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당신은 이제 막 새로 태어날 것입니다. 당신이 원한다면 고통을 느끼지 않도록 해줄 수 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위의 질문을 받는다면 재미 삼아 ‘고통을 느끼지 않게 해 주세요.’라고 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슬픔, 절망, 분노가 스스로를 단단하게 만들고 성장시켰음을 아는 사람이라면 ‘고통을 느끼겠습니다.’라고 답하겠지요.
저는 한 가지 조건을 더해보려고 합니다.
태어나 보니 노름에 빠지고 알코올에 중독된 사람이 나의 부모였다. 아빠는 노름에서 지고 오면 나를 때렸다. 엄마는 매일 술을 마셨고 맞아도 싸다며 나를 방치했다. 이렇게 맞다가는 죽을 것 같아서 할머니 집으로 도망쳤다. 그곳에서 삼촌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아르바이트를 했고 돈이 마련되어 고시원을 얻었다. 여는 때와 마찬가지로 작은 침대에 몸을 뉘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눈을 떴는데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옆에 있는 누군가 말했다. “마취 때문에 움직이기 어려워요.” 시간이 지나자 다리 끝에서부터 칼로 쑤시는 듯한 통증이 시작되었다. 나는 온몸에 화상을 입었다. 그날 저녁 신이 나에게 찾아와 ‘고통’에 대한 선택지를 주었다.
당신의 선택이 궁금해집니다. 선택하는데 필요한 시간이 얼마였는지도요.
만약 고통을 빠르게 선택했을 수도 있겠지요. 어쩌면 저와 비슷하게 선택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래 적어드릴 문장을 읽고 조금 더 생각할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빅터프랭클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사람취급을 받지 못했지요. 그는 ‘인간에게 의미 있게 부과된 고통’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때 우리는 먹는 것이나 굶주림, 추위나 잠, 죽도록 일하거나 얻어맞는 것 같은 비인간적인 문제가 아닌 본래의 인간 고통을, 본래의 인간 갈등을 얼마나 그리워했던가요. 동물적인 고통과 위험이 아닌 인간적인 고통과 문제와 갈등이 있던 시절을 얼마나 애달프고 슬프게 회상했던가요? 우리가 간절히 바란 것은 고통과 문제와 갈등 없이 사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고통받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에게 의미 있게 부과된 고통다운 고통을 말입니다.”
의미 있게 부과된 고통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깨닫게 하고, 우리를 조금 더 단단하게 합니다. 그러나 프랭클의 글을 읽고 나면 궁금해집니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부여된 고통도 의미 있게 '부여된' 것인가.
제가 쓴 글은 허구이지만 그보다 더 최악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말로 꺼내기도 어렵고 영화에도 나오기 힘든 이들이 실제 제 눈앞에 있습니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아우슈비츠에 끌려온 사람처럼, 고통 속으로 끌려온 이들이 삶에 대해 성찰을 하기도 하고, 예술 같은 창조적 승화를 통해 성장하기도 합니다. 그 과정 속에 제가 함께 하고 있기에, 개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부여된 고통도 의미 있는 고통이 될 수 있다는 프랭클의 말에 동의합니다.
그런데 불우한 가정환경과 트라우마적 상흔이 인간다운 고통인가를 되묻게 됩니다. 프랭클이 말하는 인간다운 고통에는 삼촌에게 당한 성폭력도 해당되는 것일까요. 어쩌면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다를 것 없는, 더 참혹한 삶이라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 신체적, 정서적 폭력을 받는 것, 믿었던 친족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하는 것이 과연 인간다운 고통인지 저도 답할 수 없습니다.
아니, 인간다운 고통은 아니겠지요.
그러나 그런 분들께 한 가지 전할 말이 있습니다.
고통의 크기와 종류를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우슈비츠는 개인이 노력한다고 고시원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결국 가스실로 가게 될 뿐입니다.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으니 "고통을 선택하겠습니다."라고 답해야 할 텐데 여전히 망설이게 됩니다.
화상의 고통 때문입니다.
전신화상을 입었던 이지선 교수는 매일 온몸에 흐르는 피고름 닦아내고 소독하기 위해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죽음을 부르는 것 같았다고,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비명을 지르는 것이 마치 지옥 같았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상상만으로도 아프고 소름이 돋습니다.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는 이 고통이 너무 무섭습니다.
그렇게 망설이던 저는 프랭클의 설득에 답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정신병원에서 근무할 때 가족, 일상과 떨어져 정신병원에 입원한다는 현실에도 무덤덤한 사람, 속옷만 입은 채 병원을 뛰어다니면서도 수치심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을 보았다고 합니다. 온몸에 마비가 와서 주사에 찔리고 깊은 상처에 피가 나도 웃고 있는 사람이 앞에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환자들이 부러울까요. 고통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의미 있다는 프랭클의 말에 덥석 동의하지 않을까요.
인간을 인간이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것이 고통을 느끼는 것임은 분명합니다. 고통을 느낄 때 인간은 자신의 내면과 환경을 돌아보며, 자신을 절제하고 겸손을 배우게 됩니다. 타인과 세상을 긍휼 하게 여기는 마음도 그들의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인간다움' 때문입니다.
부모의 학대를 받고도 힘들지 않았다면 그곳을 뛰쳐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겠지요. 몸의 통증을 느끼지 않는다면 병원에 가지 않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면 몸과 마음이 죽어가는 것에도 무감각해지겠지요. 병들어가고 있음을 모른 채 죽음을 향해 가는 것을 그 누구도 축복이라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여전히 궁금합니다.
‘인간에게 의미 있게 부과된 고통’, ‘고통을 경험하는 것의 인간다움’ 이 부모의 학대 속에서 주변 사람들에게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하고 방치된 아이들, 어른들로 인해 경쟁사회에 던져지고 죽음을 선택하는 아이들에게 제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의 말인지를요.
그들에게 고통을 가한 '어른'인 내가 방관자이자 가해자인데
피해자들에게 고통은 인간임을 증명하는 것이니 견디라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저는 그 말을 아주 당당하게는 못 할 것 같습니다.
오늘도 프랭클 아저씨의 책을 보며 인생의 의미를 배웁니다.
그러나, 내 앞에 앉아있는 아이들에게 차마 할 수 없는 말이기에
프랭클 아저씨에게 배운 인생의 이야기를 이렇게나마 글로 써내려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