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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질그릇 Aug 01. 2019

4. 엄마의 화법

공황 장애 vs 갱년기

나는 일본에서 3년 4개월간 직장 생활을 했고, 중간에 7개월간 휴직했다. 휴직의 이유는 공황 장애였다.


그날도 보통 때처럼 데스크에 앉아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스트레스로 인해 한숨을 쉬는 일이 잦았고, 점점 숨이 가빠져왔다. 그러기를 한참, 이내 점점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기다시피 구석진 곳으로 이동하여 바닥에 주저앉아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아무래도 몸이 좀 이상해. 병원에 가야겠어.”

그때 지나가던 여직원이 내 모습을 발견하고 상사에게 보고 했고, 나는 소파가 있는 곳으로 옮겨졌다. 점점 정신이 아득해지고 손끝 발끝이 저리다 못에 마비되는 느낌이었다. 상사는 나에게 구급차를 부를지 물었고, 나는 불러달라고 했다.

도착한 구급대원은 나에게 심호흡할 것을 유도했다. 구급대원을 따라 한참을 심호흡하다 보니 마비될 것 같던 몸이 서서히 돌아오는 것 같았다. 그래도 정신은 여전히 아득했다.

구급차에는 나의 직속 상사와 최초 발견자인 여직원이 동승했다. 다행히도 그 여직원이 한국어를 어느 정도 할 줄 알았기에, 남편의 문자에 대신 답해줄 수 있었고, 남편도 바로 병원으로 향했다.


당시 나는 극심한 빈혈로 두세 달에 한 번씩 병원에 방문하며 처방받은 철분제를 복용하고 있었다. 아침에 출근하기 위해 전철에 올라타면 이내 식은땀이 나고 온 몸에 힘이 빠져 주저앉는 날이 잦았다. 운이 좋아 자리를 양보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제시간에 출근할 수 있었지만, 그렇지 앉은 경우 중간에 내려 한참을 쉬었다 다시 타야 했기에 지각하는 날도 많았다.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향하는 동안, 나는

빈혈이 심해지다 못해 몸에 무슨 이상이 생긴 줄로만 생각했다.


도착한 병원에서 나에게 내려진 진단명은 과환기 증후군, 다른 말로 과호흡이었다.

병원에서는 특별한 조치는 필요 없으니 몸이 안정되면 수납하고 돌아가라고 했다.

그때까지 살면서 과호흡이 정확이 어떤 증상인지도 모르고 있었던 나는, 사람이 스트레스로 그렇게 극한의 상황에 치달을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경험했다.

그 이후로 다시 구급차에 실려가는 일은 없었지만 업무 중에 비슷한 증상을 겪으며 몇 달을 버티던 나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퇴사를 결심했다.


당시 남편은 일본에 온 지 1년 남짓 되었고, 마트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대학원 진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내가 퇴사를 하면 당장의 생계가 막막한 상황이었기에, 남편은 급하게 방향을 선회하여 구직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일본에서의 아무런 기반도 없는 상황에서 쉽게 취직이 될 거라고 기대하기는 힘들었고, 최악의 경우 비자가 취소되어 몇 달안에 이곳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까지 각오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회사를 그만두고 싶었다. 당시의 나는 앞뒤 상황 봐가며 이성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하루라도 빨리 숨 막히는 그곳에서 빠져나와야 내가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퇴직 의사를 밝혔을 때 상사는 난감해했다. 근무 환경 개선을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할 테니 제발 다시 생각해보라고 애원하다시피 했지만, 나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결국 상사는 윗선에 내 퇴직 의사를 보고했고, 논의 끝에 나에게 휴직을 제안했다.


일본에는, 직장인이 병으로 휴직하게 될 경우 기존에 받던 월급의 2/3 정도에 해당하는 수입을 최대 1년 6개월까지 보장해 주는 상병수당 제도가 있다.

회사 쪽에서는 그 사실을 설명하며 휴직을 제안했고, 목구멍이 포도청인 데다, 당장 비자 문제도 걸려있던 나는 고심 끝에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병으로 인한 휴직임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진단서가 필요했고, 그렇게 심료 내과(한국으로 치면 신경정신과에 해당한다)에 방문한 나는 패닉 장애 즉, 한국에서 흔히 말하는 공황 장애라는 진단을 받게 되었다.


휴직을 하고 한동안은 멍한 상태로 지냈다.

상병수당을 받기 위해서는 매달 의사의 사인이 들어간 서류를 제출해야 했기에 정기적으로 병원에 방문하기는 했지만, 심도 있는 심리상담을 해주는 것도 아니었고, 몇 가지 질의응답을 거친 후 약을 처방해 주고, 서류에 사인해 주는 게 전부였다.

