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년의 간극
나와 엄마와의 관계는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30년 전쯤 엄마가 나를 버리고 집을 뛰쳐나갔을 때부터였을까?
내가 6살 때, 엄마는 밤중에 집을 나갔다. 그리고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친할머니 손에 자랐다.
엄마를 다시 만난 건 그로부터 18년 후, 내가 24살이 되었을 때였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다 방학이 되어 할머니 집에 갔을 때였다. 나 혼자 집에 있을 때 외할머니의 전화를 받았다. 어렸을 때 이후로 처음이었기에 좀 당황스러웠지만 한번 찾아오라는 말씀에 그러겠다고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찾아뵌 적이 있었다.
그리고 24살 여름, 이듬해 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기에 그전에 외할머니를 찾아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한 번 떠나면 자주 오기도 힘들 것이고, 할머니가 연세도 있으셔서 그 사이에 돌아가실지도 모르니 떠나기 전에 찾아뵈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어찌 되었든 혈연이니 외국으로 떠난다는 소식 정도는 전해두는 게 도리일 것 같기도 했다.
할머니 집에 내려가는 길에 잠깐 들르기로 하고 당일이 되어 연락을 드렸을 때 전화를 받은 것은 엄마였다.
그렇게 18년 만에 성인이 되어 엄마를 다시 만났다. 내 인생에 다시없을 거라 생각했던 엄마를.
사실 그전에도 몇 차례 엄마와의 접촉이 있었다.
중학교 졸업식 날 낯선 아주머니가 교실로 찾아와 꽃다발을 전해주며 엄마 친구라고 같이 사진을 찍자고 했다. 그동안 잊고 있었던, 아니 묻어두었던 엄마의 존재가 너무도 갑작스럽게 등장했기에 나는 당황했고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엄마의 친구라는 그 아주머니는 결국 사진 찍기를 포기하고 꽃다발만 주고 가셨다.
꽃다발 속에는 엄마의 글씨로 쓰인 작은 쪽지가 들어있었다. 정확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조만간 만나자는 말과 함께 전화번호가 적혀있었다.
나는 그 쪽지를 들고 며칠을 끙끙거렸다. 어린 마음에, 엄마와 몰래 연락하는 것이 마치 나를 키워주신 할머니를 배신하는 행동처럼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엄마를 보고 싶고 다시 만나고 싶은 마음과, 할머니에 대한 미안함과 죄스러움 사이에서 고민하던 나는 결국 쪽지를 찢어버렸다.
그러면서, 내 인생에 엄마는 없다고, 나한테는 할머니가 엄마 대신이라고 다짐을 했다. 그게 다짐한다고 될 일인 지는 모르겠지만 어린 마음에는 그랬다. 하지만 그 다짐은 오래가지 못했다.
고등학교를 진학하면서는 기숙사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집에는 2주에 한 번씩 주말에 다녀왔다. 쪽지는 찢어버렸지만 전화번호는 이미 뇌리에 선명하게 각인이 되어버렸나 보다. 결국 나는 기숙사에 있는 공중전화 수화기를 들고 번호를 누르고 말았다.
처음에는 수화기 너머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전화를 끊었던 것 같다. 그리고 얼마 후 다시 걸었을 때는 용기를 내어 수화기를 들고 있었다. 수화기 너머에서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였는지 자기였는지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누군가를 부르고 있었고, 나는 그때 엄마가 재혼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왠지 모르게 좌절감과 거리감이 느껴져 또다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아마도 세 번째 전화를 걸었을 때였을 것이다. 말도 없이 끊는 전화가 반복되자 엄마도 낌새를 차렸는지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엄마는, 엄마가 보고 싶냐고 물었다. 나는 다시 전화를 끊었고,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다시 전화를 걸지 않았다.
그때의 나는, 엄마가 보고 싶냐는 그 물음이 참 이상했다. 당연히 엄마가 먼저 보고 싶다고 만나고 싶다고 말할 거라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 얘기를 친한 친구에게 털어놓았을 때, 친구는 엄마가 나를 배려해서 그렇게 물어본 게 아니었을까 하고 말해주었다. 그 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대학생이 되어 중간고사를 앞두고 한창 시험공부를 하던 어느 날이었다. 정확히는 5월 8일 어버이날이었다. 불현듯 엄마 생각이 났다. 용기를 내어 전화를 걸었다. 엄마가 받았고 이번에는 내 이름을 밝혔다.
엄마는 어버이날에 내가 전화할 줄 몰랐다고 고맙다고 했다. 한참을 통화했던 것 같은데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전화를 끊고 한 시간이 넘게 울었던 것은 기억이 난다. 어떤 감정인지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었지만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시험공부에 한 시가 급한 데 감정 소모가 너무 심했던 날이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만나야겠다는 생각도 만날 수 있다는 생각도 별로 하지 않았다. 어버이날의 통화는 엄마를 떠나보내기 위한 마지막 의식과도 같이 여겨졌다. 마음이 오히려 홀가분했다.
외할머니의 연락을 받고 찾아뵈었을 때에도 딱히 그것이 엄마와의 연결고리가 될 거라는 생각은 별로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나이가 들어 손녀가 궁금하신 가보다, 얼굴이라도 보여드려야지'하는 생각에 찾아뵈었고, 엄마의 소식을 조금 듣기는 했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타인으로 생각했었다.
희망과 기대를 갖기 않기 위해 의식적으로 더 그렇게 생각하려고 노력했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만나지 않고 그리워하며 사는 편을 택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마음으로 포기하고 있던 엄마를 다시 만났다. 18년 만에.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설레기도 했다. 오래 그리워만 하던 존재를 실제로 만난다는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 후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반년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은 자주 연락하고 편지도 주고받고 시간을 내서 지방에 있는 엄마 집으로 만나러 가기도 했다.
나에게도 엄마가 생겼다는 사실이 기뻤고, 엄마가 만들어주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 행복했다. 할머니는 한 번도 해주신 적이 없는 연근조림을 밖에서 먹을 때마다, 왜 어디선가 먹어본 듯한 느낌이 들었는지에 대한 비밀도 풀렸다. 어렸을 때 엄마가 자주 해주셨다고 한다. 머리는 기억을 못 하는데 미각은 기억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참으로 신기한 경험이었다.
오래 떨어져 있었지만 비슷한 성향과 공통점을 발견하면 역시 피는 물보다 진하다며 감격할 때도 있었다.
엄마를 만나고 나서, 이제껏 비틀거리던 내 존재가 똑바로 다리를 딛고 걸을 수 있게 된 것 같았다.
가끔씩, 아니 자주, 내 기대와 다른 대답이 돌아오는 것을 느꼈지만 그 정도쯤이야 쉽게 극복하고 금방이라도 좋은 모녀 사이를 회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는 몰랐다. 엄마와 딸이기에 비슷한 점도 많지만 다른 점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을. 떨어져 지낸 18년의 간극은 쉽게 메워질 수 없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