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부담감이 사라지지 않는 길 위에서 아내가 웃는다.
아침부터 부산하다. 이틀을 쉰 덕분에 몸이 쌩쌩하다. 어쩌면 쉬면 쉴수록 늘어질지도 모른다. 바짝 조인 긴장감이 흐물흐물해질 무렵 우리는 짐을 동여맨다.
오늘은 노보시비리스크를 떠나 옴스크까지 간다. 모스크바까지 5일의 여정을 계획했다. 이르크추크에서 헤어진 친구들이 모스크바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바이크와 사람이 따로 횡단 열차를 탄다. 4박 5일 동안 설국열차를 직접 경험한 듯했단다. 그리고 언제쯤 올지 모르는 바이크를 기다리며 모스크바의 게스트하우스를 찾았단다. 그들의 빠른 여정 앞에 부러움이 뭉글거린다. 만약 횡단 열차의 존재를 미리 알았다면 우리의 여행 계획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오늘의 주행은 매우 순탄하지 않다. 출발하자 내린 비로 촉촉이 젖는다. 한 시간 만에 홀딱 젖고 말았다. 다행인 건 우리가 평소처럼 긴 주행을 한다는 것이다. 언젠가는 이 비가 그칠 것이고 다시 맑은 해가 찾아올 것이다. 그리고 그대로 이루어졌다.
첫 번째 주유소까지만 해도 날씨는 매우 맑았다. 파란 하늘에 구름이 희미해져 경계가 보이지 않는다. 주유를 마치고 화장실에 들르는 동안 가방 안에서 챙겨 온 과자 더미를 꺼낸다. 아침부터 부산스레 챙겨 온 커피와 함께 잠시 몸을 쉬게 해준다. 주유소는 3번 들른다. 200 km 당 한 번씩이다. 같은 기종을 선택했지만 항상 그의 주유등이 먼저 불을 밝힌다. 차체의 무게도 다르고 라이더의 무게도 다른 탓이다. 주유는 한 번에 꽉 채워 넣는다. 자리를 잡고 나면 나는 시동을 끄고 주유소로 가서 계산을 한다. 그 사이 준비를 모두 마친 그가 계산이 되자마자 작동이 되는 호스를 이용해서 그의 바이크를 먼저 주유하고 내 것을 주유한다. 처음에는 그 양을 가늠하지 못해 매번 다시 주유를 끝내고 돈을 돌려받곤 했다. 그러나 지금은 어느 정도 주유해야 하는지 잘 안다. 둘이 합쳐 용량을 정하고 약간 남은 리터는 휴대용 기름통에 넣는다. 덕분에 이제는 한결 주유하는 속도가 빨라졌다.
다시 달리는 기분이 썩 유쾌하다. 다가오는 모스크에 도착하는 날이 손에 꼽힌다. 멀게만 느껴지는 목적지가 눈앞에 다가오니 이미 백점인 줄 알고 있었지만 시험지를 받아 들지 못한 마음처럼 설렌다. 가야 하는 날들이 모쪼록 설렘 때문에 망치지 않아야 할 텐데, 들떠있는 내 마음을 신랑은 너무 잘 안다. 차분히 나를 가라앉히는 것 또한 이 여행에서의 그의 임무이다.
잠시 휴게소에 멈춘다. 갑자기 흐려지더니 비가 내렸다. 한참을 달리다 보니 이미 젖을 대로 젖었는데 멈추자마자 비도 멈춘다. 포장지에 쓰인 러시아어가 익숙하게 보일 정도로 한국에서 파는 것과 맛도 모양도 똑같은 젤리를 뜯는다. 한 입 넣고 오물거리고 화장실을 다녀오고 났더니 이제 조금 몸이 풀린다. 비가 더 오면 어쩌지 고민하는 찰나 머리 위의 비구름이 무겁게 느껴진다. 우리가 달려야 하는 방향으로 밝은 빛이 내리쬔다. 거칠 것 없는 하늘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앞으로의 날씨가 보인다. 붉은빛이 저 끝에 보이는 것이 희망적이다. 다시 바이크에 몸을 싣는다. 제대로 된 점심을 먹기보다 주유를 하는 곳에서 소소한 간식을 사 먹기로 한다.
