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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질그릇 Aug 07. 2019

5. 엄마와 산후조리-1

과거에 대한 위로와 공감

첫째 아이의 출산을 앞두고 산후조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


일본은 한국처럼 조리원이 흔하지 않고, 비용도 어마 무시하다. 산후에 도움받을 사람이 마땅히 없는 경우, 시에서 운영하는 산후도우미 제도를 이용할 수 있지만, 출산 후 56일 이내에 하루 2시간 이하, 최대 30시간까지만 이용할 수 있다. 비용은 시간당 800엔. 시마다 운영 방침이나 비용이 다를 수 있지만 대충 저런 식이다.

사설 도우미를 운영하는 회사들이 있긴 하나 이 역시 조리원과 마찬가지로 비용이 사악하다.


시어머니는 와 주실 상황이 못 되었고, 와 주신다 해도 내가 불편할 것 같았다. 마침 엄마가 일을 그만두고 쉬고 있었기에 어쩌면 엄마가 와 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생각만 했다. 내 입으로 부탁은 하지 못했다.


원래도 부탁을 잘 못하는 성격이긴 하지만 유독 엄마한테 부탁하는 것이 어렵다.

왜 그럴까. 아마도 거절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 것 같다.


아주 친한 관계라면, 이 정도 부탁은 들어주겠지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부탁을 한다. 그런데 상대방이 거절한다면 그만큼 상처도 크게 받게 될 것이다.

별로 친하지 않은 관계라면, 반대로 큰 기대를 하지 않고 부탁을 할 것이므로 거절당해도 크게 상처 받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엄마와의 관계는 좀 묘하다. 큰 기대를 하지 않는 대도 거절당하면 상처를 크게 입는다.

내가 엄마를 통해 받는 상처는 단지 한 번의 거절로 인한 상처가 아니기 때문이다. 과거의 일들로 인해 내 안에 차곡차곡 쌓여있던 해묵은 감정들이 함께 엉겨 붙어 커다란 덩어리가 되어 나를 덮친다.  

그래서 나는 엄마의 사소한 거절도 참으로 아프다.



나처럼 엄마에 대한 해묵은 감정이 없는 남편이 오히려 엄마와 더 편하다. 남편은 임신 사실을 엄마에게 알린 후,

“어머니, 오셔야죠?”

하고 살갑게 이야기했다. 엄마는 확답을 하지 않았다. 초기였으니까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임신 중기가 지나도 엄마의 반응이 뜨뜻미지근했다.

“어머니, 슬슬 비행기표 끊을까요?”

라는 남편의 물음에도 엄마는 가타부타 대답이 없었다. 그저 예정일이 언제냐고 확인하는 정도.


엄마가 오든 안 오든, 우리가 낳기로 한 아이는 우리가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던 나는, 남편에게 한 달간의 육아휴직을 요구했다. 남편은 입사한 지 일 년이 갓 넘은 상황이었기에 좀 난처해했지만, 그래도 가정이 우선이었기에 내 요구를 들어주었다.

 (이때 받은 한 달간의 육아휴직으로 인해 그해 남편의 상여금이 깎였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업무 실적이 아닌 다른 타당하지 않은 이유로 평가절하 된다는 것은 직장인에게 매우 참기 힘든 일이다. 이 일로 남편과 나는 몹시 분개했지만, 둘째 때는 육아휴직을 포기했다. 어쩌겠는가. 우리는 힘없는 을인 것을.)


임신 후기를 지나 산달이 가까워졌을 때였다. 남편이 육아휴직을 받기로 했다는 말을 들은 엄마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럼 난 안 가도 되겠네. 홍 서방이 알아서 잘하겠지. 무슨 산후조리에 둘 씩이나 필요하냐? 호강에 겨웠네.

라고 했다. 언제나처럼 나는,

네, 괜찮아요. 안 오셔도 돼요.”

라고 대답했지만 솔직히 괜찮지 않았다.


그래, 산후조리에 둘 씩이나 필요 없지. 남편은 요리도 잘하고 집안 일도 웬만큼 잘하니까 걱정 없는 게 사실이다. 남편을 잘 아는 엄마가 마음을 놓는 것도 이해는 한다.

그리고 사실 엄마에게 꼭 와야 할 의무는 없지 않은가. 아이를 낳기로 결정한 것은 나와 남편이니까. 엄마가 도와주시면 감사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부모인 우리가 책임을 지는 것이 맞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내 머리가, 내 이성이 위와 같은 이유를 아무리 나열해도 서운함이 엄습하는 내 마음은 납득시키지 못한다.



나 6살 때 엄마가 버리고 갔잖아요.

