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는지 아는 사람은 어떻게 사는지를 거의 모두 견디어 낸다.(빅터프랭클)”
프랭클은 ‘왜’에 대한 것을 정신적 버팀목으로 설명했다.
‘미래에 대한 버팀목’과 종교적인 사람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영원 안에 있는 버팀목'
이 두 가지가 인간을 고통 중에도 견디게 하는 힘이라 말했다.
‘미래에 대한 버팀목’
오지 않은 미래를 꿈꿀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잊고 싶은 과거와 고통스러운 현실은 바꿀 수 없지만, 미래는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은 오늘을 열심히 살게 한다. 감옥 같은 학교 안에서 몸부림치다가도 3년 뒤에 과 점퍼를 입고 캠퍼스를 누비는 것을 상상하면 영어지문 한 개라도 들여다보게 된다. 지금 내 앞에 있는 학생이 볼펜을 들 힘조차 없고 1년이 지나도 나아지지 않을 것 같지만, 무사히 졸업할 것이란 기대를 하지 않는다면 남은 시간을 버틸 수 있을까.
‘영원 안에 있는 버팀목'
나는 종교적인 사람이라 영원 안에서의 버팀목에 대해서 동의한다. 가장 고통스러웠고 별 볼일 없는 내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고 나를 살게 한 것이 '종교' 였기 때문이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이 이유가 있던 것처럼 나의 고난에도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내가 다듬어지고 있는 과정이라는 고난에 대한 합당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 여겼다. 이유가 있다면 힘이 들어도 견딜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영원이라는 것 또한 미래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버팀목은 모두 '미래'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라고 볼 수 있다.
프랭클은 버팀목이 사라진 어르신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한 어르신이 3월 말에 풀려난다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분은 매 순간 3월 말이면 해방될 거라 말하며 수용소의 생활을 견뎠지요. 그런데 3월 중순까지도 군사 상황이 나아지지 않았고 어르신은 눈에 띄게 침울해지면서 3월 29일에 고열에 시달리다가 3월 31일 돌아가셨습니다."
정신적인 버팀목을 상실하는 것은 심리적으로 무너지는 것을 의미하고 이는 곧 육체적인 쇠락으로 이어진다. 정신적인 버팀목은 말 그대로 정신의 영역이기 때문에 이를 상실하게 되었을 때 발생하는 문제들에 대한 특별한 치료법은 없을 것이다. 누군가와 대화하며, 혹은 자기 스스로 새로운 버팀목을 부여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겠지만 수용소 안에서 하루하루 생존과 싸우며 사는 이들이 서로를 어찌 돌볼 수 있었을까.
어르신이 무너진 이유는 정신적 버팀목에 유효기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3월 말이라는 제한을 설정하고 그날을 기다리면서 희망을 품고 사셨던 어르신. 그분이 버틴 시간들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그분의 생은 거기까지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그분의 죽음이 버팀목의 부재와 관련이 있고 어르신의 죽음 다음날이 해방이었다면 그 죽음이 참으로 억울하고 야속하고 아쉽고 한탄스럽지 않을 수 없다.
프랭클의 정신적 버팀목은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수용소에서 만난 사람들의 심리상태에 대해 강연하는 꿈'이었다고 한다. 프랭클 아저씨의 정신적 버팀목 앞에 '내년'이라는 유효기간을 뒀다면 어르신과 비슷한 결말이었을까. 아니라고 본다. 아마 기한을 미뤘을 것이다. 미루고 미루다 버팀목을 포기했을지라도 살아갔을 것이다. 정신적 힘이 있는 사람이란 기대가 무너질 때에도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생각과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이다. 버팀목이 사라졌다 하여 호락호락 죽음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글을 쓰면서 상담하는 학생들이 떠올랐다. 내신 1등급이 올라가면, 대학에 들어가면, 돈을 많이 벌면이라는 제한을 두고 그것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아이들에게 프랭클 아저씨는 뭐라 말할지 궁금했다. 학급 친구들에게 대놓고 까이고, 비웃음 당하는 상황에서 무너져 내린(우울과 불안, 공황장애, 등교거부) 학생에게 "교실에서 공부하는 것이 책임지는 삶"이라 말할 수도 있겠지.
제한을 두지 않는 정신적 버팀목.
어쩌면 나는 이것을 철저히 무시하는 상담교사일지도 모른다.
'조금만 노력하면' '내년이 되면' '졸업을 하면'이라는 가정을 두고 학생이 설정한 버팀목의 제한을 조금씩 확장시키는, 금세 사라질 솜사탕 같은 말로 유혹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작은 나라의 작은 학교, 그 보다 작은 상담실에 있는 내가
감히, 두렵고 떨리는 심정으로 말하건대
버팀목도 없고, 정신적 힘도 없는 아이들의 마음에 당장 버팀목의 뿌리를 깊이 내리고 고통을 의미 있는 경험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금의 고통에서 어떻게든 살게 하는 것, 오늘이라는 버팀목의 제한을 내년으로, 고등학교 졸업으로 연장시키고, 그 안에서 조금씩 버티게 하는 것, 버텨지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 먼저라 생각한다.
수용소 어르신에게 "어르신, 제가 꿈을 꿨는데 해방이 내년이래요. 내년까지 기다려봐요."라고 말했다면 어르신이 살아내셨을까 생각해 본다. 내년의 실망감은 일단 내년에 생각하고, 지금 당장 어르신을 살릴 수 있다면 달콤한 솜사탕이라도 드리고 싶은 것이 솔직한 내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