업무 스트레스가 없으니 과호흡을 겪는 일은 없었지만, 아무것도 하기 싫은 무기력한 상태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사람을 만나는 것도 대화를 하는 것도 귀찮았다. 병원에서 처방받은 약을 복용했지만, 딱히 기분이 나아지지는 않았다.


그런 나에게 당시 엄마가 했던 말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오랜만에 하는 통화였다. 처음에는 나를 걱정해주는 말로 시작했다. 경제적인 부분을 걱정하는 엄마에게 위에서 말한 상병수당 제도에 대해 설명했다.


일 안 하고 돈도 받고 좋네.
나도 일하기 싫은데
그런 거 있음 나도 받고 싶다.


엄마 나름의 위로였는지 모르겠다. 별거 아니니 좋게 생각하라는. 하지만 당시의 나는 그렇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아니 이게 대체 무슨! 어떻게 아픈 딸한테 저렇게 말할 수가 있지?!’

물론 속으로만 생각했다. 그저 말 문이 막혔다. 엄마는,

“나도 우울할 때 많다. 너만 그런 거 아니다.”

라고도 했다. 그 역시 위로였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봐도 위로의 뉘앙스는 아니었던 것 같다. 본인의 힘듦을 하소연하는 뉘앙스에 가까웠다. 당신은 힘들어도 일을 그만둘 수도 없고, 상병수당과 같은 혜택을 받을 수도 없다는 부러움이 섞인 하소연.


한참이 지난 후에, 다시 이성적으로 사고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나는 엄마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당시 엄마는 갱년기 증상을 앓고 있었다. 소규모 어린이집에서 조리사로 일하실 때였는데, 여기저기 아픈 몸을 이끌고 그 일을 하기가 쉽지 않았으리라. 갱년기에는 감정 기복도 심해지고 우울감을 느끼기도 한다니까, 딸에게 따뜻한 한마디 건네 줄 마음의 여유가 없었나 보다.

머리로는 그렇게 이해를 해본다. 하지만 엄마의 그 한마디에 내가 받은 충격과 상처는 쉽게 회복이 되지 않는다.


엄마의, “나도...”로 시작하는 저 화법에는 도무지 익숙해지질 않는다.

엄마 앞에서 우는 소리를 자주 하는 편은 아니지만, 어쩌다 하게 되는 힘들다는 말

뒤에 엄마는 꼭 ‘나도 힘들다’ 내지는 ‘나도 힘들었다’ 응수한다. 무뚝뚝한 경상도 아줌마의 서투른 위로의 화법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경상도에서 나고 자라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경상도를 떠나본 적이 없으며, 무뚝뚝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나도, 위로가 필요한 상대 앞에서 저런 화법을 구사하지는 않는다.


힘들다고 하소연하는 사람에게,

‘너만 힘든 거 아니야, 다들 힘들어.’

라는 말이 위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한 끗 차이로,

‘너만 힘든 거 아니야. 나도 힘들어.’

라는 말은 위로이기보다 핀잔으로 들린다. 물론, 나도 너와 같은 힘든 일을 겪고 있다는 뜻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말이 위로가 되기 위해서는 공감이 우선시되어야 한다.


엄마의 화법에는 공감이 없었다. 그래서 엄마의 말은 핀잔으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마치,

‘뭘 그 정도 가지고 우는 소리냐. 나는 더 힘든 일도 겪으면서 살아왔는데.

내가 겪은 일에 비하면 니가 힘든 건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말하고 있는 듯한. 저렇게 해석하는 내가 너무 배배 꼬인 걸까.


엄마가 힘들 게 살아온 것을 안다. 나와는 비교도 안 되게 가혹한 세월을 견디어 온 것도. 표현에 서툰 딸이 그저,

“아, 정말요? 힘드셨겠네요..”

라고 밖에 위로의 말을 건네지 못하는 것이

죄송할 때도 있다.

하지만 나도 엄마에게 핀잔이 아닌 위로를 받고 싶다. “나도..”로 시작되는 화법이 아니라,

“그랬구나. 우리 딸이 힘들었겠구나.”

라고 따뜻한 한마디 말을 건네받고 싶다.


엄마는 가끔 그런다.

“야, 엄마랑 딸 사이에 그걸 꼭 말로 해야 아냐?”


네. 말로 해야 알아요, 엄마.

우리가,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그런 모녀지간은 아니잖아요.

엄마도 이제 그만 인정하세요.

엄마가 외면한다고 18년의 세월이 저절로 메꿔지는 거 아니에요. 그냥 없었던 일이 되는 게 아니라구요.


나는 언제쯤 저 말을 속으로 삼키지 않고 입 밖으로 뱉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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