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랭클아저씨는 틀렸어(7) 현존재의 의미충족

by Little Tree

“인간은 행동하고 창조하면서, 즉 무언가를 실현하면서 자신의 현존재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또한 체험하면서 자연과 예술과 인간을 사랑하면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인간은 기회가 주어진 곳에서 삶에 가치를 부여하고 그 안에서 의미를 발견하며 현존재에 의미를 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삶에 ‘예’라고 답할 때 (빅터프랭클)-


빅터프랭클은 삶의 의미에 대해 강조했다.

그는 매 순간 생존을 위협받고, 인간을 도구로 취급했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삶의 가치를 고민하며 지나온 삶에 감사하는 사람들을 보았고

매분 매초 생과 사를 오가는 사람들을 마주했던 병원에서도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남은 삶을 고귀하게 여기며 타인을 배려하고, 별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의미를 찾은 사람들은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마저도 삶의 일부로 기꺼이 받아들였고

고통 가운데서 깨닫게 된 것들에 감사를 표현했으며

죽는 순간까지도 간호사가 나로 인해 잠에서 깨지 않기를 바라며 타인과 세상을 품었다.

과거에 미련을 두는 후회와 미래를 두려워하는 불안에 사로잡히지 않고 ‘지금-여기’의 삶에 집중했다.




과거를 추억하며 감사하고 원하는 미래를 이루기 위해

오늘 내게 주어진 것을 실현하는 삶(행동하는 삶)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이는 인생이 내게 요구하는 것을 충실하게 해내는 삶이며

동시에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는 실재적인 작업이기 때문이다.


생각을 행동과 삶으로 실현해낼 때 의미와 가치는 ‘실재’로 드러나게 된다.

어떤 사람이 “이제는 운동을 열심히 해야 할 것 같아요.”라고 말할 때 우리는 의미 있는 생각이라고 동의할 것이다. 특히, 어떤 사람에게는 운동을 하겠다는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낸 것 자체로도 의미 있는 발전일 수 있다.

그런데 하루가 지나고 한 달이 지나고 1년이 지났음에도 “운동을 해야 할 것 같아요.” 라고 말한다면 그 생각이 의미가 있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사과를 먹을 것이다.’ 와 ’사과를 먹었다.’의 차이처럼 우리의 욕구나 소망을 실현할 때 만족을 얻듯 생각을 실현할 때 만족감을 느낀다. 사과를 먹는 상상, 몸짱이 되는 백일몽을 의미 있다고 평가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떤 상황에서는 그 방법이 매우 유용하며 유일할 수 있다는 것도 인정하지만, 욕구를 충족하지 못할 때 오는 불안을 잠시 낮추기 위한 방법일 뿐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물론 ‘실재’하는 것만이 가치 있다는 주장에 100%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통찰, 인지 왜곡의 수정, 의미 부여 등은 생각의 변화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각의 변화가 삶, 과제, 감정과 신체의 변화에 반영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새싹을 틔우지 못하는 씨앗일 뿐이다. 씨앗이 없으면 새싹이 나지 않기에 소중하지만 싹이 나지 않는 씨앗이라면 그것은 씨앗 자체에 문제가 있거나 주변 환경의 문제가 있는 것임을 인지해야 한다.



행동하는 것, 실현하는 것의 중요성을 인지했다면 이제는 내가 무엇을 하고 있고, 그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야 한다. 사실, 프랭클 아저씨의 책에서는 의미 부여 방법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래서 나는 이 방법을 수용전념치료에서 찾았다. 수용전념치료에서는 고통을 수용하고 의미있는 삶을 살아가기 위한 과정을 6각형 모형으로 정리하였는데 그 중 한 꼭지가 '알아차림'을 통해 현재 순간에 접촉하는 것이다. 알아차림이란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비판없이 바라보는 것이며 그것은 현존재(지금-여기에 존재하는 나)에 대한 접촉을 의미한다. 현재 순간에 접촉할 때 비로소 내가 실현하고 있는 행동에 대해 알게 되고 그 행동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게 된다.


학교 상담실에 앉아서 나를 혹은 상담실을 찾아오는 학생들을 따뜻하게 맞아주고 있는 나

힐링 프로그램을 마치고 너저분해진 상담실을 정리하며 즐거워하는 학생들을 떠올리는 나

등교를 거부하는 학생의 담임선생님과 학부모의 통화를 마치고 학생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나

상담이 없는 시간에는 교육청에서 온 공문을 확인하고 학교를 위해, 교육 현장을 위해 일하고 있는 나

귀찮고 힘들지만 가족을 위해 김장을 하는 부모님의 일손을 거드는 나

충동적이라 실수가 많고 여기저기 눈치를 살피는 바람에 골치가 아픈 나를 위해 찬 바람을 쐬며 공원을 걷는 나



알아차린다는 것은 내가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하고 있으며, 그것이 나를 둘러싼 타인과 세상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포함한다. 이는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의 원’ 안에서 유일하게 ‘나만이 할 수 있는 것’‘해나가는 나’를 따뜻한 시선과 넓은 마음으로 바라볼 때 가능하다. 넓은 마음이란 다른 사람들과의 비교나 판단 없는 마음을 말한다. 그 시선으로 나-타인-세상을 바라보고 각각의 연결고리에서 찾은 의미는 단단하여 쉽게 흔들리거나 퇴색되지 않는다. 재단사 조수가 상담사인 빅터프랭클과 자신의 일을 비교하며 낙담할 때 빅터프랭클이 ‘당신에게 주어진 인생의 원에서 재단사 조수의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당신밖에 없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지금 내가 있는 상담실에서 나에게 찾아온 학생을 상담할 수 있는 사람은 오은영 박사도, 법정 스님도 아닌 ‘나’인 것이고, 그 학생을 상담을 하는 나는 인생을 책임지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주어진 것에 책임을 지며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다.


