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일에 선택권은 있습니까.
나는 아직 만 34세이다. 올해 6월, 만 35세가 된다. 간신히 취업성공패키지라는 국가의 취업, 창업 장려 프로젝트에 발을 살짝 넣을 수 있는 조건이 유효하다. 상담사와 나의 장, 단점을 함께 알아보고 새로운 시작을 위한 준비를 함께 고민했다. 상담은 3번, 삼주 정도 걸렸다. 그리고 이주 후 내 통장에는 십오만 원이 찍혔다.
어떤 교육을 들어볼까.
학원의 상술을 알기에 소중한 내 시간을 허투루 쓸 수는 없다. 고민 끝에 중부여성발전센터의 전자출판 전문가 양성을 선택했다. 무려 면접까지 본 끝에 이번 주부터 나는 학원을 다니는 공부하는 경력단절 여자가 되었다.
아직까지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그래서 어떤 것을 시작할 건지에 이 교육이 큰 영향을 주진 않았다. 그저 많은 이들을 보고 많은 얘기를 듣는다.
백수끼리 만나면 이미 지나간 일에 불과한 경력은 그 사람의 얼굴이 된다. 얼마큼 큰 회사에 있었느냐에 따라 누군가의 얼굴엔 자만감이 스치기도 하고 굳이 말할 필요도 없는 이야기들이 자기소개에 들어간다. 사람들은 최대한 자신을 표현한다. 그래봤자 어차피 백수지만 나의 가치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 요지는 모두 그것이다.
스쿠터를 타고 수업을 듣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 머릿에 한 가지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어떤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던 건 아니다. 그저 강사님, 선생님의 뻔하디 뻔한 단어들이 내 귀를 거쳐 뇌에 박혀버렸다.
스스로의 판단력, 추진력, 그리고 자신의 일.
취업을 하든 창업을 하든 나 하나로 인해 세상이 변할 리 없다. 결국 세상은 돌아가는 대로 돌아가니까. 그런데 나는 왜 이렇게 세상을 그냥 받아들일까. 왜 수동적으로 주어진 대로 살아갈까. 언제부터 이렇게 된거지?
생각해보자. 나는 대학교를 졸업할 때, 기고만장하기 그지없었다. 충만한 학력의 깊이, 아래로 쭈르륵 줄 서있는 후배들, 이제는 눈 감고도 찾아갈 것 같은 도서관과 돈을 쏟아부은 어학 실력.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 회사, 후회하리라~를 외치며 그렇게 반짝거리는 청춘을 쏘아댔다.
그렇게 직장을 들어갔다. 그런데 상사에게 신입사원이란, 나의 일을 도와주는 혹은 내 뒤치다 거리를 하는, 결정적으로 아직도 배워야 할 게 많아 나를 귀찮게만 하는 햇병아리이다. 나 역시 그랬다. 참다보니 햇병아리에서 중닭이 되었다. 그리고 회사를 그만두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나는 왜 일을 지시받았을까. 스스로 일을 찾아보라는 상사를 만나지 못했을까.
건축은 협업이다. 수많은 역할들 중에 당연히 누구나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있다. 그리고 각자가 잘하는 것도 있다. 두 가지가 일치하지 않는 불행은 누구에게나 해당된다. 결국 우리는 동료이지만 적이 되어 하고 싶은 일을 쟁탈하기 시작한다. 모두가 하고 싶은 일은 대부분 깔때기처럼 한 가지로 몰린다. 그럴 때, 모두들 가장 높은 상사, 우리의 보스를 바라본다.
'나를 선택해주세요. 내가 잘할 수 있어요.'
그런데 그 선택을 햇병아리가 받게 되면 모든 것이 꼬일 때가 있다. 햇병아리는 이중고에 털이 빠질 지경이 된다. 주인공이 되는 영광은 직급 순대로 가는 게 평탄하다는 것을 햇병아리들은 금세 배운다. 그리고 기다린다. 중닭이 되기를. 중닭이 되자마자 나온 나는 그 영광을 아주 쥐꼬리만큼 느껴보았다. (그런데 참 좋더라. 반면에 한계도 느꼈다. 나는 알 수 없는 상사의 마음을 그려내는 꼭두각시이고 마치 그것이 내 능력인것처럼 연기하는 연기자에 불과했다.)
"적극적인 태도로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진취적이고 역동적인 인재상이 모든 대기업, 중소기업의 워너비이다.
그러나, 기업들아. 그리고 직장인들아.
진취적인 직장인이 되겠다고 들어온 신입사원에게 제대로 된 일을 할 기회를 준 적이나 있는가.
선배들이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복사를 하면서도 배울 게 있어."
