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보다 서구화된 러시아 공업도시에서.
끝이 없던 길은 가도 가도 똑같았다. 어느 시대에 지어진 지 가늠이 되지 않지만 확실한 건 같은 시대에 지어졌다는 것이다. 이차선 밖에 되지 않는 마을 어귀의 초입에서 멀리 바라본 건물들은 같은 색으로 칠해져 있다. 낡은 순서대로 색이 바래져 있었고, 간혹 새롭게 만들어진 담벼락 뒤로 최신 건축자재로 변신한 집들이 보였다. 러시아는 다 이런가. 아직도 옛 체제의 그림자가 지워지지 않은 채 그들은 옛 세상을 살고 있는 걸까.
한국은 빠르다. 유행도 금방 지나간다. 유행을 만드는 미디어의 속도도 빠르다. 언제 유행했었는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많은 것들이 훅 스쳐 지나간다. 오래된 것들과 익숙한 것들이 주변에 하나도 남지 않았다. 대학교 때부터 지금껏 살아온 동네인 홍대 지역은 더더욱 그렇다. 대학시절 그대로인 곳이 없다. 하루 만에 세상이 변한다. 그리고 점점 빠르게 변하는 속도에 발을 못 맞춘 점점 느리게 살고 싶은 나는 나이 탓을 한다.
노보시리비리스크는 내가 기억하는 고향의 시내와 닮아있다. 어딘가에서 뚝딱뚝딱 짓고 있는 쇼핑몰 뒤로 오래된 간판의 낡은 가게들이 스러져간다. 그 흔적을 미처 지우지 못하고 새롭게 반짝이는 간판만 매달아 세련된 레스토랑과 최신식 점포들이 들어서있다. 지방 소도시에서 자란 나에게 이 도시는 참 낯익다.
금요일에 도착한 탓에 주말을 보내게 되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젊은 부부들과 데이트하는 연인들이 눈에 띈다. 거리들은 북유럽의 어느 거리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오히려 간결하고 정확한 대칭의 건물의 입면은 오래된 세월을 입어서인지 정갈하고 편안하게 느껴진다. 거리에는 쓰레기가 없고, 걸어 다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화려한 색깔의 옷을 입었다. 오랜만에 바이크 복장에서 벗어나 얇은 원피스를 꺼내 입고 나도 그 속으로 들어간다.
강아지를 데리고 나와 묘기를 보여주자 사람들이 동전을 던진다. 강아지는 분수대로 뛰어들어 첨벙거리고 아이들은 강아지 곁을 떠나지 못한다. 아이와 동물이 어우러지는 주말의 공원, 그 여유로움 속에 느리게 시간이 간다.
바이크에 올라타면 몸에 부딪히는 바람의 속도가 마치 시간이 날아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120km/h를 달리는 동안 일분일초를 아끼는 것만 같다. 느리게 걸어서 가면 몇 날 며칠이 걸릴 테지만 바이크라는 날개를 달고 나는 벌써 여기까지 왔다. 그 빠름을 지금 이 곳의 느림으로 충전을 한다.
오랜만에 뚜벅이를 자청한 터라 버스를 타고 여기까지 나왔다.
곧 멈춰 설 것만 같은 버스에는 표를 받는 사람이 있다. 그 이가 전해준 잔돈과 영수증이 손끝에서 까슬거린다. 우리에겐 카드 한번 톡 대는 것으로 끝나는 일을 여기서는 아직도 누군가가 버스기사와 함께 버스를 지키고 있다. 조금씩 우리 사회에서 사라져 간 누군가의 직업이 아직 이 곳에는 남아있다. 그 불편함을 조금 늦게 알게 되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
영혼마저 탈탈 털어버리는 기름진 햄버거집을 찾아간다. 미국 브랜드이다. 러시아에서 만나는 미국 프랜차이즈라니, 우리나라에는 들어왔다 사라졌단다. 어제 라이더 친구가 추천해준 러시아 식당을 찾아가기엔 우린 너무 게으르다. 눈 앞에 보이는 익숙한 가게에서 넘쳐나는 프렌치프라이를 가득 입안에 넣고 우물거린다. 배가 부르니 모든 게 한없이 느려진다. 순간 이동해서 호텔로 돌아가고 싶다. 침대에 누워 멋진 하늘 위로 구름이 넘실대는 것을 바라보고 싶다.
