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힘들지 않았다.
제법 날이 뜨겁다.
누가 그랬다. 유라시아 횡단에 제일 쓸데없는 게 캠핑장비와 쓸데없는 옷이었다고, 어렴풋이 블로그에 읽었던 글 덕분에 우리는 최대한 옷을 줄였다. 그런데 날이 추웠다. 러시아 사람들마저 이상기온이라고 할 만큼, 시베리아의 7월은 매우 추웠다.
모스크바 도착 삼 일 전, 날이 뜨거워졌다.
매번 비 때문에, 추위 때문에 챙겨두었던 노란 우비를 오늘은 입지 않았다. 그래도 얇은 옷을 여러 개 껴입는다. 바람이 따스하지만 땀이 줄줄 흐를 정도의 온도는 아니다. 분명 한국이었다면 바이크를 꺼낼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것이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 아침부터 부산을 떨었건만 우앗, 소리를 내며 잠시 바이크를 세워야 했다. 사이드미러가 갑자기 위잉 하며 푹 고꾸라졌다.
"아앗. 멈춰. 멈춰."
놀란 나와 더 놀란 신랑은 갓길에 바이크를 세운다. 그가 다시 찬찬히 보더니 간단히 조이면 된다고 안심을 한다. 진동이 생각보다 엄청나다. 잔잔한 진동이 매일 반복되는 탓에 나사가 풀린 모양이다.
문득 다른 곳은 괜찮을까? 걱정이 된다.
찬찬히 바이크를 요리조리 살펴본다. 두카티코리아에서 점검을 여러 번 받으며 나사마다 펜으로 표시를 해놨다. 선으로 그어놓은 게 일치하지 않으면 풀린 것이다. 눈으로 볼 수 있는 간단한 점검이 가능한 이유이다. 바이크에 얼마나 많은 나사가 있는지 하나하나 표시를 해 놓은 엔지니어들의 수고에 감동한다. 다시 한번 가슴을 쓸어내린다. 아주 사소한 변화 하나로도 크게 사고가 날 수 있다.
아침의 소동 탓에 우리는 맘이 급해졌다. 얼른 달려서 숙소에 도착하고 싶은 마음뿐이다. 날이 환하니 마음이 상쾌했는데 괜한 부담감이 마음에 들어왔다. 나보다는 그가 더 놀란 눈치다. 가방에 실어놓은 장비 도구가 빛을 발하였지만 기왕이면 그런 일이 없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모스크바에 다가왔다는 생각만으로 가볍다. 길 상태가 점점 좋아지고 차들이 많아진다. 굴러다닐 수 있는 게 신기해 보였던 오래된 바게트 빵 모양의 자동차가 이제 드물게 보인다. 공산주의 시대의 디자인이라 모두에게 찍어내서 배급했던 차라서 앞모양은 다 똑같은데 어떤 건 봉고이고, 어떤 건 트럭이다. 귀여운 모양에 만날 때마다 소리를 질렀건만 이제는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대신 트럭도, 자동차도 익숙한 로고가 박힌 것들이 많아졌다. 러시아에서 우리나라 차가 인기라는 말이 틀린 건 아닌가 보다.
길도 좋아지고 주유소도 깔끔해졌는데 이 길은 바이크로 가지 않고 기차를 타고 간 이들이 생각났다. 중간에 유럽에서 러시아 동쪽으로 가던 오스트리아 친구 말로는 가장 지루한 코스가 끝나고 이제야 달릴만한 좋은 도로가 나타난 셈인데, 그 지루한 길에서 힘을 다 뺀 나머지 모스크바까지는 기차로 바이크와 몸 모두 맡겼다. 아마도 우리보다 삼, 사일은 먼저 모스크바에 도착할 것이다.
어떤 여행을 한 것인지 생각처럼 이루어지지 않는다. 꼭 횡단을 바이크로 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 기차도 한 번쯤은 타보고 싶은데, 아직 나는 라이딩이 힘들지 않다.
아니지, 이제는 라이딩이 힘들지 않다.
매 시간마다 남편은 내게 묻는다.
"괜찮아? 힘들지 않아? 힘들면 말해. 쉬자"
"응, 괜찮아. 좋아. 오빠는?"
"나는 괜찮아. 네가 힘들면 안 되니까 언제든 꼭 말해."
