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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nA Jan 20. 2018

하늘 아래, 길 위에.

사랑하는 이와 함께.

비 내린 어젯밤, 세차게 창문을 때리던 바람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다.


아침은 어김없이 찾아왔고, 언제나 항상 일찍 일어나는 그에게 누가 되지 않게 후다닥 정리를 마쳤건만 여전히 나는 느림보이다. 잃어버리는 것보다는 느린 것이 낫다. 하나씩 체크하고 놓고 간 물건이 없는지를 마지막까지 확인하고 또 확인한다. 


매일 움직여야 하는 여행에서 짐은 두 가지로 분류된다. 

매일 가지고 들어가야 하는 필수 짐: 옷, 세면도구, 장난감 전자기기, 필수 비상약.

없어도 상관없는, 혹은 이제는 필요 없는 바이크와 함께 묶어놓을 수 있는 짐(도난당해도 질끈 눈 감을 정도)

: 빨랫감, 전체 비상약, 우비, 비상식량, 아직은 입지 않은 얇은 옷.


여행을 오기 전에 미리 준비하고 정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쓸데없는 짐이 많은지, 게다가 짐을 따로 싸다 보니 그가 알면 무척이나 싫어할만한 짐들도 꽤나 된다. 요가매트며 가끔 읽겠다고 꾸역꾸역 들고 온 책까지.


오늘도 마찬가지로 서로의 짐을 알아서 정리한다. 그는 나보다 빨리 정리하고 미리 내려가서 점검까지 마친다. 아침밥이 늦은 시간이라 미리 정리를 마치기로 한다. 짐을 들고 내려오는 것부터 바이크에 꽁꽁 동여매는 것을 그가 지켜본다. 슬슬 입으로 잔소리가 시작된다.

"오빠, 만약 내가 오빠 아들이라면 되게 힘들 것 같아."

짐을 동여매는 것을 나 스스로 해보려고 노력하는 것을 멈추기로 한다. 그의 눈치를 보며 혼나지 않으려고 꼼꼼하게 해보지만 언제나 타박이 시작된다. (잘 못하는 건 사실이니 화가 나진 않지만 그냥 당신이 해주면 안 돼?라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는다.)


아침마다 반복되는 상황이 싫진 않다. 소꿉놀이 같이 서로 아웅다웅, 야옹 냐옹. 치사하고 더러워서 내가 하고 만다고 버티면 싸움이 되겠지만 나는 항상 그저 미안하다 말한다. 사실 미안하다. 아무리 알려줘도 그대로 따라 하려고 해도 그가 한 것보다는 항상 서툴다. 평소와 다르게 그는 나의 서툼을 잘 다독이지 못한다. 그가 이 여행에서 나의 안전을 책임지기 때문에 느껴야 하는 평소와는 다른 긴장감 때문이 아닐까. 싸움이 되기 전에 나는 그의 사랑이 먼저 보인다. 화를 내는 것도 짜증을 내는 것도 시작은 모두 사랑이다.  

아침은 그저 호텔식 뷔페이다. 어제저녁엔 우리만 투숙객인 줄 알았는데 제법 사람들이 많다. 역시나 그는 아주 조금 먹고 멈춘다. 나는 그보다 더 많이 먹고 더 많은 시간을 느긋하게 식당에서 보내고 만다. 언제나 그런 시간적 차이 때문에 그는 흡연을 할 수 있다. 사람들이 가끔 내게 묻는다. 너는 참 많은 것을 이해하는 것 같다고. 그가 나와 함께 살면서 누리는 자유가 많은 아내들이 금지하는 것들이다. 한 번도 그런 생각을 못하다가 욕인지 칭찬인지 모를 말을 자주 듣다 보니 내가 과연 그런 아내인가라는 생각이 든다. 그게 무엇이든 여행에 있어서 우리의 규칙은 빛을 발하고 있다. 


우리가 묵었던 호텔의 형태가 지난날 제주도에서 진행했던 호텔 프로젝트를 연상시킨다. 