하늘을 바라보는 일들이 매일 반복되지만 질리지 않는다. 누워서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본다. 구름이 째깍거리는 소리를 본다. 어서 빨리 숙소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커진다. 한가로운 시내 구경을 마치고 유명하다는 오래된 극장의 로비를 거쳤다가 마트까지 순식간에 돌아본다. 오랜만에 문명과 만난 것처럼 대형마트는 천국처럼 느껴진다. 무언가를 산다 해도 소진할 시간이 없다. 오늘 딱 먹을 수 있는 만큼만 사야 한다. 짐칸은 넉넉하지 않아 간단한 간식을 고르는 손도 망설여진다. 결국 초콜릿과 작은 과자 조각 몇 개를 주워 들고 나온다. 그리고 바로 건너편의 작은 카페로 향한다.
카페다운 카페를 만났다. 커피의 종류도 내리는 방식도 다양하다. 다디단 간식까지 합쳐지니 오랜만에 합정이나 가로수길의 익숙한 공기가 느껴진다.
문득, 이 공간을 떠나고 싶지 않은 강한 충동이 일렁인다. 조금만 더 익숙하고 편리하고 아기자기한 이 카페를 벗어나고 싶지 않다. 내일이면 다시 짐을 챙겨 모스크바까지 향하는 긴 여정이 시작된다. 가장 많은 이들이 염려했던 것, 고생스러운 길에 질려버러 중도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까. 힘들고 지쳤던 날들보다 익숙한 공기를 마주한 지금이 더 돌아가고 싶어 진다.
익숙함.
익숙한 게 좋다고 말할수록 변화가 멀어져 가는 느낌이다. 한편으론 그 익숙함이 가장 편안하고 행복한 것을 받아들일 나이가 되었다. 다시 일어나서 뭔가를 새로 시작하는 흥분도 좋고 이제 그만 나만의 땅굴로 들어가 남은 시간을 천천히 관망하는 것도 좋다.
변화는 아주 느리게 온다. 조바심이 마음을 치고 올라올 때 즈음 나는 여행을 떠났고 이제야 내가 떠났음을 실감한다. 머릿속에 셈법과 가슴속의 낭만이 동시에 변하나 보다. 대기업에서 마지막으로 선물로 받은 위로금이 두 대의 바이크가 되고 하루하루 늙어가는 나의 자궁을 걱정하며 하루빨리 아이를 가져야겠다는 강박관념이 희미해지고 있다. 이대로 조금 더 여행을 길게 늘여본다.
하루의 휴식이 달콤하다. 신랑은 그 휴식을 시내가 아닌 조용한 숙소에서 마무리하고 싶은 모양이다. 결국 조금 더 시내 구경을 하고 싶은 나는 남은 길을 살랑살랑 걸어 다시 버스를 타러 간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가 원하는 것을 아주 조금씩 늦추거나 당기곤 한다. 함께 여행을 한다는 것은 같이 살기로 한 것보다 더 고되다.
돌아가는 길에 제일 핫하다는 테이크아웃 커피전문점에 들른다. 대기줄이 길어 이십 분을 족히 기다린다. 북적이는 커피숍 내부는 딱 봐도 센스가 넘치는 러시아 젊은이들이 가득이다. 아무도 아이스라테나 아이스커피를 시키지 않는 터라 우리의 주문을 러시아어로 불러도 금방 찾는다. 가방 하나 질끈 메고 온 여행이라면 매일 같이 들러서 사 먹었을만한 동네 커피이지만 나는 다시금 내일 떠난다. 그 반복적인 일상에 쉼표 하나가 이렇게 충전이 된다.
돌아가는 길은 버스 대신 지하철이다. 버스보다 훨씬 현대적이다. 푸른빛을 좋아하나 보다. 지나오며 보았던 많은 집들의 외벽 색도 비슷한 색이었던 기억이 난다. 잠깐 머물렀다 다시금 어디론가 흘러가야 하는 여행자의 눈 속에는 모든 것이 낯설고 새롭고 신기하다. 그 신선한 마음만큼이나 의외로 편안하고 익숙한 시내 구경을 마치고 돌아온다. 재정비하고 떠나야 할 내일이 있기에. 하루는 금방 지나간다.
여행도 그렇게 금방 지나갈 것만 같다. 꿈같던 횡단의 중간즈음에서 아쉬움과 안도감이 교차한다. 삶은 그렇게 모순되는 감정 덩어리 속에서 균형을 찾는 여정인가 보다. 어느 지점에 이르러야 완벽한 중간이 찾아지는지 모르겠다. 다만 오늘은 끝이 보이는 여행이 조금 안심이 된다. 내일을 달릴 때면 아마도 아쉬움이 커지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