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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질그릇 Aug 21. 2019

피아노 학원과 빗자루

시골 마을의 사교육 바람

내가 자랄 때만 해도 시골 마을에 또래 아이들이 꽤 있었다.

나를 포함해 동급생이 다섯 명, 그 외에 언니, 오빠, 동생들이 어림잡아 열 명은 있었으니, 마을 공터에 모여 술래잡기를 비롯한 각종 놀이를 할 때면 꽤나 복작거릴 정도였다.

다 합해도 50가구 정도밖에 되지 않는 마을에 아이들이 열댓 명 있다는 것은 시골 치고는 꽤나 높은 인구 비율이 아니었을까.



그런 시골에도 사교육의 바람이 한 번씩 스치고 지나갔다.

좁은 동네에서 누가 뭔가를 시작하면 금세 소문이 나기 마련이다. 은밀한 사교육이란 애초부터 있을 수 없다.

행여나 내 자식이 뒤쳐질까 걱정되는 마음은 시골에서 농사짓는 부모라 해도 다를 바 없으니, 결국 누가 시작하면 다 같이 하게 되고, 나도 그 무리 중에 꼭 끼어 있었다.

부모 없이 커서 모자라다는 소리 들을까, 할머니는 없는 돈을 쪼개어 나를 사교육의 현장으로 밀어 넣으신 것이다.


눈높이 수학 열풍이 불었을 때는, 선생님이 오시는 날이면 친구네 집에 잔뜩 모여들었다. 나는 재미도 없고 패턴도 비슷한 문제들을 왜 반복적으로 풀고 있어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시키는 대로 열심히 했다. 몇 개월 뒤에 열풍이 가라앉고 더 이상 문제를 풀지 않아도 되었을 때 정말이지 속이 후련했다.


한 번은 ‘전과’ 비슷한 학습지 열풍이 불어 너도 나도 계약을 하는 사태가 벌어졌는데, 그 내용은 국민학생인 내가 보기에도 많이 부실했다. 학교 앞 문방구에서 파는 전과와는 비교도 안 되게 페이지 수도 글자 수도 빈약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순진한 시골 사람들을 상대로 한 일종의 사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한 번 계약하면 무를 수 없다는 업체의 말에도 굴하지 않는 억척스럽고 용감한 한 엄마는 결국 계약을 파기했고, 할머니는 나에게 어떻게 할지 물었다. 나는 그거라도 있는 게 없는 것보다는 나을 거 같아서 그냥 보겠다고 했고, 빈약한 내용 중에서 뭐라도 건질 게 있나 싶어 열심히 탐독했다.


영어 사교육 바람도 잠시 불었다.

친구의 사촌 언니가 영어 강사 일을 하고 있었는데 틈틈이 싼 값에 나와 친구를 가르쳐주기로 한 것이다.

그때의 사교육이 내 영어 실력에 얼마나 보탬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름대로 재미는 있었던 것 같다. 'father finger~ father finger~ where are you~?'로 시작하는 영어 노래의 멜로디와 가사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으니 말이다.



사교육 중에서 그나마 가장 길게 유지되었던 것은 피아노 학원이었다.


우리가 다니던 국민학교 앞에 자그마한 피아노 교실이 생겼고, 언제부턴가 나와 우리 마을 여자 아이들 그리고 같은 학교의 몇몇 아이들은 학교 수업이 끝나면 피아노 학원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모여 놀다가 순서가 오면 피아노를 치고, 조그만 수첩에 선생님의 사인을 받았다.

선생님은 잘 한 날이면 다섯 개, 보통인 날이면 세 개 정도의 사인을 해주셨는데 선생님의 사인을 몇 개 받았는지가 늘 아이들 사이에서 화제였다.

사인을 네 개 이상 받은 날은 기분이 좋고 어깨가 으쓱했지만, 세 개 이하로 받은 날은 왠지 부끄럽고 의기소침해졌다.  


학교 근처에 사는 아이들은 부모님이 조금 떨어진 읍이나 시로 나가 직장에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아무래도 농사짓는 집보다는 여유가 있었기에, 걔 중에는 집에 피아노가 있는 아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나를 비롯한 우리 마을 아이들에게 피아노는 학원에서나 만질 수 있는 물건이었다.