그래도 15년을 한 가지 분야에 몸 담았던지라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머릿속에, 본능 속에 들어가 있다. 무의식 중에 툭 튀어나오는 말들,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들, 연상되는 여러 가지 형태들 다 그 속에 들어있다. 어쩌면 그 쪽일이 내 천직일지도 모르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여기까지 와서 오래된 러시아의 호텔을 보면서 제주도의 그 프로젝트를 떠올리다니 말이다. 

내 인생은, 아니 내 직업은 어디로 흘러가게 될까. 



아침의 흐렸던 하늘이 점점 맑아진다. 신이 난다. 오늘은 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둘째 주까지만 해도 도로 상태는 예측불가, 제대로 된 도로를 만나는 날이 많지 않았다. 가끔 어느 구간은 공사를 막 끝낸 것처럼 반짝거렸지만 그 끝에는 미처 끝내지 못한 공사장을 지나기 마련이라 이래저래 힘들었다. 모스크바에 다가갈수록 길 상태가 좋아진다. 주변 풍경도 좋아진다. 


누가 이런 곳에 와보기나 했을까. 벌레들의 천국이지 싶었던 지난날과는 달리 도시에 가까워지면 벌레도 줄고 누군가가 손질한 듯한 들판이 나타난다. 숲도 야무지고 들판의 꽃도 야무지다. 

유채꽃 밭 생각이 났다. 뭉게구름이 가득한 저 끝, 한없이 노란 물결이 넘실거린다. 역시 길 위에 있을 때 가장 빛난다. 바이크를 타고 여행을 다니면 어디서나 멈출 수 있다. 그저 힘들 때까지 달릴 수도 있다. 바람을 온몸으로 부딪히며 달라진 공기와 바람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부부가 함께라서 서로 같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힘든 여행의 길 끝에 더 서로를 사랑하게 된다고들 하지만 서로를 더 미워할 수도 있다. 사소한 것들이 짜증이 되고 서로에 대한 원망이 커질 때도 있다. 그런데 이렇게 길 위에 함께 서고 나면 그 마저도 잊게 된다. 


길 위에서 얻는 것들을 뭐라 설명할 수 있을까. 글로도 사진으로도 전하기 힘든 커다란 감정이 일렁인다. 형태도 없고 기억조차 선명하지 않아 가만히 혼자 되새기다가 사라질 수밖에 없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면 그렇게 잊힌다. 왜 우리 둘이 함께 여기까지 왔는지에 대한 대답이 거기에 있다. 잊히기 전에 묻히기 전에 한 번쯤은 서로에게 이 날을 깨워줄 수 있겠지. 


당신, 그 길 생각나?
 하늘이 너무 파래서 가짜 같았던 날에
제주도 유채꽃보다 더 작은 꽃들이 바람에 파도를 치던 그 들판말야.

이러니 매번 그날 아침의 신경전이 용서가 된다. 그리고 다시 한번 그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얼마 남지 않았다. 오늘의 최종 목적지는 들어보지 못한 도시. 쿠르간이다. 숙소는 도시 외곽으로 잡았다. 도시 내부로 들어가면 관광은 하겠지만 퇴근길과 맞물려서 이중으로 겪어야 하는 교통체증이 먼저 걱정되었다. 점점 러시아를 횡단하는 여행의 묘미가 길에 있다는 것을 느끼기에 소도시를 관광하는 것을 선택하지 않게 된다. 이른 4시, 도착 예정시간이 덕분에 빨라졌다. 


길의 상태를 믿었기에 우리의 속도가 점점 높아졌다. 120km를 넘어 130km까지 올라가면 몸의 진동이 달라진다. 속도의 느낌은 한순간에 확 달라지고 그 변화가 무서운 지점이 딱 130km이다. 다행인 건 나는 그저 앞을 바라보고 그의 바퀴가 지나간 길만 달리면 된다는 것이다. 


어어 엇!

어어 우악! 

오빠! 나 가방이 날아간 것 같아. 