나는 그들의 말에 감동받았다. 복사를 하라고 주면 그 종이를 읽었다. 도면을 보았다. 아, 나는 이렇게 성장한다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속았다. 순진한 나는 바보였다. 만약 내가 복사할 시간을 도면을 그렸다면, 복사를 각자 알아서 하는 동안 내가 하고 싶은 어떤 업무를 찾았다면 어땠을까.
업무 분장의 늪은 상하관계를 더욱 고착시킨다. 그리고 잘 나가는 후배 앞에 무능력한 선배로 전락하는 것을 모든 직장인들은 싫어한다. 아니, 혐오한다. 그건 자신의 무능력이 아니라 시건방진 후배 때문이라고 침을 튀기며 항변한다. 못난 후배로 만들어 놓고 야근을 함께 하며 끈끈한 동지애가 싹튼다고 믿는 현상과 유사하다.
(줄줄이 사탕처럼 후배들이 생겼을 때 그 마음은 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는 일 잘하는 후배를 만난 순간 신세계를 만났다. 날개를 달아주자 금세 하늘을 장악하는 그 친구 덕분에 퇴근이 빨라졌고, 우리 모두는 행복했다.)
닳고 닳은 직장인들은 하늘로 날 준비를 마치고 이제 갓 열정의 딱지를 단 신입사원들을 자신과 똑같은 중닭으로 혹은 노계로 만드는 것을 가르침이라 말한다. 그래야 가장 중요한 일이 직급 순, 보스의 애정 순으로 주어져도 평화가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개개인의 능력이나 열정의 크기는 중요하지 않다. 직급 간, 세대 간의 갈등이라는 것, 사실 거기서부터 시작이다. 그런데 정작 그 고리를 끓어내지 못한 채 말도 안 되는 사무환경 변화와 캠페인, 문화 형성 따위의 프로젝트에 몰두했다. 열린 오피스 따위, 만들면 뭐하나. 보이지 않는 먹이사슬 앞에 신입사원들은 자신을 능력을 죽이는 시간을 대가로 월급을 사고 있는 것이다.
매스컴에 등장하는 직장인들은 한없이 나약하고 처량하고 불쌍하다. 그런데 가장 나약한 그들은 더 나약한 존재 앞에 강해지고 싶어 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처구니없는 그 상황들 모두 내가 자초한 것이다. 신입사원 시절, 나도 할 수 있는 업무들에서 배제되어도 항의하지 않았다. 선배들 뒤에서 복사기를 돌리거나 모형을 깎아대거나 말도 안 되는 스케치를 캐드로 옮기면서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업무 분장을 역량이 아닌 연차로 만들었다.
나이가 들수록 고집이 세서 말이 안 통한단다. 불행히도 직장인으로 살아온 시간이 많을수록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는 법이 오직 연차와 직급으로 누르는 것에 불과하는 사실을 부정한다. 새로 들어온 신입사원이 얼마나 반짝이고 효율적으로 일을 처리하는지 알고 싶은 사람도 없다. 그러니 대학생들은 직장에 들어간 순간 그동안 쌓아왔던 나의 역량은 발휘할 무대를 잃게 된다.
그렇게 직장인으로 살아온 사람이 백수가 되고 자신의 일을 시작하는 것을 상상해 보자.
과연, 스스로 일을 찾아 자신에게 줄 수 있을까?
그래, 나 자신에게 먼저 물어보자.
나는 상사가 주지 않아도 내 일을 찾아서 했던 적이 있었던가.
내 일이라 생각되면 때려 죽어도 내가 하겠다고 복사 따위 하고 싶지 않다고, 나도 이것 말고 이거 하고 싶다고 말했던 적이 있었던가.
아! 있었다. 사원 때, 실장과 대리가 자기들끼리 설계하고 나에게 보고서 따위를 시켰을 때(그것도 해봐야 할 줄 안다고), 나도 도면 그리고 싶으니 야근할 테니 껴달라고 했었다. 물론 들어주지 않았다. 그거나 잘하라고 했던 것 같다.
그랬구나. 적어도 나는 손은 번쩍 들 용기는 있었나 보다. 더는 기억이 나지 않는 걸 보니 그때 이후로 포기한 것 같긴 하지만.
지금쯤 신입사원들은 연수를 받고 부서에 배치되어 환영회식을 마쳤을 것이다. 너에게 일을 가르쳐 준다는 호의와 친절을 베푸는 선배들을 잘 지켜봐라. 가끔은 그 호의와 친절이 나를 바보로 만들기도 한다는 것을 알고는 있어야 한다. 복사를 하면서 배운다는 말도 안 되는 교훈에 감동받았던 신입사원으로서 요즘 친구들은 나와 달랐으면 좋겠다.