언제부터였더라. 내가 힘들지 않았던 게. 매일 일어나서 달리고, 주유하고 달리는 게 습관이 되고 어깨가 아프지 않았던 게. 아마도 핸들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고 어깨가 편안해진 날부터였을 것이다.
신기하게도 피곤하지만 즐겁다. 매일 바이크에서 내려오면 온 몸이 천근만근이지만 아침이 되면 다시 달리고 싶다. 역마살이라는 게 이런 느낌에 중독된 것이겠지. 그러나 내가 지금 즐거운 건 언젠가는 이 여행이 끝이 나고 내가 살던 고향, 대한민국 서울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어쩌면 내 인생의 마지막 러시아 횡단, 조금 지치고 힘들면 어떠랴. 그 또한 여행의 일부이다.
오늘은 우랄산맥을 지난다. 어느새 파란 하늘이 사라지고 검은 먹구름이 다가온다. 비가 어떻게 내릴지 가늠해본다. 소나기보다는 약간의 보슬비일 거라 판단하고 옷을 갈아입지 않고 산맥을 넘어간다. 줄줄이 사탕처럼 트럭과 자가용, 그리고 우리의 바이크는 꼬리를 물고 꼬부랑 산길을 올라간다. 신선한 풍경이다. 커다란 유라시아 대륙의 반 이상이 러시아이다. 새로운 풍경이 나타나도 아직 우리는 러시아에 있는데, 다른 나라에 와 있는 것 같다. 낮은 언덕과 드넓은 평원에 익숙하다 갑자기 만난 산길과 조금씩 내리는 비는 또 다른 추억이 될 것이다.
오르막길에서 내리막길로 기울기가 변하였다. 어디선가 점심을 먹어야 한다. 주유도 해야 한다. 산을 다 넘고 먹을까 하다가 익숙한 상표가 눈에 띈다. 서브웨이다. 미국 브랜드 아니던가. 주유소 옆에 익숙한 간판이 눈에 쏙 들어온다. 익숙한 샌드위치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러시아 음식 특유의 사워 소스와 부추 비슷한 야채를 피할 수 있는 메뉴이다. 우리는 점심을 이 곳에서 해결하기로 한다.
잠깐의 휴식과 순식간에 해치운 샌드위치와 커피가 아쉽다. 다시 달려야 한다. 푹신한 의자에 앉아 커피를 길게 마시고 싶었지만 그는 어서 달려 숙소에 도착하고 싶은 마음뿐인가 보다.
'달리는 건 힘들지 않아. 그저 잠시 쉬어가고 싶어.'
그 말을 하지 않았다. 무거운 몸을 일으켜 얌전히 재촉하는 그를 따라나선다. 잠깐 쉬는 찰나에 하루 일정이 꼬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나 역시도 잘 알고 있다.다음 주유소에서 또 쉬어가면 되니까. 200km마다 주유를 해야 한다는 게 다행이다. 그리고 이제 주유소도 제법 현실세계와 비슷해졌으니까.
다음 주유소도 크고 깨끗하다. 더운 날씨 덕에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샀다. 산맥을 넘어서며 보였던 먹구름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날씨가 변덕인 건지, 그만큼 우리 멀리 달아난 건지. 같은 하루에 벌어지는 느낌이 아니라 몇일의 날씨를 겪어내는 것만 같다.
널찍한 주유소 옆 공터에 바이크를 주차하고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기지개를 켠다. 햇살이 뜨거운데 그늘이 없다. 공기도 맑은 탓에 순수한 햇살이 그대로 내게 와서 부딪힌다. 그 따가운 느낌마저도 좋다. 언제 이렇게 맑은 아래 섰던가.
저 멀리 떨어진 그를 두고 혼자서 카메라 놀이를 열중하는 사이 누군가가 다가온다.
여행자는 여행자를 알아보는 법, 작은 캠핑카를 끌고 여행을 다니는 아저씨가 우리의 번호판을 보고 다가온다.
영어를 한마디도 하지 못하는 아저씨.