알아차림에서 ‘감정’은 중요한 요소이다.

의미 있는 행동은 긍정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기쁨, 환희같이 다른 감정들과 구분이 쉬운 선명하고 강렬한 감정일 수도 있고, 뿌듯함, 평온함, 감사함 같은 잔잔하지만 안정감을 주는 감정일 수도 있다. 물론 수용소에 있거나 극심한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리움, 애잔함, 두려움, 초조함 등 여러 감정들이 섞여 있을 것이며, 의미 있는 것에서 야기되는 긍정적인 감정은 매우 작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 작은 감정, 즉 의미 있음에서 오는 감정이 삶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기에, 우리는 그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실현하는 삶에서는 불편한 감정도 의미가 있다. 목표에 도달하지 못할 때의 실망, 관계 갈등 속에서의 슬픔과 화남, 실수할 때의 부끄러움 등은 모두 욕구와 관련이 있고 이 욕구는 의미를 추구하는 삶의 일부이다. 따라서 혹시라도 실현하는 삶에서 부정적 감정을 느낀다면 ‘의미’를 깊이 탐색하는 것이 필요하다. 타인에게 실망했다면 상대방과의 관계에 대한 의미(욕구)를 살펴봐야 한다. 타인이 내게 어떤 의미인가를 확인하면 그 사람과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이며 그에 대한 나의 기대, 행동 등을 재정립할 수 있게 된다.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고려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속도’와 ‘멈춤’이다.

‘속도’란 행동-정신(생각)- 마음(감정)의 속도를 맞추는 것인데, 내가 하는 일에 대해 인지하고 그 일이 나에게 어떤 의미이고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는지 들여다보는 것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누군가는 3분, 1시간이 필요하고 혹자는 1년이 걸릴 수도 있다.


가끔 “내가 지금 뭘 하려고 했지?”라고 묻는 때가 있다. 해야 할 일들이 쌓여있고 유독 정신이 없는 날, 사무실 수화기를 들었는데 누구에게 전화하려고 했는지 잊게 되는 날은 퇴근길에 가슴이 텅 빈 것처럼 느껴진다. 많은 일을 했지만 공허함이 뒤덮는다. 내가 했던 일, 하고 있는 일, 해야 할 일들을 소화시키지 못해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상태가 되면 그 일에 의미를 부여할 수 없고, 의미가 없는 일은 공허함을 가지고 온다. 행동의 속도에 생각과 마음이 따라가지 못하는 순간이 오면 잠시 멈춰야 한다. 하루 5분 산책을 하거나, 책상에 앉아 잠시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히고 내가 무엇을 했고, 지금 내 몸과 마음은 어떤 상태이며, 나와 일과 환경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들여다보아야 한다. 어떤 판단도 없이 있는 그대로 나를 바라보는 시간은 ‘실현하는 나’, 즉 인생의 의미를 실재적으로 부여한 나를 알아차리는 시간이다.



빅터프랭클이 말한 의미를 부여하는 세 가지 방법 중 ‘행동하고 창조하면서, 즉 무언가를 실현하면서 자신의 현존재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은 알아차림에서 시작되며, 알아차림은 ‘멈춤’으로 가능하다. 넓은 마음으로 나를 바라보는 ‘멈춤’은 너무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나’를 잃어버리지 않고 ‘의미’를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하며 의미를 부여하는 시간인 것이다.


글을 쓰면서, 오늘은 프랭클 아저씨의 말에 토를 달게 없다는 생각을 했다.

방법론에 대한 부분 좀 알려주세요! 라고 말하고 싶긴 했지만, 꼴에 상담을 공부했다고 이런 저런 이론들이 떠오르며 정리가 되었다.


그런데 불쑥 상담했던 학생이 떠올랐다.


알아차릴 시간을 주지 않는 곳

멈추면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호들갑 떠는 곳

‘실현하는 삶’보다 0.05점으로 인해 등급이 바뀌고 대학이 바뀌는 곳

이곳에 있는 학생에게 ‘공부하는 너의 삶이 의미 있는 것’이라는 말을 한다면, 학생의 마음에 닿을 수 있을까.

만약, 내 말로 이 학생이 느슨하게 공부하여서 등급이 떨어지면 어떻게 할까.

공부하기 싫은 학생들에게 그 말이 '대충 공부해도 괜찮아'로 들리지 않을까.


인간의 행동 자체에 의미가 있음을 강조하지만 결과에 대한 책임을 상실해버린 말 같기도 하다.


나의 이 불안에 대해 프랭클 아저씨는 뭐라고 답할지 궁금해지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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