학교 교실에 풍금이 놓여있긴 했지만 쉬는 시간마다 공기나 지우개 따먹기를 하며 놀기 바빴고, 부족한 실력으로 풍금 앞에 앉았다가 괜히 놀림당하기 십상이었으므로 아무도 학교에서 연습을 하지는 않았다.

결국 건반이 몇 개 안 되는 멜로디언으로 집에서 연습을 시도하다가 자세도 불편하고 불기도 힘들어서 금세 관둬 버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제대로 된 연습이 될 리 없고 따라서 진도도 참 안 나갔던 것 같다.


그렇게 점점 피아노에 흥미를 잃어가며 꾸역꾸역 피아노 학원에 다니던 어느 날이었다.

갑자기 학원에 가기 싫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는 그 생각을 실행에 옮기고 말았다. 나의 탈선을 들키지 않기 위해 학교 근처에서 시간을 때우다가 학원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집에 돌아갔다.

첫날은 아무 일 없이 지나갔다. 할머니는 내가 피아노 학원에 다녀온 줄로 철석같이 믿고 계셨고, 나는 천연덕스럽게 행동했다. 둘째 날도 무사히 지나갔다.


학원을 빼먹은 지 삼일째 되는 날, 그날도 적당히 시간을 때우고 집으로 향했다.

집 마당으로 들어서려는 찰나, 할머니가 한 손에 빗자루를 들고 나를 향해 돌진해 오셨다.

"이노무 가시나! 학원은 빼먹고 어디서 뭐 하다 이제 들어오노?"

할머니의 불호령과 함께 빗자루가 내 엉덩이로 날아들었다. 나는 빗자루를 피해 요리조리 도망 다니며 연신,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하고 빌었다.

할머니와 단 둘이 살아 늘 조용하던 집이 오랜만에 아주 소란스러워졌다.


하루 이틀은 무슨 일이 있어 못 오나보다 하던 선생님이, 삼일 째가 되자 걱정이 되어 집에 전화를 하신 모양이었다.

당연히 할머니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내가 집에 오기만을 벼르고 계셨을 것이다.


밭에서 기른 각종 채소를 장에 내다 파시던 할머니는 시금치 한 단에 천 원 이천 원을 받았고, 몇 백 원을 깎네 안 깎네 실랑이를 하셨다. 그렇게 한 푼 두 푼 땀 흘려 번 돈으로, 못해도 몇만 원은 했을 피아노 학원비를 내줬더니 학원을 삼 일씩이나 빼먹고 거짓말을 한 내가 얼마나 괘씸했을까.


가정주부가 되어 빠듯한 살림을 꾸려가는 지금에서야 할머니의 마음을 알 것 같다. 내 피아노 학원비를 내기 위해 할머니는 몇 번이나 장을 오가며 몇 단의 시금치를 팔아야 했을까. 돌아가신 할머니께 죄송한 마음을 전할 길이 없어 막막하다.


어쨌거나 문제의 그 날, 나는 할머니께 호되게 꾸지람을 듣고 회초리를 눈물이 쏙 빠지도록 맞을 예정이었다.

그런데 하늘이 도우신 걸까. 나에게 구세주가 나타났다!


사실 할머니가 빗자루를 들고 튀어오시던 그 순간, 우리 집 툇마루에는 다른 할머니 한 분이 앉아계셨다. 정확한 촌수는 알 수 없지만, 친척들 모두가 노 할머니라 부르는 할머니셨다.

큰길 건너에 있는 언덕배기 마을 깊숙이 노 할머니의 집이 있었고, 나도 한두 번쯤은 가 본 기억이 있다. 노 할머니는 연세가 많으셨고 거동이 불편해 집 밖으로 나오는 일이 잘 없었는데, 그 날은 무슨 걸음이셨는지 멀리 떨어진 우리 집까지 마실을 나오신 것이었다.

노 할머니는 사람 좋은 웃음으로 흥분한 할머니를 말리시며,

“어린애가 그럴 수도 있지. 자네가 참게.”

하고 내 편을 들어주셨다.

할머니도 모처럼 마실 나오신 노 할머니 앞에서 어수선한 집안 꼴을 오래 내보일 수 없었을 것이다. 여전히 씩씩 가쁜 숨을 몰아 쉬며,

"이노무 가시나, 니 오늘 노 할머니 덕에 산 줄 알아라!"

하고 고함을 치셨지만 빗자루 세례는 어느새 멎어있었고, 그렇게 상황은 내 예상보다 훨씬 싱겁게 끝이 났다.


