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보다 깊은 상처
둘째를 출산한 지 세 달이 지났다. 마찬가지로 엄마와 연락을 안 한지도 세 달이 넘었다.
원래 자주 연락하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첫째를 낳고는 아이 사진도 카톡으로 보내고 가끔 영상통화도 하고 했었는데, 요즘은 그런 연락조차 전혀 하지 않고 있다.
둘째를 낳고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했던 통화가 마지막이었다.
엄마:몸은 좀 괜찮냐?
나:힘들지만 진통제로 버티고 있어요.
엄마:산모가 무슨 진통제냐 그냥 버텨야지! 모유수유 안 하냐?
나:모유수유하는데 의사가 처방해 준 거니까 괜찮을 거예요.
엄마:의사가 괜찮다면 괜찮은 거냐? 의사 말 다 믿지 마라.
나:진통제 없이는 밤중에 아이를 돌보는 게 너무 힘들어요.
엄마:나 때는 그런 거 없었다. 그냥 생으로 버텼지.
나:엄마가 나를 낳았을 때는 20대 초반이었고, 나는 지금 30대 중반인데 그게 같아요?
엄마:나이가 무슨 상관이냐. 나도 류머티즘 관절염으로...
거기까지 듣고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나는
출산한 딸에게 전화해서
할 말이 그거밖에 없어요?
그럴 거면 전화 끊으세요!
라고 말했다. 엄마에게 그렇게 단호하게 말해본 적이 없었는데 출산하고 며칠 안되어 낮밤으로 신생아를 돌보느라 지친 나에게 진통제 먹는다고 타박하는 엄마의 말을 더 이상 들어줄 수 없었다.
더욱이 "나 때는..."으로 시작하는 레퍼토리는 더더욱 듣기 싫었다. 나 낳고 산후조리를 잘 못해서 류머티즘 관절염으로 오래 고생했다는 이야기는 전에도 들었다. 몇십 년을 아침에 일어나면 손이 붓고 아프다가 한참이 지나야 괜찮아졌다고.
그 증상은 나도 첫째를 낳고 겪었다. 멋도 모르고 출산한 지 백일도 되기 전에 뜨개질을 했다가 손을 무리하게 썼는지 그 후로 몇 달을 아침에 일어나면 손이 붓고 아팠다. 본인도 똑같이 겪었다면서 뜨개질하는 나를 말리지 않은 엄마가 원망스러운 마음도 있었나 보다. 그래서 더욱 류머티즘 관절염 소리는 듣기 싫었나 보다.
엄마는 늘 그런 식이었다. 첫째를 키우면서 육아가 힘들다는 얘기를 하면 엄마 때는 더 힘들었다고, 그때는 세탁기도 없어 기저귀를 손빨래했다고, 빨래한 기억밖에 없다고 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생각했다.
'그래서 지금 나도 종이 기저귀가 아닌 천기저귀를 쓰며 손빨래하는 고생을 겪어보라는 말인가'
보통의 엄마라면 '나 때는 이렇게나 고생했는데 내 딸은 그만큼 고생하지 않아서 다행이다'라고 할 텐데, 엄마는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본인이 더 힘들었다고 말할 뿐이었다. 그 말은 나에게 곧,
'나는 그렇게 고생했는데 너는 이렇게나 편하니 좋겠구나'
하는 뉘앙스로 들렸다. 엄마는 엄마의 관점이 아니라 같은 여자로서 나를 비교의 대상으로 여기는 듯해 보였다.
돌이켜보면 둘째를 출산하기 훨씬 전부터 거의 연락을 안 하고 지냈다. 어느 때부터인가 엄마와 통화를 하고 나면 항상 기분이 안 좋았다.
그래도 첫째를 낳고부터는 멀리 사는 손자 얼굴이라도 보여주기 위해 가끔 영상통화를 했었는데, 통화를 할 때마다 엄마의 말에 상처를 받고 며칠씩 우울한 기분에 사로잡혀 지내야 했다. 그래서 영상통화도 점점 뜸해졌고, 둘째를 임신하고부터는 나도 스트레스를 받기 싫어서 통화한 횟수가 손에 꼽힐 정도였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첫째가 아직 묻는 말에 잘 대답도 못할 때였다. 엄마는 첫째에게
"엄마가 맛있는 거 해주드나? 맛있는 거 사 주드나?"