우리의 지나친 믿음과 편안해진 마음 탓일까. 길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그것도 아주 큰 구멍들이 뻥뻥 뚫린 위태로운 상태로. 바닥과 구멍의 높이 차이가 너무 심해 순식간에 쿵하고 쇼바도 주저앉고 뒷바퀴가 바이크의 몸통을 친다. 몸의 균형은 잡았으나 크게 충격을 받은 탓에 무언가 하나 떨어진 것 같아 속도를 줄여본다. 다행히 떨어진 것도 없고 당장 바이크가 멈추지도 않는다. 허리에 갑자기 큰 충격이 왔지만 그 정도로 다칠 체력은 아니다.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천천히 달리다 처음 나오는 주유소에 바이크를 세우고 하나씩 점검을 시작한다. 


그리고 처음으로 부서진 파트가 나왔다. 

국제 번호판이 부러졌다. 머플러에는 움푹 파인 자국이 여러 군데 생겨났다. 그의 사이드 백이 벌어졌다. 사소한 일들이긴 하지만 번호판이 부서진 걸 보면 충격이 어지간히 크긴 했나 보다. 달랑거리는 녀석을 아예 떼 버리고 보이도록 뒷 가방에 동여맸다. 번호판이 떨어져 나가 나를 치거나 다른 파트에 부딪혔다면 어땠을까. 


죽음을 한 번도 이렇게 가까이에서 느껴본 적이 없다. 죽을 수도 있구나. 당신이나 나나 이 길에서 한끝 차이로 죽을 수도 있구나. 만약 당신이 사라지면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가장 가까운 이의 부재가 순식간에 성큼 내 눈앞에 다가왔다가 사라진다. 곁에 있을 땐 잘 모른다는 옛 말이 하나 틀린 말이 아니었다. 


다시 바이크 위에 올라앉는다. 이제는 조심조심 앞길을 살피게 된다. 방심하지 말아야지. 미처 그 길을 보지 못하고 내달린 것을 그는 후회한다. 자신은 감당할 수 있지만 뒤에 따라오는 나를 계산하지 못했다고 본인 탓을 한다. 나는 너무 따라붙어서 달리는 바람에 내가 실수한 거라고 미안해한다. 그리고 우리 모두 무사한 것에 감사한다. 길 위에는 너무나 많은 위험이 있다. 그래서 죽음을 항상 염두에 두고 달린다. 사는 것도 그렇게 살아가면 좋을 텐데, 당장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살아가면 참 다르게 살 것 같은데.  바이크가 위험한 것, 죽음을 항상 생각하는 것은 오히려 더 안전하게 운전하게 되는 습관을 만든다. 언제나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고 온 몸의 감각을 동원해 주변의 모든 것을 살피게 된다. 안전한 라이딩이 우리의 첫 번째 목표이다. 다치지 않고 살아서 멀쩡하게 돌아가는 것. 그리고 다시 일상을 살아가는 것. 

점심을 넘어가면서 날이 꽤 따뜻해졌다. 점심도 거르고 간식을 먹으며 달린 탓에 정해진 시간대로 숙소에 도착할 것이다. 어제의 비 때문인지 하늘은 변화무쌍하다. 파란색과 하얀색의 향연이다. 누가 그렸는지 매번 놀라게 된다. '지구'라는 단어가 다르게 다가온다. 화면으로 사진으로 보는 것과 다르다. 큰 하늘 아래 나와 그, 둘 뿐이다. 믿고 기대고 의지할 사람은 너와 나, 오직 우리뿐이다. 


달리다가 멈추다가 또다시 멈춘다. 길 위에 서 본다. 우리는 그저 평범한 부부다. 회사를 다니다 만났고 결혼을 하고 같이 회사를 그만두고 여기까지 왔다. 중요한 인생의 결정을 너무 쉽게 해버린 게 아닌지 나 자신의 결정임에도 놀라곤 한다. 어쩌면 나는 이 길을 달리기 위해 이 사람을 만나고 이 하늘을 만나기 위해 여기까지 온 게 아닐까. 


길 위에서 이렇게 큰 하늘 아래 서보면
보잘것없는 '나'의 크기와 함께
그럼에도 소중한 '우리'의 삶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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