그때까지 그저 낯설고 불편하기만 했던 노 할머니의 존재가, 세상에 둘도 없이 든든하게 느껴졌던 날이었다. 나는 언제까지고 노 할머니가 우리 집에 계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노 할머니는 곧 돌아가셨지만, 그 이후의 상황이 잘 기억나지 않는 걸 보면 더 이상의 푸닥거리는 없었던 것 같다.

아마도 잠들기 전까지 잔소리만큼은 원 없이 들어야 했겠지만.



내 생에 최초의 땡땡이를 경험하게 해 준 피아노 교실은, 선생님의 사정으로 얼마 안 가 문을 닫았다.

나와 친구들은 읍내에 있는 작은 피아노 학원으로 다 같이 옮겨갔는데, 교재가 바뀌는 바람에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했고, 역시나 진도는 참으로 더디었다.

하나둘씩 그만두는 아이들이 생겼고, 이유는 기억이 안 나지만 나는 또 학원을 옮겨야 했다.


이번에는 규모가 좀 큰 학원이었는데 그만큼 기다리는 아이들도 많았다. 거의가 읍내에 있는 국민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이었고, 촌동네(물론 읍도 촌이긴 하지만)에서 온 아이는 내 기억에 나뿐이었던 것 같다.

아이들 틈에 끼어 같이 놀긴 했지만 내내 어색하고 불편했으며 때로는 냄새가 난다고 놀림을 받기도 했다.


그런 상황들을 참아가며 꾸준히 다니다 보니 드디어 나도 바이엘을 떼고 체르니 100번에 진입할 수 있게 되었다.

명곡집과 같은 연주곡도 연습하고 하농으로 열심히 손가락 운동도 했다.


그린 슬리브스와 아라베스크의 음률이 아름답게 느껴지고, 건반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조금씩 변주를 해나가는 하농이 재미있게 느껴질 무렵, 할머니는 나에게 피아노 학원을 그만 다니라고 하셨다.

“피아노는 그만 배우고 이제 공부해야지.”


학원비가 부담이 되셨는지, 아니면 이제 고학년이 되었으니 예체능은 집어치우고 공부나 하라는 뜻이셨는지 모르겠다.

어느 쪽이든 나는 할머니의 말을 거역할 수 없었다.


할머니와 함께 간 피아노 학원에서 마지막 레슨을 받던 날, 그토록 칭찬에 인색하던 선생님이 그 날 만큼은 아낌없이 칭찬을 해주셨다.

“손가락이 길어서 피아노 치기 좋은데. 조금 더 배우면 좋을 텐데 아쉽다.”

선생님은 진심으로 아쉬워하는 얼굴이었고, 나 역시 아쉬웠다.


할머니를 따라 피아노 학원을 나서는 길,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지만 티 내지 않기 위해 애써 눈물을 삼켰다. 이럴 줄 알았으면 땡땡이치지 말고 열심히 다닐 걸 그랬어, 뒤늦은 후회를 하면서.



나는 아직도 피아노에 미련이 많다.

어른이 되어서도 꼭 다시 배우고 싶다고 생각만 하며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는데, 공황장애로 휴직하고 있던 때에 마음의 치료를 구실 삼아 배우기 시작했다.

나이가 들어 배우자니 손은 굳고 마음과 달리 자꾸만 왼손과 오른손이 따로 놀았지만 그래도 좋았다.


피아노 선생님이 가르치는 학생들을 모아 소규모로 발표회를 열었는데,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나도 한 곡 연주를 했다.

올망졸망한 아이들과, 그 아이들의 연주를 보러 오신 부모님과 조부모님들 틈에 끼어 앉아 있자니 ‘괜히 한다고 했나 봐’하고 후회가 밀려왔다.

다 큰 어른이 부끄럽다고 도망갈 수는 없으니 용기를 내어 피아노 앞에 앉았고, 중간에 한 번 버벅대긴 했지만 큰 실수 없이 무사히 연주를 마칠 수 있었다.


지금은 두 아이의 육아 때문에 피아노를 배우기는커녕 혼자서 연습할 시간도 없다.

내 손은 다시 피아노에 대한 모든 감각을 잃어가고 있지만, 언젠가 아이들이 자라고 여유가 생겼을 때 꼭 다시 피아노를 배우러 갈 생각이다.

내 아이의 손을 잡고 함께 배우러 갈 수 있다면 더없이 행복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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