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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질그릇 Jul 28. 2019

3. 엄마는 나를 궁금해하지 않았다

엄친아의 등장

언제부터인가 엄마와의 대화가 항상 내 기대와 어긋나는 것을 느꼈다. 엄마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은 늘 기분이 울적했다. 뭔가 할 말을 다 못 하고 돌아서는 기분이었다. 특별히 할 말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왜 그런 기분을 느꼈을까.

그런 일들이 반복되던 어느 날 나는 어렴풋이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엄마와 나의 대화에는 ‘우리’가 없었다.



엄마에게는 학창 시절부터의 절친이 한 분 계시다. 그분의 아들이 태어나 4살이 되기까지 일하느라 바쁜 친구분을 대신해 엄마가 거의 키우셨다고 한다.

그 아이는 나보다 10살 이상 어리다. 아마도 엄마가 아버지와 이혼하고 혼자일 때, 그 아이를 키우셨던 것 같다. 그 아이는, 엄마가 가장 힘들고 외로울 때 엄마에게 위로가 되는 존재가 아니었을까. 그래서인지 엄마에게 그 아이는 각별한 존재인 것처럼 보였다.

엄마는 나를 키울 때는 너무 힘들어서 육아의 재미를 못 느끼셨단다. 그런데 그 아이를 키울 때는 그렇게 재밌었단다.


엄마 집에 갈 때마다 만나게 되는 그 아이는 밝고 영특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엄마 앞에서 거리낌 없이 행동했다. 하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을 마음껏 요구하고 표현했다. 엄마는 그 모습을 한없이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가능한 한 그 요구들을 수용해주려고 노력하셨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 아이가 부러웠다. 엄마 앞에서 거리낌 없는 그 모습이, 엄마와 나 사이에는 존재하지 않는 그 유대감이 부러웠다. 나보다 열 살 이상이 어린 그 아이가 부럽다 못해 질투가 났다. 부끄러워 차마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지만.

나는 엄마 앞에서 그 아이처럼 행동할 수 없었다. 친딸이라고는 하지만 18년을 떨어져 있었고, 나는 이미 성인이 되어 있었다. 엄마 앞에서 어리광을 부릴 수도 없었고, 원하는 것을 마음껏 표현할 수도 없었다.


엄마가 없는 환경에서 나는 알아서 눈치를 보는 아이로 자랐다. 원하는 것은 마음으로만 생각해야 했다. 누가 그렇게 하라고 시킨 것도 아닌데 그렇게 해야만 할 것 같았다.

나의 아버지는 무능했고 게을렀다. 돈벌이를 하지 않고 늘 어디론가 떠돌아다니다 몇 달만에 집에 들어오면 한동안 방에 틀어박혀, 온종일 빈둥거리면서 티브이를 보거나 책을 읽다가, 졸리면 자고 끼니때가 되면 할머니가 차려주는 밥을 먹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홀연히 사라지곤 했다.

할머니는 혼자서 농사를 지으셨다(할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고 얼마 후 돌아가셨다고 한다). 논에서 나오는 쌀로 가족들을 먹였고, 밭에서 나오는 각종 채소는 장에 내다 팔았다. 나는 나이 드신 할머니의 노동과 고모 삼촌들의 도움으로 자랐다.

주어지는 것 이상의 것을 바랄 수 없었다. 나는 어디까지나 부모 없이 얹혀서는 존재였으니까. 할머니가 나를 그렇게 대한 건 아니었지만, 나 스스로 마음의 문을 닫고 그렇게 행동했다. 엄마를 잃은 6살짜리 아이는 욕망도 함께 잃어버렸다.


그렇게 자라온 나의 습성이 친엄마를 만난다고 달라지지 않았다. 반갑긴 하지만 아직은 어렵고 낯설기도 한 엄마 앞에서 말과 행동을 더 조심했다. 무의식 중에 엄마가 싫어할 것 같은 말과 행동은 삼갔고, 궁금한 것들도 함부로 물어보지 않았다. 그렇기에 내 속마음은 더더욱 꺼내놓을 수 없었다. 웃는 얼굴로 있다가 돌아가지만 속은 상처투성이인 것을 엄마는 알 리 없었다.


엄마는 그 아이가 없을 때도 그 아이 이야기를 했다. 한동안 우리 대화의 8할은 그 아이에 관한 이야기였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 것이다. 그 아이를 키울 때 어땠는지, 그 아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본인의 일과 인간관계가 우선인 엄마 밑에서 제대로 못 먹고 자라는 그 아이가 얼마나 안 쓰러운지.

불현듯 나는 묻고 싶어졌다.

‘엄마, 나는? 나는 안 안쓰러워?’

하지만 그 질문은 속으로 삼켰다.


엄마는 나에 관해 묻지 않았다. 어쩌다 내가 이야기를 꺼내면 들어주기는 했지만 더 구체적으로 묻는 경우는 잘 없었다. 그래서 내 이야기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그게 어린 시절에 관한 이야기라면 더욱 그러했다. 특히 엄마와 떨어져 있던 초중고 시절의 이야기를 어쩌다 꺼내면 엄마는 금세 화제를 돌리곤 했다. 의도적으로 피하는 듯한 느낌을 받은 이후로는 나도 그 시절에 관한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일종의 암묵적인 룰과 같았다.

어느 정도 이해는 한다. 어린 시절의 이야기는 결국 내 상처와 연결되며, 내 상처를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엄마 자신의 상처도 들여다봐야 하니까. 그게 싫고 힘들었던 거겠지.

하지만 그때의 나를 빼놓고는 지금의 나를 이야기할 수 없다. 그때의 내가 어떤 경험을 하고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았는 지를 알지 못한다면 지금의 나 또한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엄마는 그 과정을 거부함으로써 나를 이해하기를 거부했다. 그래서 우리의 관계는 피상적인 관계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적어도 내 입장에서는 그랬다.


엄마는 자신이 알고 있는, 태어나서부터 6살 때까지의 나의 모습으로 현재의 나를 판단했고, 그러면서 마치 자신이 나에 대해 다 알고 있는 듯이 말했다.

뿐만 아니라, 마치 우리 사이에 18년이라는 생이별의 시간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행동했다. 항상 같이 있었고, 싸우고 화해하기를 반복하며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있는 보통의 모녀들처럼 행동했다. 나는 엄마의 그런 태도가 못 마땅했다. 엄마가 종종,

“너는 엄마가 뭘 좋아하는지도 모르냐?”

라고 할 때, 모르는 게 당연하지 않냐고 따져 묻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그러게요..”

하고 힘없이 웃었다. 엄마가 애써 덮어놓은 것을 일부러 후벼 팔 용기는 없었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이 늘 갑갑했다. 오랜 시간을 떨어져 있었고, 그래서 서로에 대해 모르는 부분이 더 많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그 간극을 메우기 위해 더 많은 대화를 나누기를 나는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관계는 내가 바라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았고, 지금도 그렇다.

서로의 깊은 부분을 공유할 수 없었기에 우리의 대화는 알맹이가 없이 겉돌았다. 대부분은 타인에 관한 이야기로 채워졌다. 주로 엄마의 지인들에 관한 이야기를 내가 듣고 있어야 했다. 나는 그것이 불만족스러웠지만 내색하지 않았고, 매번 무거운 마음을 안은 채 엄마와 헤어져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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