이제는 약간 현지식에 질린 탓도 있다. 특히 식당에서 먹는 감자, 쌀, 그리고 카레 비슷한 국물까지 향신료 역할을 하는 푸르고 길쭉한 잎에서 나는 묘한 향이 묻어나는데, 그게 영 그의 입맛에는 맞지 않는단다. 나는 맛있다고 쭉쭉 들이키는 반면 그는 소화도 시키지 못하고 한입 간신히 대로 포크를 내려놓는다. 그나마도 빵과 과자 정도는 주는 대로 잘 먹어주니 그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날은 다시 맑아졌다. 주유를 하기 위해 멈춘다. 주유소에는 우리나라 뺨치는 편의점이 붙어있다. 지난 2주 동안 철창이 쳐져있는 오래된 주유소를 거쳐오며 마치 뽑기를 하는 기분이었다. 남아있는 기름을 축내면서 최대한 좋아 보이는 주유소에 멈추려고 노력했지만 항상 허덕이며 마지막에 어쩔 수 없이 멈추게 된다. 화장실은 갈 용기를 간신히 쥐어짜 내 모든 것을 해결하고 출발하고 나면 바로 다음 주유소가 엄청 좋은 경우가 많았다. 아쉬움에 땅을 쳐보지만 다시 멈출 수 없었다. 그런데 노보시비리스크를 지나니 웬만한 주유소는 다 괜찮다.
우리의 여행은 사서 하는 고생이다. 기왕이면 나는 덜 고생하고 싶다. 라이딩을 즐기는 것에 고생이 필수적은 아니니까. 어렵고 무섭고 힘든 상황은 피하고 싶다. 따뜻하고 정갈한 숙소에 몸을 뉘이고 깨끗한 타월에 몸을 닦고 밥은 제대로 된 식당에서 먹고 싶다. 그게 모두 가능하지 않은 곳을 이미 지나왔다. 이제야 내가 살던 세상과 조금은 닮아있는 곳에 도착했다.
여행에서 나는 계속 우리를 변명한다. 왜 캠핑을 하지 않는지, 사람들이 많은 바이크 축제를 쫓아다니지 않는지, 남들이 유라시아 횡단을 하는 것과 다른 이유를 찾는다. 딱히 정해놓은 규칙은 없는데도 못내 나는 아쉽다. 캠핑을 못하는 것도, 러시아 바이커들을 만나서 축제를 가는 것도, 만약의 경우를 무조건 피하고자 하는 신랑의 조심스러움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뭔가 정석을 놓치는 것만 같다.
그러다가 우리의 여행의 장점을 나열한다. 우리는 각자의 바이크를 탔고 가장 빠르게 횡단을 하고 있고, 숙소도 저렴한 호텔을 골라서 가고 있지 않냐고.
"만약 내가 너를 데리고 오지 않았다면 나도 걔들처럼 여행했을 거야. 그렇지만 나는 너와 같이 여행을 하고 있잖아. 어쩌다가 생길지 모르는 일들을 굳이 만들고 싶지 않아.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여행을 하는 거고 그 누구도 판단을 내리지 않아."
나의 모험심과 도전정신은 객기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 갓 10,000km를 주행했지만 당기는 것에 간신히 익숙해졌을 뿐이다. 주차를 할 때면 여전히 그를 불러 어디에 어떻게 해야 할지를 묻는다. 혼자서는 아직 아무것도 못한다는 무의식이 나를 아직도 지배한다. 그 없이는 나는 애송이 라이더이다. 그 사실이 못내 좋기도 하지만 아쉽기도 하다. 그렇다고 나의 모험정신을 펼쳐놨다가는 안 그래도 예민한 그는 폭발할지도 모른다. 그렇다. 우리는 부부지만 2 사람이다. 아주 다르게 자란, 나이도 많이 차이나는, 게다가 남자와 여자라는 엄청난 성별 차이까지 있지 않은가.
러시아의 종착지인 모스크바가 눈 앞에 닥치자 확실히 도시가 커지고 길도 널찍하다. 2차선밖에 없던 도로가 4차선으로 바뀐다. 넓은 도로를 씽씽 달리는 차들 가운데 우리가 좋아하는 오래된 바게트 빵 모양의 차가 보이지 않는다. 수도에 가까워질수록 보이는 풍경이 정갈하다. 그만큼 호텔값과 외식비가 커진다. 씀씀이를 모두 나에게 맡긴 터라 오늘의 숙소 또한 신중히 골랐지만 매번 그 가격과 품질에 대해 그의 반응이 나에게는 제일 중요한 일이 되어버렸다. 옴스크의 숙소가 또 한 번의 우리 사이의 작은 이견을 만들어낸다.
