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용소에서 풀려난 사람이 해방을 기뻐할 수 있기까지 꽤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실제로 그는 기뻐하는 것을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합니다. (빅터프랭클의 '그럼에도 삶에 ‘예’라고 답할 때') ”
‘억압’과 ‘억제’는 차이가 있습니다.
정신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감정이나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억누르는 억압과 의식적으로 누르는 억제 모두 일상을 유지하는데 일정 부분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인식하여 건강하게 해소하지 않고 꾹꾹 누르다 보면 ‘신체화 증상’으로 나타나거나 최악의 경우 ‘해리’를 가지고 옵니다.
수용소에서 지낸 사람들은 ‘생존’ 하기 위해 불안과 두려움, 분노, 슬픔 등의 감정을 억압했을 것 같습니다. 당연하겠지만 기쁨과 환희 같은 감정도 느끼지 못했겠지요. 과거에 경험했던 기쁨을 떠올리는 것이 고통스러운 사람들은 그때의 기억을 애써 지우려 했을 수도 있습니다.
수용소의 삶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우리 주변에도 ‘생존’을 위해 감정을 억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유아기 때 부모로부터 지속적으로 거부당한 아이는 회피형 애착을 형성하게 됩니다. 감정(애정)을 표현해도 반복적으로 거절당하니 실망하지 않기 위해 혹은 좌절감을 회피하기 위해 감정을 억누르다 보면 어느새 감정에 접촉하지 못하게 되고 신경증적 장애나 성격장애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어린 시절, 지속적으로 외상을 경험한 사람도 견디기 어려운 감정을 차단하기도 합니다. 가끔 TV에서 학대를 당해도 그냥 맞기만 하고 그 어떤 분노도 슬픔도 표현하지 않는 사람이 나올 때가 있는데 감정을 억압한 사람들의 대표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감정을 억압하는 것이 ‘생존’과 관련이 있고 무의식적이고 자동적인 반응으로 이뤄지게 되면 고통스러운 상황이 끝났음에도 감정을 느끼는 것이 어렵게 됩니다. 수용소에서 나온 사람들이 해방의 기쁨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애썼던 뇌와 몸의 반응이라는 것이 참 슬픕니다.
작년, 학교를 졸업한 A는 만남 이후부터 어제까지 매일 생존을 확인하는 학생입니다. 지금은 ‘잘 살 거예요.’라고 말하는 학생의 첫 만남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담임선생님 손에 이끌려 위클래스로 들어온 A의 눈빛은 꺼져가는 촛불 같았습니다. 초첨이 없는 멍한 눈빛과 ‘당신도 별 소용없어.’라는 말투로 자신의 아픔을 담담하게 말하는 A는 분노와 슬픔의 감정을 참기 어려울 때마다 몸에 흔적을 하나씩 새겼습니다. 5개월 정도 지났을 즘, 부모님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데 A가 저를 향해 소리쳤습니다. “그래서 저보고 어쩌라고요.” 아주 큰 소리로 버럭 화를 내더니 엉엉 우는 것을 보며 저는 속으로 외쳤습니다. '아. 이제 됐다.'
짧지만 긴 5개월의 시간 동안 억압하고 있던 부모님에 대한 화, 원망을 안전하게 마주할 수 있도록 천천히 다가갔습니다. 화가 나도 괜찮고, 원망해도 괜찮다는 것. 감정은 나쁘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A의 삶도 어쩌면 수용소의 삶이었을 것입니다. 생애 첫 기억이 부모님의 싸우는 소리와 자해를 하는 자신이었을 만큼 차갑고 잔인했던 곳에서 ‘그럼에도’ 살아야 했기에 자신의 생존에 절대적이었을 부모님에 대한 미움, 화, 분노를 억압했던 것입니다.
수용소를 나온 수감자들도, A도 시간이 흐르면 괜찮아지겠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무의식적인 정신과정을 스스로 깨닫고 고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안정적이고 끝까지 기다려줄 수 있는 사람이 천천히 감정을 마주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이때 우리가 조심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프랭클의 책에는 수용소에서 해방된 수감자들이 들었던 두 가지의 말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무척 고생했어.” “우린 아무것도 몰랐어.”
“나도 힘들었어.” 이 말은 웬만하면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고통의 크기를 비교할 수 없고 누구나 고통을 겪으면 힘들다는 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무의미한 고통과 의미 있는 고통이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인간의 불완전성으로 오는 고통, 발달 과업이나 환경 변화로 오는 고통, 관계에서 오는 갈등, 즉 인간다운 고통을 생존을 위협하고 무의미하게 경험되는 고통과 동일 선상에 놓고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것도 몰랐다."에 대해 프랭클은 이 말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무지의 바탕을 이루는 책임회피일 뿐인지 고민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실, 우리가 만나는 고통받은 사람의 과거를 알 수 없고 책임질 수 없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내 주변에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음을 알지만 그들을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사회적 약자나 고통받는 이들에게 관심이 없거나 그들을 위해 행동하지 않았던 우리라는 집단이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어떤 말도 할 수 없는 '침묵'이나 ‘미안해’ 아닐까요.
A의 고통 앞에서 ‘샘이 미안해.’라는 말을 참 많이 했습니다. 정서적/신체적 학대를 했던 부모님, A를 이용하기만 했던 성인 남자친구를 대신해서 미안하다고 말했습니다. 정말 미안했습니다. 어른이라는 집단을 대표해서, 어린 A를 지켜주지 못했던 어른들을 대표해서 미안하다고 말했습니다. 엄마에게, 전 남자친구에게 듣고 싶었던 말이었겠죠. 그러나 자신의 삶에 대해 아파하고, 자신의 고통에 함께 분노하는 사람이 자신의 상처에 대해 온 마음을 다해 미안하다고 전하는 말에는 힘이 있음을 저는 믿습니다.
그렇게 어른을 대표한 저의 사과는 얼어있던 A의 마음을 녹였습니다.
생존을 위해 선택한 ‘억압’을 질병이라 부르며, 위로와 공감 대신 약물을 권하는 사회에서 해방된 수감자들이 편히 있을 곳은 없습니다. 해방을 누리지 못한다며, 기뻐하지 않는다며, 미쳤다며 손가락질하는 (무관심했던 집단으로서) 무책임한 사람들로부터 해방된 수감자는 숨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조금은 덜 고통스러웠던 우리가, 혹은 상처를 회복한 우리가 ‘해방된 수감자’의 찢어진 마음 앞에 ‘힘들었을 텐데 몰랐어. 미안해.’라고 건네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운이 좋아서 수용소로 끌려가지 않은 우리가, 운이 나빠 수용소로 끌려간 이들에게 ‘집단적 책임 의식’을 가지고 함께 살려내는 날이 오기를 바라며,
해방된 수감자로 살았을 프랭클 아저씨의 말에 사사건건 토를 달았던 것에 미안하다고 말하며, 글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