼그리고 앉아있는 나를 뒷 집 할머니가 발견해 집으로 데려가셨다. 그 집에는 방학을 맞아 할머니 집에 놀러 온 내 또래 손주들이 있었다.
비록 내복 바람이었지만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나는 그 아이들과 함께 간식을 먹으며 신나게 티브이를 보고 있었다.
일 끝나고 오신 할머니가 어떻게 알았는지 나를 데리러 오셨다. 하긴 좁은 동네였으니 근처에 몇 집만 돌아도 금세 발견했으리라.
이번에는 할머니가 노발대발이었다. 어린아이에게 담배 심부름을 시킨 것도 모자라, 추운 날씨에 내복 바람으로 쫓아내기까지 했으니. 아버지가 수세에 몰리는 게 당연했다.
왜 그랬냐는 할머니의 물음에 나는
“무서워서...”
라고 대답했던 것 같다. 할머니는 담배 사기가 무서웠다는 뜻으로 해석하셨지만 나는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그 편이 나한테는 더 유리할 것 같았다. 그래야 다시는 나에게 담배 심부름을 시키지 않을 테니까.
사실 무섭기보다 싫다는 감정이 더 정확했겠지만 차마 그렇게 대답할 수는 없었겠지.
아버지에 대한 내 감정은 좀 복합적이었다. 두려움과 증오와 경멸이 한 데 뒤엉켜 결론적으로 싫은 감정이 만들어졌다. 그냥 싫은 게 아니라, 죽도록, 끔찍이, 소름 끼치게 싫었다. 아버지가 영영 집에 돌아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어른이 되면 반드시 이 집구석을 떠나 아버지와 인연을 끊고 살겠다고 다짐했다.
물론 인연을 끊는다는 게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버지와 나 사이에는 할머니라는 연결고리가 있었고, 할머니와 연결되어 있는 이상, 아버지를 아예 안 보고 살 수는 없었다.
뒤늦게나마 부모 노릇 하겠다고 아버지는 대학생인 나에게 매달 용돈도 보내주었다. 꼬꼬마 시절에 도둑맞은 돼지 저금통 속의 돈은 몇 배로 돌려받은 셈이다.
지금은 손자들의 사진을 받아보기 위해 스마트 폰을 사고, 사진이 뜸하면 독촉하는 보통의 할아버지가 되었다.
여전히 나는 아버지를 좋아하지 않는다. 오래 안 봐도 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그래도 지금은 같은 공간에 있는 것이 끔찍이 싫은 정도는 아니니 다행이다.
그저, 젊은 날을 허랑방탕하게 보내고 나이 들어 고생하는 모습이 좀 안쓰럽기도 하고, 제발 성질 좀 죽이고 잘 살아주기를 바랄 뿐이다.
아버지도 나한테 크게 바라는 것은 없을 것이다. 암, 양심이 있으면 그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