차 안에서 커다란 깃발을 꺼내와 우리에게 싸인을 부탁한다. 저 깃발이 어딘가에 걸리는 날, 아저씨의 여행은 끝이 나겠지. 차 뒤에 우리의 스티커를 붙인다. 보답으로 아저씨는 우리에게 깃발을 건넨다. 아저씨에게 특별한 의미인 거 같다. 나중에 국기가 어떤 의미인지를 찾아봤지만 우크라이나의 정치적, 역사적 의미가 있다는 것 정도만 어렴풋이 추측해볼 따름이다. 깃발을 한가득 사서 만나는 사람마다 선물하는 정성을 보면 분명 그에게는 인생을 관통하는 신념 같은 것일 텐데, 옳고 그르고를 떠나서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은 멋진 것이니까.
(그렇다고 모든 신념을 지지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우랄산맥의 끝자락에 이르니 늦은 오후이다. 얼른 숙소에 도착해야 하는데 도저히 지나칠 수 없는 곳이 나타났다. 한참 전에 멈춰 세우고 싶었는데 줄줄이 내려오는 차량의 흐름을 거스르지 못하고 기회를 엿보다 결국 제일 마지막 언덕을 넘자마자 멈췄다. 이미 가장 아름다웠던 뷰 포인트는 지나쳤다. 멀리 지나온 길이 보인다.
오후가 되면 몸이 지친다. 물론 숙소 앞에 바이크를 주차한 순간이 되면 최고조에 오른 피로감이 다소 사라지긴 하지만 이렇게 멈추는 일은 쉽지 않은 선택이다. 여기서 쉬어가는 만큼 휴식이 줄어드는 셈이다. 그래도 이 정도는 기억에 담겨야 하지 않을까. 쉬어가는 김에 사진도 찍고 물을 마신다. 그 사이 오토바이 몇 대가 지나간다.
우리의 바이크를 힐끗 보고 지나가는 듯싶더니 다시 돌아온다.
잉?
우리의 바이크 근처에 세대의 바이크들이 나란히 선다. 이윽고 헬맷을 벗고 세 명의 러시아 라이더가 나타난다. 거기에 여성 라이더의 등장이다.
그녀와의 만남에 나는 신이 났다. 영어로 통성명을 나누고 나서는 번역 앱을 사용해서 대화를 나눈다. 땀에 흠뻑 젖었지만 온 몸에 보호 도구를 완벽하게 장착했다. (보호장비를 멋없다고 생각하는 일들ㅇ리 있다. 안전장비야 말로 제일 멋진 패션 아이템이다.) 그녀의 스티커를 받고, 나는 준비해 간 동호회 티셔츠를 선물한다.
러시아의 라이더들은 하루에 1,000km가 기본인가 보다. 이제 막 라이딩을 시작했는데 우리가 내일 도착할 곳까지 달릴 거란다. 휴가를 내서 친구가 있는 동네로 놀러 가는 것이란다. 어깨를 으쓱하며 그 정도쯤은 별거 아니라고 얘기한다. 땅이 넓고 끝없는 길을 가진 나라의 라이더는 달라도 다르다.
그러나 우리는 그저 작은 나라, 서울에서 부산까지 하루 만에 왕복할 수 있는 대한민국에서 왔지 않은가. 계획대로 한 시간이 지나 숙소에 도착한다. 무리는 금물, 모스크바가 코앞이다.
숙소가 점점 좋아진다. 이번 숙소 옆엔 대형마트가 있고 아파트가 곳곳에서 보인다. 노을이 지기 전에 도착한 우리는 마트에 들러 먹을 것을 사고 방에 돌아와 한참을 해지는 노을을 구경했다. 내일은 또 다른 도시의 노을을 구경할 수 있을 것이다.
하루가 길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긴 거리를 달려 매일 새로운 도시에서 머무른다. 마음만 먹으면 더 먼 거리를 갈 수도 있고 한 달 동안 러시아의 모든 도시에서 하룻밤을 보낼 수도 있다. 어떻게 여행을 하든 언젠가는 끝이 날 것이다. 그 끝이 마치 모스크바인 것만 같다. 손가락을 꼽아 몇 번의 밤이 남았는지 신나서 세어본다.
매일이 여행이면 행복할까.
아니, 기다리고 있는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여행이 행복하다.
이 풍경, 내음, 낯선 하루를 보내는 설렘과 긴장이 끝나고 익숙한 나의 집, 나의 고향으로 돌아갈 날이 기다려진다. 여행 속의 기다림이야말로 내가 힘들지 않은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