"우리 손자 과일 좋아하는데 비싸서 못 먹지?"
대답도 잘 못하는 아이에게 그런 질문을 하는 의도는 간접적으로 나를 겨냥한 것이었다. 얼핏 평범해 보이는 엄마의 저 말이 나에게는 이렇게 들렸다.
'너 엄마 노릇 잘하고 있냐? 자식새끼 잘 챙겨 먹이고 있냐?'
나에게 직접 그렇게 물었다면 나는 반박이라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내 나름대로 신경 써서 먹이고 있다고, 과일이 비싸서 나와 남편은 거의 못 먹지만 첫째한테는 조금씩이라도 꼬박꼬박 먹이고 있다고.(일본은 과일이 정말 비싸다. 한국에서처럼 먹다가는 식비 폭탄을 맞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 한 질문이 아니기에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첫째는 아직 나를 대변해서 대답해 줄 만큼의 언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나이였다. 아이를 대신해 '엄마가 잘 챙겨주고 있어요'라고 대답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구차했다. 그렇게 나는 엄마의 간접적인 지적 내지는 힐난을 받고도 아무런 항변도 하지 못한 채 통화를 끝내고 우울해지기를 반복했다.
둘째 임신 중에 오랜만에 통화를 했을 때는, 너무 오랜만이라 할머니가 낯설어 쭈뼛쭈뼛하는 첫째를 보며 엄마는
“애를 왜 이렇게 기를 죽여서 키웠냐”
라고 했다. 그 말에는 나도 반발심이 들어
“기를 죽이긴 누가 기를 죽였다고 그래요? 왜 말을 그런 식으로 하세요?”
라도 따져 물었다. 엄마는 민망한 듯 웃고 말았다. 진심이 아니었단다는 뜻이겠지. 진심이 아닌 말을 왜 그렇게 함부로 뱉을까.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없는 걸까. 아니, 나에 대한 배려가 없는 걸까.
병원에서의 통화로 아직도 앙금이 남아 있는 건 아니다. 다만 엄마와 연락을 하기 위해서는 나름대로의 각오가 필요하다. 웬만한 말에는 상처 받지 않을 각오. 그럼에도 나는 매번 상처를 받고 우울해진다.
그러나 지금은 두 아이를 돌보는 일에 전념해야 하기에 우울한 기분에 빠져 허우적거릴 여유가 없다. 그래서 먼저 연락할 용기가 좀처럼 생겨나지 않는다. 엄마는 원래부터도 먼저 연락을 잘 안 한다. 아마도 애 키우느라 바빠서 그러려니 하고 계실 것이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엄마와의 연락을 꺼리는지는 꿈에도 생각지 않을 것이다.
이대로 계속 연락을 안 하다가 아예 연락이 끊기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지금 같아서는 별로 아쉬울 것이 없을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아직은 그렇게 극단적인 선택을 할 용기도 없는 것 같다.
이 글을 읽는 누군가는 나를 불효자라고 비난할지도 모르겠다. 뭐, 사실이다. 나는 효녀가 될 마음이 없다.
낳아주셨고, 어린 시절 사랑을 주셨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상처를 준 것도 엄마다. 그리고 그 상처를 돌보아주지 않았다.
엄마를 원망하는 마음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지금의 내 마음은 원망보다 체념에 가깝다. 원래 저런 분이니까. 변하지 않으니까. 내가 기대하지 않기로 했다.
엄마가 무언가를 챙겨주면 감사히 받는다. 그에 상응하는 정도의 보답은 하려고 한다. 하지만 내가 먼저 무엇인가를 요구하는 일은 거의 없다. 우리의 관계는 딱 이 정도에서 나아가지 않고 있다.
나는 가정을 이루었고, 내 사랑과 돌봄이 필요한 자녀가 있다. 더 이상 엄마와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소모할 에너지가 없다.
그럼에도 여전히 엄마의 말에 상처받고 있는 걸 보면 내 안에 포기하지 못한 무언가가 남아있나 보다.
이 관계, 과연 개선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