그럼 미안해서라도 더 잘해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런데 어떻게 다른 엄마들보다 더 못해요? 남들은 다 해주는 산후조리도 지금 안 해주겠다는 거잖아요.

게다가 호강에 겨웠다니. 엄마 진짜 너무 하시네요. 나한테 미안하긴 해요?


엄마는, 내가 엄마 없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려고도 안 하잖아요.

다른 사람들 마음은 그렇게 속속들이 잘 헤아리면서 내 마음은 들여다보려고도 하지 않잖아요.


엄마 원망하면 나만 힘들다고 원망하지 말라고 하셨죠?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솔직히 엄마한테 듣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건 내가 스스로 극복해야 할 문제잖아요.


저는 엄마의 사소한 말 한마디에도 쉽게 상처 받고 서운해지는데, 엄마는 너무 태연하게 아무렇지도 않게 저를 대하시는 것 같아요. 마음의 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사람처럼.

나는 너무 무거운데 엄마는 참 홀가분해 보여요.


한국 갈 때마다 너무 짧게 있다 간다고 매번 뭐라고 하시죠?

근데 그게 제 잘못인가요?

저도 친정에서 3-4일 푹 쉬다가 오고 싶어요. 근데 아버지 집 따로, 엄마 집 따로 가야 하잖아요.

그것 때문에 기차도 몇 번씩 갈아타고 얼마나 힘든 지 아세요? 시댁보다 친정을 더 길게 가는 것도 눈치 보이는데.

한 번씩 너무 짜증이 나요. 제 잘못이 아닌 일로 저와 제 가족이 몸 고생 마음고생 다 하고, 여기서도 저기서도 짧게 있다 간다고 욕까지 들어먹잖아요.

이거 정말 이상하지 않아요?

오히려 제가 엄마한테 따지고 싶어요.



글로 아무리 쏟아내도 마음이 후련해지지 않는다. 당사자 앞에서 퍼부으면 좀 나아지려나. 차마 그렇게는 하지 못하겠다.

엄마의 가시 돋친 말에 똑같이 가시 돋친 말로 대꾸하고 싶지 않다. 그렇게 또 서로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기에는, 우리는 이미 너무도 많은 상처를 끌어안고 살아가고 있으니까.


'너를 버리고 간 내가 죄인이다'라는 태도로 나를 볼 때마다 엄마가 미안해하고 만사에 저자세로 나오기를 바라는 것일까?

그건 아닌 것 같다. 엄마가 그렇게 나온다면 엄마를 만나는 것이 그리 유쾌하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과거를 훌훌 털어버리고 오로지 현재만을 이야기하는 지금의 엄마를 만나는 것 역시 썩 유쾌하지는 않다.

케케묵은 과거의 일을 들먹여 엄마를 단죄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다만, 지난날 내가 받은 상처를 엄마가 보듬어 주기를 원한다.

과거의 이야기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툭 털어놓고 이야기할 수 있기를,  엄마가 내 옆에 없었던 그 시간 동안 내가 얼마나 힘든 세월을 살아왔는지 알아주기를, 그리고 엄마에게 위로받기를.


우리에게 그런 과정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18년 만에 다시 만났을 때 잠시나마 그런 이야기들을 편지로 나누기도 했었고, 미안하다는 엄마의 사과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엄마는 급하게 과거를 청산하고 앞으로 나아가기를 바랐고, 나에게 그 과정은 충분하지 않았다.

엄마를 다시 만나 들떠있었던 그때의 나는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말이다.  


엄마는 과거를 묻었고, 나는 아직도 완전히 과거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우리의 이러한 온도 차이가 엄마와 나를 점점 멀어지게 만들고 있나 보다.


어쩌면 엄마가 현명한 것일지도 모른다. 과거에 얽매여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삶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나 역시 과거 따위 훌훌 털어버릴 수 있다면 그러고 싶다.

하지만 엄마의 충분한 공감과 위로 없이는, 내 안에 6살짜리 아이는 언제까지고 자라지 못할 것만 같다.

충분하다는 것이 얼마만큼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러나 적어도, 과거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룰이 엄마와 나 사이에 존재하는 한 충분한 공감과 위로는 받기 어려울 것 같다.



어쨌거나 엄마는 그때 결국 오지 않았고, 남편은 혼자서 산모인 나의 식단을 신경 써가며 요리를 하고, 각종 집안일을 하고, 신생아의 새벽 수유도 도와야 했다.

한 달간의 육아휴직이 끝났고, 우리는 일상으로 돌아와 힘겹게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첫째를 출산한 지 세 달이 다 되었을 때쯤, 엄마가 갑자기 오시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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