도착하기 직전까지만 해도 다시 맑아진 하늘과 상쾌한 바람 덕에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옴스크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흐려진다. 폭풍이 불 것 마냥 하늘이 잔뜩 구겨지더니 빗방울이 하나둘씩 떨어진다. 역시나 도시에 들어가는 입구의 도로는 파이고 울퉁불퉁하다. 퇴근시간에 딱 겹쳐서 차들도 엉킨다. 다시 그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진다. 문제는 숙소로 들어가는 길이 너무 어렵고 일방향 길들로 이어지기 시작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여기 맞아? 확실해? 확실하지 않아도 확실하다 답해본다.
분명 숙소는 나쁜 편이 아니었다. 평도 좋았고 도심에서 떨어져 있었으나 공항에서 가까워 주로 기장들이 이용한다고 했고 주차장도 별도로 있었다. 추가 금액 없이 말이다. 그런데 가는 길이 영 꼬불꼬불한 데다 외곽에 위치한 탓에 주변에 먹을 만한 레스토랑도 마트도 찾을 수가 없다. 영락없이 숙소에 갇혀버리고 말았다.
도착하자마자 태풍처럼 바람이 분다. 카운터에서 전화가 온다. 비가 엄청나게 내릴 거라는 예보가 있으니 다른 곳으로 바이크를 옮겨달란다. 까다롭게 구는 것 같은지 그가 귀찮아한다. 그러나 비가 내릴 거라서 짐부터 다시 여매야 한다. 비에 젖을지도 모르니 씌워야 하는 것들도 다시 한번 점검한다. 그 사이 비가 굵어진다.
모든 일을 마치자 거짓말처럼 비가 세차게 내린다. 잠시 동안 나가 있었는데도 머리가 흠뻑 젖었다. 배가 고픈데 나갈 수가 없다. 결국 호텔 레스토랑을 이용해야 한다. 우리 말고는 투숙객이 없는 것 같다. 주문을 해야 하는데 자꾸 그의 눈치가 보인다. 우리 2 사람은 다르다. 눈치를 보는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계속 뾰료통해 있는 탓에 나는 마음이 불편하다. 그는 그 나름대로 모든 것을 참고 불평을 늘어놓지 않으려 애쓰는 중일 게다. 거기에 최악의 상황이 벌어진다. 나름 호텔인데 얼음이 없단다. 다시 한번 나는 그의 눈치를 살핀다. 대충의 식사를 마치고 대충의 짐 정리와 충전을 하고 나니 밖은 깜깜해져 있다. 하나 다행인 것은 흡연을 할 수 있는 발코니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 하나에 살포시 기분이 좋아진다.
나는 그렇게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핀다. 적어도 바이크에서 내려왔을 때는 말이다.
그가 얼마나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는지 잘 안다. 바이크에 올라탔을 때 말이다.
그의 민감함이 이해가 되고 그의 짜증을 그저 받아들인다. 어쩌면 나는 바이크에 타는 순간 그의 무한한 짐일 테고 가슴 한편을 묵직하게 만드는 책임감일 것이다. 하루 10시간을 그 부담감 속에 시달리는 동안 나는 한없이 즐겁고 명랑하다. 나의 즐거움 뒤에 그의 무거운 몸과 마음을 나는 잘 안다.
부부가 같이 백수가 되면 가장 좋은 것은 책임감과 의무감에서 동시에 벗어나 같은 감정을 느낀다는 것이다. 거기에 언제 돌아올지 모르고 사서 고생인 여행까지 더해지면 그야말로 최고의 부부가 된다. 서로를 알던 만큼 모르는 것도 많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내 어깨의 짐과 그의 어깨의 짐이 서로 다르기에 똑같은 것을 요구하지 않게 된다. 나는 나대로, 그는 그대로 우리는 서로에게 최선을 다할 수 있다.
한참의 비바람이 밤새도록 계속될 모양이다. 세차게 불어도 상관없으니 내일 우리가 달리는 방향으로만 쫓아오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